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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남명 유두류록(遊頭流錄)따라/강동욱<3>

▣유두류록을 따라 3.사천 쾌재정-하동 악양정


4월 15일 사천 쾌재정 앞 장암에서 배를 탄 남명 일행은 사천만과 곤양 앞바다를 지나 하동
포구를 향해 출발했다.

남명 일행은 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16일 새벽녘에 섬진 나루에 다다랐다. 섬진나루는 현
하동읍 화심리에 있었던 나루터라고 옛날 지도에 표시되어 있으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지도상으로 섬진나루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 섬진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하동 건너편 광양 쪽에 섬진마을이 있다. 아마 남명이 다다란 곳이 현 섬진마을 건
너편에 있었던 섬진나루가 아닌가 추측을 해볼 뿐이다.

남명 일행은 섬진강에서 찬란히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했다.

“찬란한 아침해가 막 떠오르니 만경창파가 붉게 물들고, 섬진강 양쪽 언덕의 푸른 산이 출
렁이는 물결속에 거꾸로 비쳤다. 퉁소를 불고 북을 치니 노랫소리와 나팔소리가 번갈아
일어났다. 저 멀리 서북쪽 10리쯤 되는 곳 구름 속에 높이 솟은 산이 바로 두류산의 바깥
쪽이다. 서로 들뜬 구경하면서 말하기를 방장산이 바다건너 삼한에 있다더니 벌써 멀지
않는 곳에 있구나 라고 하였다. ”남명이 동틀 무렵 섬진강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두류산을
보고 묘사한 글이다.

남명은 섬진나루에서 악양현을 지나 강가의 삽암을 보고 한 잔술을 마시며 고려시대 충신
녹사 한유한(韓惟漢)의 충절을 회고했다.

‘삽암’은 우리말로 ‘꽂힌바위’라고 부르는데, 이곳 주민들은 ‘섯바구(선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로부터 남해와 섬진강의 어선들이 정박을 했고 영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니
던 곳이다.

남명이 삽암을 찾아 한 잔 술을 마시며 회고한 한유한은 고려가 어지러워질 것을 미리알고
가족을 이끌고 이곳에 은거하며 산 인물이다.

당시 최충헌이 정사를 제멋대로 하면서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장차 ‘난이 일어날 것이다’
하고 처자를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고려 조정에서 그의 재주를 아껴 대비원 녹사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남명을 비롯한 수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으면 반드시 ‘녹사 한유한’의 절개를 떠올리곤
했는데, 지금은 아는 사람조차 드물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유한이 절개가 서려있는 삽암은 현재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외둔 삼거리에 있다. 근래
하동군에서 토지의 ‘최참판댁’을 지어 관광 상품화하고 있는데, 최참판댁에서 약 1.7킬로
미터 떨어진 곳이다. 하지만 길에서 삽암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근처 길가에 세워진 비석 2기만 보일 뿐인데, 그 비석 세워진 바위가 삽암이라는 것이다.

강가로 내려가 보니 바위에 ‘모한대(慕韓臺)’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악양의 부자 이세립
(李世立)이라는 사람이 한유한의 절개를 사모해 ‘모한대’라고 새겼다 한다.

하동 쌍계제다 김동곤씨는 “삽암 정수리에 세운 2기의 비석을 하루 빨리 옮기고 주변을
정리하여 조그마한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 하동의 학생들이 쌍계사나 경충사를 순례
하듯 삼압을 찾아 한유한의 절개를 기리고 배우는 역사 문화유산의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당장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 두었으면 좋으련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명 일행은 정오 무렵에 도탄에 배를 정박시켰다. 도탄이 어디인지 수소문 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화개면 사무소 근처에 ‘가탄’이라는 지명은 지금도 있다고 하는데,
도탄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향토사학가 김범수씨는 도탄을 화개장터 아래에 있는 섬진강 여울을 말한다고 했다.

남명은 도탄에 내려 “강가에는 산간마을이 아래 위로 연이어 있고 이리저리 난 밭이랑
이 열에 하나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예전에는 임금의 덕화가 이 깊은 산골짜기까
지 미쳐 백성과 물산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도탄에서 1리쯤 떨어진 곳에 일두 정여창 선생이 살던 집터가 있었다. 남명은 일두를
천령(지금의 함양)출신의 유종(儒宗)이라고 하면서,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나라
도학의 실마리를 열은 사람이라고 했다.

일두 정여창은 성균관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
와 모친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그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던 지리산 밑 하동
악양땅에 들어온 것이다.

일두는 악양에 들어와 섬진 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벗하며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일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남명은 도탄에서 1리쯤 떨어진 곳에 일두가 살던 집터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 없다.

다만 화개면 덕은리에 일두를 추모하는 ‘악양정(岳陽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이곳이 일
두가 살던 곳이라는 것을 짐작케 할 뿐이다. ‘덕은(德隱)’이란 지명이 덕이 있는 사람이
숨어 살았던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듯 했다.

악양정은 일두 정여창 선생이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건물은 15세기 말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1899년(광무 3년) 3월 고을 사림(士林)들의
발의에 의하여 하동군수 강영길(姜永吉)·박기창(朴基昌)의 지원과 후손들의 참여로 1901
년(광무 5년) 4월에 악양정을 중건하였다. 그 후 1920년에 3칸이던 건물을 4칸으로 덧붙여
지었고 1994년에 보수하였다.

일두는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함경도 종성(鍾城)
으로 유배되었다가, 6년 후인 연산군 10년(1504) 4월 1일 적소(謫所)에서 사망하였는데,
이 해 9월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했다.

남명은 유람중 한유한과 일두가 살던 곳을 찾아 “현명한 사람의 다행과 불행이 어찌 운명
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한유한의 은거 생활과 일두의 안타까운 죽음을 탄식했다.

현재 하동군 악양면에는 소설 토지속에 나오는 ‘최참판댁’을 복원하여 관광상품화 하려고
한다. 최참판댁에 대한 안내 표지판은 곳곳에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유학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일두 정여창이 살았던 악양정, 고려 충신
한유한이 살았던 삽암 등지에 대한 설명은 빈약하거나 아예없는 형편이다.

더욱이 하동이 속했던 강우 지역의 학맥을 창시한 남명이 이곳을 찾아 두 분을 기렸다는
사실은 그냥 간과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소설속 무대를 관광상품화 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이 지역에 연고를 가지고 백세의
스승이 될만한 인물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섬진강은 이 분들의 충절을 알고 있는 듯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

경남일보/강동욱기자
kdo@g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