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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남명 유두류록(遊頭流錄)따라/강동욱<5>

 

▣남명 조식선생과 지리산

 

-경남일보 강동욱 기자가 신문에 1년간 연재하고, '칼을 찬 선비, 남명 조식'이라는 이름
으로 책을 낸 바있는 내용의 글을 옮겼으며, 제목은 옮긴이 임의로 정했습니다.-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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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록을 따라:악양 삼가식현-삼가 뇌룡사<5>


남명은 불일폭포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쌍계사로 내려오면서 선을 쫓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악을 따르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고 했다.

선비들의 산수 유람이 단순히 경치 구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착한
일하는 것이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다는 말은 선과 악이 구분이 잘 안되는 세상을 살아
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이 아닐 수 없다.

4월 23일 남명은 쌍계사 신응사 칠불암 불일폭포 등 두류산 유람을 마치고 귀가길에 올랐
다. 이날 악양현 현창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인 4월 24일 새벽에 흰죽 한그릇을 아침
대신 먹고 동쪽 고개를 올랐다. 삼가식현(三呵息峴)이라고 하는 고개인데, 이 고개를 오
르는 사람들은 몇 걸음 못가서 세 번이나 숨을 내쉰다 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고개는 현재 ‘삼하실재’로 불리는데 악양면과 적량면 삼하실 마을간을 연결한다. 지금
악양면 상신대리에서 오르는 길이 있으며 지금도 이 고개는 악양에서 적량으로 가는 지
름길로 이용되고 있었다.

기자는 악양면 사무소의 도움을 받아 남명이 올랐던 삼가식현을 답사했다. 하지만 고개
정상까지 오를 수가 없었다. 최근 내린 폭우로 길이 거의 망가져 버렸기 때문이다. 안내
직원의 말에 의하면 “비가 오기 전에는 자동차로 고개를 넘나들었다”고 했다.

남명은 삼가식현을 오르면서 지리산에서 여기까지 백리가 되는데도 산세가 여전히 꺾이
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때 이희안은 이정의 말을 타고 채찍질을 하여 맨 먼저 정상에
도착하여 돌에 걸터앉아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남명이 이희안에게 “자네는 자네가 탄 말 힘을 믿고서 나갈 줄만 알지 멈출 줄은 모르더
구나. 훗날 옳은 일 할 때에도 남들보다 먼저하면 좋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남명은 고개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남쪽으로는 남해 섬의 끝이고, 정 동쪽으로는
하동과 곤양 지방의 산이고, 또 동쪽으로 사천 와룡산이었는데 산과 강과 바다가 서로 이리
저리 뒤얽혀 있는 것은 마치 혈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일행은 곧 고개를 내려와 횡포역에 이르렀다. 횡포역은 현재 하동군 횡천면에 있었던 역인
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단지 횡천면 소재지에 ‘횡보마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횡포라는 지명이 요즘은 횡보로 바뀐 듯 싶다. 정오쯤 두리현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저녁에 하동 옥종면 정수리 삼장골에 있는 정수역에 이르렀다. 남명이 횡포역에서 두리현
을 지나 옥종 정수역으로 온 길은 현재도 하동에서 옥종으로 오는 길로 이용된다.

역관 앞에는 정씨의 정려문이 서 있었다. 정씨는 승지 조지서(趙之瑞)의 아내이며 문충공
정몽주의 현손녀이다.

현재 정려문 건너편에 지족당 조지서의 무덤도 있다. 남명은 정려문 앞에서 정씨의 절개를
기렸다

“승지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거센 바람이 부딪히는 곳은 벽을 사이에 두고 있어도 떨리는
법이다. 그는 연산군이 선왕의 업적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할 것을 알고 10여년을 물러나 있
었지만 그래도 화를 면할 수 없었다. 부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성을 쌓는 죄수가 되어 젖
먹이 두 아이를 끌어안고 살면서도 등에는 신주를 지고 다니면서도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절개와 의리를 둘 다 이룬 것이 지금까지도 이 정문에 남아
있다.”

조지서는 남명의 할머니의 동생인데, 성종 때 세자 시강원 보덕(輔德:세자를 가르치는
선생) 이었다. 당시의 세자는 나중에 폭군이 된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어릴 때부터 학문
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조지서는 천성이 곧아 강의할 때마다 책을 앞에 던지면서 “저하께
서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면 신은 마땅히 임금님께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여 연산군은 매우
곤욕스러워 하였다.

같은 동료인 허침(許琛)은 부드러운 말로 연산군을 깨우쳐주므로, 연산군이 벽에다 “조지
서는 큰 소인이고 허침은 큰 성인이다”라고 크게 써 붙였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
리고 지리산 속에 숨어살았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이 잡아와 목을 베고 그의 시체를 강물에 버렸고, 그 재산
을 모두 빼앗아 분풀이를 했다. 조지서가 잡혀가면서 그 부인에게 “이번 길은 돌아오지 못
할 것 같다. 신주를 어떻게 보전할고”하니, 부인 정씨가 “죽음으로서 보전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정씨는 남편이 죽자 두 아이를 가슴에 안고 신주를 등에 업고 아침 저녁으로 곡하고
제사지냈다. 2년 뒤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옛집을 다시 돌려 받고 남편도 신
원이 되고 벼슬도 추증되었다.

남명은 두류산 유람중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의 유적지를 둘러본 것을 대단히 가슴 뿌듯하
게 생각했다. 이 세사람을 높은 산과 큰 내에 비교하여 “십층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 끝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비치는 격” 이라고 했다.
또 “산속에는 바위에다 이름을 새겨둔 것이 많으나 세 군자의 이름은 결코 바위에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앞으로 그들의 이름은 반드시 길이 세상에 퍼져 전해질 것이니,
만고의 역사를 바위로 여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했다.

4월 25일 역관에서 아침을 먹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공량은 서울로, 이정은
사천으로 돌아가야 하며, 이희안은 초계로 돌아가야 하고, 남명은 삼가로, 김홍은 충청도
보은으로 가야했다.

10여일 동안 동고동락했던 벗들이라 헤어지기가 쉽지 않았다. 이정이 술잔에 술을 가득
붓고서는 “지금 이 순간의 이별에 어찌 할 말이 있겠는가?” 했다. 한잔 술에 모두들 할 말을
잊고서 이내 말을 타고 기약없는 이별을 했다.

남명은 현재 진주시 수곡면에 있는 칠송정에 이르러 높은 누각에 오른 뒤에 배를 타고 다회
탄을 건넜다. 이공량은 강을 따라서 내려갔다. 이정은 다시 한 마장을 더 가서 작별하였다.
남명은 이희안과 함께 쓸쓸히 돌아왔다.

남명은 삼가로 돌아와 지리산으로 떠나던 날 이희안과 묵었던 뇌룡사에서 잤다. 다음날
다시 이희안과도 이별을 했다.

이번 여행을 함께 한 여러 사람들이 남명이 두류산에 자주 다녀서 그 사정을 상세히 알 것
이라고 생각하여 남명에게 여행의 전말을 기록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명은 1558년 4월 10일부터 4월 26일 까지의 두류산 유람 일정을 글로써 남긴
것이다.

남명이 두류산 유람록을 쓴 것은 벗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다시는 벗들과 두류산 유람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을 진솔되게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류산 유람록 맨 끝에 서글픈 마음을 시로서 드러내고 있다.


누렁 소 갈비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주파했고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차례나 둥지 틀었네

몸을 보전하는 온갖 계책 모두 어긋났으니

이제는 방장산과의 맹세조차 어기게 되었구나

-끝-


경남일보/강동욱기자
kdo@g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