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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옛글과의 만남

산의 철학, 산의 미학(1)-정민

 
산의 철학, 산의 미학

 
 
 
산중에 뭐가 있길래
 
 
왜 산을 오르냐는 물음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대답한 것은 영국의 멀로리 경이다. 그저 무작정 산이 좋은 사람에게 왜 오르냐고 묻는 사람도 딱하지만, 막상 그 자신 뭐라 꼬집어 할 말도 없었을 것이다. 왜 산에 오르냐니, 무슨 그런 질문이 있단 말인가?
 
남북조 시대 陶弘景은 句曲山에 은거하며 수차례에 걸친 임금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어느날 임금의 詔書가 그에게 이르렀는데, 펼쳐보니 "산중에 대체 뭐가 있길래. 山中何所有"라 한 다섯 자가 내용의 전부였다. 산속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임금의 부름에도 한 번 들고는 나오질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도홍경은 한 수 시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산중에 도대체 뭐가 있냐고   
산마루엔 흰구름이 많기도 하죠.   
저혼자 기뻐서 즐거워할뿐   
가져다 님께는 드리지 못합니다.   
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
 
 
산중에 있기는 무엇이 있나. 산마루를 넘어가는 흰구름 뿐입니다. 가만히 바라보면 마음이 기쁘지요. 왜 기쁘냐구요. 다만 마음으로 기뻐 즐길뿐 말로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끝내 흰구름을 벗하며 산을 나서지 않았다.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냐 묻길래               
웃고 대답 아니해도 마음 절로 한가롭네.         
복사꽃 흐르는 물 아득히 떠 가거니             
또 다른 세상일래, 인간이 아니로세.              
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閒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李白의 〈山中問答〉이다. 산 속에 묻혀 사는 나에게, 왜 답답하게 산 속에 사느냐고 묻는다. 묵묵부답, 싱긋이 웃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말한다고 한들 그가 내 마음을 어이 헤아릴 것이랴. 또 낸들 무슨 뾰족한 대답이 있을 리 없다.  그저 소월처럼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라 할 밖에는. 김상용이 그의 시에서 "왜 사냐건 웃지요."라 한 것도 꼭 같은 심정이었을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복사꽃이 물 위로 떠 가니, 상류 어디엔가 武陵의 桃源이 있지나 않을런지.
 
孫一元이 西湖에 은거하고 있을 때 일이다.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가 지나는 길에 그를 방문하였다. 손일원이 그를 전송하러 나와서는 靑山만 바라볼뿐 한 번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벼슬아치가 의아하여 물었다. "산에 뭐 좋은 것이라도 있나요?" 그러자 그는 "산에 뭐 좋은 곳이 있을라구요. 하지만 靑山을 마주하는 것이 俗人과 마주하는 것 보다는 낫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왜 산에 사는가? 산은 왜 오르는가? 산에 무슨 좋은 것이 있는가? 산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궁금한 화두이다. 산은 저만치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인간 세상의 변화하는 것들을 물끄러미 굽어 본다. 그 산, 그 자연을 바라보며 인간은 삶의 원기를 얻고, 세상을 보는 지혜를 읽는다.  
 
杜甫는 〈江亭〉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물은 흘러도 마음은 바쁘잖코   
구름 떠가니 생각조차 더뎌지네.   
水流心不競  雲在意俱遲
 
 
아래로 아래로만 흐르는 물, 流水不爭先이랬거니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 했던가. 바쁘게 흘러가는 그 물을 보면서도 마음은 한가로와 바쁘지 않다. 하늘 위에 유유히 떠가는 구름, 그 구름 바라보다 내 마음도 느긋해진다. 이백은 또 〈獨坐敬亭山〉에서 산이 주는 삶의 위안을 이렇게 노래한다.
 
 
뭇 새들 높이 날아 사라져 가고               
외론 구름 홀로 한가로이 떠간다.                
서로 보아 둘다 싫증나지 않는 것은            
敬亭山 너 뿐이로구나.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높은 산 마루에 사려 앉으니, 불어오는 일진의 바람에 흉중에 아무 거칠 것이 없다. 골짜기 아래서 무엇에 놀란 새 떼들이 왁자지껄 높이 날아 저 등성이 너머로 사라진 자리, 아까부터 외론 구름 하나가 뉘엿뉘엿 한가롭게 하늘에 배를 깔고 누워 있다. 그 구름 아래 높이 솟은 산, 아무리 바라봐도 싫증나지 않는 산. 왁자지껄 떠들다 사라진 새 떼들처럼 속세에서 지고 올라온 티끌의 번뇌와 시름도 어느새 한가로운 구름의 마음이 된다. 새들은 그다지도 바쁘게 어디로 사라져 간 것일까. 왁자지껄 무리를 지어 들끓다가 사라진 새 떼는 사실 시인이 산 아래에서 지고 올라온 욕망과 번뇌의 찌꺼기는 아니었을까. 산 위에 올라선 시인은 그러한 번뇌와 시름을 훌훌 벗어 던지고 어느새 정처도 없고 집착도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의 마음이 되었던 것이다. 산은 언제나 인간사에 지친 나를 이렇듯 감싸안고 어루만져 준다.
 
다음은 金富軾의 〈題松都甘露寺次惠遠韻〉이다. 
 
속객의 발길 닿지 않는 곳   
올라서니 생각이 해맑아 지네.                   
산 모습 가을이라 더욱 고웁고                  
강 물빛 밤인데도 외려 밝아라.                  
해오라비 높이 날아 사라져 가고               
외론 돛만 홀로 가벼히 떠가네.                  
부끄럽다. 달팽이 뿔 위에서                     
功名을 찾아다닌 나의 반 평생.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
自慙蝸角上  半世覓功名
 
 
俗客의 자취가 끊어진 곳을 俗客이 홀로 찾았다. 산 마루에 올라 툭 터진 視界에 서니, 함께 짊어지고 온 속된 생각도 말끔히 씻어진다. 낙엽이 지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 여름 날의 화려에 견주면 보잘 것 없어야 할 그 모습은 조찰해서 더욱 좋다. 밤이면 빛을 잃고 검게 흐를 강물빛은 밤인데도 오히려 신비한 밝음을 간직하고 있다. 헐벗어 더욱 좋은 산, 밤이건만 오히려 맑은 강물빛은 집착과 욕망을 벗어 던져 더욱 투명해진 시인의 마음과 등가적 심상을 이룬다. `텅빈 충만`의 세계다.
 
깊은 밤, 색채의 대비도 선명하게 포물선을 그으며 시계를 벗어나는 해오라비. 홀로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경쾌하게 사라지는 돛단 배. 모두 얽매이고 집착하며 아웅다웅하던 속세에서는 생각치 못할 정경들이다. 그제야 시인은 새삼 功名에 얽매여 시비를 다투고 영욕에 집착하던 삶이 얼마나 구차하고 부끄러운 것이었던가를 깨닫는다. 돌아보면 그것은 달팽이 뿔 위의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높이 날아가 `스러진` 것은, 또 홀로 가볍게 `가버린` 것은 해오라비도 돛단 배도 아니고, 반평생 공명을 향해 있던 부끄러운 집착일 터이다. 이제야 그는 속객으로 들어온 가을 山寺에서 俗客의 태를 벗고, 거듭남의 정화감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은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 준다. 일상에 찌들어 생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을 때, 자연은 인간에게 소생의 원기를 불어 넣어 준다. 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때의 고금을 떠나서 자연이 예술의 변함 없는 경배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정민 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에서 나누어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