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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옛글과의 만남

달밤의 방문

[한양대학교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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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의 방문

간밤 달이 환하길래 박제가를 찾아가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집 지키던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풍채가 좋고 수염이 난 누런 말을 탄 손님이 벽에다 글씨를 써 놓고 갔습니다." 등잔으로 비춰 보았더니 바로 그대의 글씨입디다. 손님 온 것을 알려주는 학이 없음을 한하고, 문에다 글을 쓰는 봉황이 있음을 기뻐하였지요. 미안하고 송구하오. 이후 달 밝은 밤에는 감히 밖에 나가지 않을 작정입니다.
 
연암 박지원이 담헌 홍대용에게 보낸 짧은 편지의 전문이다. 달빛이 하도 좋아서 이웃에 살던 박제가를 찾아가느라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역시 달밤의 운치를 함께 나누자고 벗이 나를 찾았다. 언제 오시느냔 물음에 하인은 언제 오실 지 모르겠다고 싱겁게 대답했겠지. 멀건히 주인 없는 빈 마루에 걸터앉아 무료히 달빛을 바라보던 벗은 조금만 더 일찍 올걸 하며 붓을 꺼내 빈 벽에 실 없는 낙서를 했겠다.
 
"달빛이 하도 고와서 문득 보고 싶어 다녀 가네. 집에 붙어 있질 않고 어딜 그리 나다니는 겐가. 쯧쯧. 돌아가는 발길이 영 서운하구만."
 
그가 허탕을 치고 돌아간지 얼마 못되어 연암은 제자 뻘인 박제가를 데리고 신이 나서 돌아왔다. 풍채가 좋고 수염이 난 손님이 다녀가셨단 말에, 깜짝 놀라 등불을 가져 오래서 비추어 보았겠지. 아차차! 이 사람아. 조금만 더 기다릴 일이지 고새를 못참아 그냥 갔더란 말인가? 벽위에 너무도 또렷히 쓰여진 그대의 글씨를 보자니 내 마음이 안타까워 죽을 맛일세 그려.
 
옛날 서호에 살던 임포(林逋)는 손님이 오면 기르던 학이 밖에 나가 놀던 제 주인에게 날아와 손님 온 줄을 알려 주었다던데, 내겐 그런 학이 없으니 어쩐단 말인가. 그래도 봉황 같은 그대가 내 집 벽에 글씨를 남기고 가주니 나는 그것이 마냥 기쁘네 그려. 여보게, 담헌! 정말 미안허이. 내 이제 달 밝은 밤이면 집에서 꼼짝도 않고 자네를 기다림세.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게. 달밤엔 다시는 마실을 안나가겠단 말일세.
 

이런 편지를 읽다 보면, 나도 몰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달빛이 이토록 고맙고 소중하던 시절이 있었다. 인간의 조명이 보잘 것 없던 그때, 하늘 위로 둥두렷이 보름달이 떠오르면 천지가 대낮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공연히 개들은 허리를 배배꼬며 달을 올려다 보고 짖어대고, 사람들 마음도 까닭 없이 들떠서, 저녁밥 잘 먹고 나서 근질근질 좀이 쑤셔 뜬금없이 이웃의 친구를 찾아갈 마음도 먹고, 그러다 서로 간에 길이 어긋나기도 하고 말이다.
 
 
저물녘 용수산에 올라 그대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더군요. 강물은 동편에서 흘러와 그 흘러가는 곳이 보이지 않더이다. 밤이 깊어 달이 떠오길래 정자 아래로 돌아왔지요. 늙은 나무가 흰데 사람이 서 있길래, 나는 또 그대가 먼저 그 사이에 와 있는가 생각했더라오.
 
 
역시 박지원이 유한준에게 보낸 엽서다. 벗을 기다리다 오지 않자 무료한 나머지 이리저리 배회하며 용수산에서 한강물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강물은 이쪽에서 흘러와서 보이지 않는 저편으로 흘러가 버렸다. 밤이 이슥해지자 두둥실 달이 떠올랐다. 이제는 왔겠지 싶어 정자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달빛을 받아 흰 나무 아래 웬 사람이 서 있었다. 반가워 가까이 가보니 딴 사람이었다.
 
이 사람! 참 무심도 하이. 왜 오기로 해 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겐가. 달빛 아래 정자에 앉아 은빛 금빛으로 부서지는 강물을 보며 흘러가는 인생을 이야기 하자고 해놓구서. 하늘 위로 달빛이 차오르자 내 마음 속의 그리움도 넘치도록 가득해 지더군. 아쉬웠었네.
 
 
5월 그믐에 동편 이웃으로부터 걸어 연암 어른 댁을 찾았다. 때마침 희미한 구름은 하늘에 걸렸고, 숲속에 걸린 달은 푸르스름하였다. 종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은은하더니 나중엔 둥둥 점차 커지는 것이 마치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어른이 댁에 계실까 생각하면서 그 골목으로 접어 들었다. 먼저 그 집 들창을 살펴 보았다.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제자 이서구가 앞서 홍대용처럼 연암의 집을 찾아가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여름 밤에 연암 어른을 찾아간 이야기〉란 글의 첫 대목이다. 지금의 종로 3가 파고다 공원 뒤편에 있던 그의 집을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 가는 길, 물방울이 흩어지듯 들려오는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며, 골목으로 접어들자 그 집 창부터 바라보았다.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이 표현 속에 담긴 왈칵 끼쳐오는 반가움을 나는 알 것만 같다. 그 고맙고 살가운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아! 불빛이 휘황한 이 도시는 내게 너무도 삭막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