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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남명 유두류록(遊頭流錄)따라/강동욱<4>

▣유두류록을 따라-쌍계사 일정

남명의 두류산 유람은 단순히 산수의 경치만을 보고 즐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유람을
통해 역사 유적지 또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을 찾아 당시를 회고해 보고 자기
반성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남명이 악양에 들러 어지러운 시대를 피해 은둔한 고려의 충신 한유한과 연산군에게 억
울한 죽임을 당한 일두 정여창 등의 유적을 찾은것도 이 때문이었다.

4월 16일 정오 도탄에 배를 정박시키고 정여창의 옛 집터를 둘러본 후 남명 일행은 쌍계
사에 도착했다.

쌍계 석문에 도착한 남명은 “검푸른 빛깔의 바위가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서 한 길 남짓
열려 있는데, 그 옛날 학사 최치원이 오른쪽에 쌍계(雙磎) 왼쪽에는 석문(石門)이라는
글자를 손수 써 놓았다. 글자의 획을 사슴 정강이만큼 크고 깊게 새겨 놓았다. 지금까지
천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앞으로 몇 천년이나 더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하면서 최치
원의 필치에 감탄했다.

지금도 두 바위는 쌍계사 일주문 올라가기 전에 500년전 남명이 보았던 것과 같은 모습
으로 쌍계사를 찾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다만 지금은 온갖 상점들이 들어서 옛날과
같은 정취를 느끼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안타깝다.

곧 쌍계사에 올라 주위를 둘러본 남명은 “서쪽으로 벼랑을 무너뜨리고 돌을 굴리며 저
백리 밖에서 흘러오는 시내는 신응사가 있는 의신동의 물줄기이고, 동쪽으로 구름 속에
서 새어나와 산을 뚫고 까마득히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오는 시내는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의 물줄기이다. 절이 두 시내 사이에 있기 때문에 쌍계라고 부른 것이다.”
라고 하며 쌍계사의 경치를 말했다.


진감선사 혜소가 육조의 영당을 짓고 절을 세울 때는 옥천사였다가 정강왕때 쌍계사라
고쳐 불렀다.

쌍계사에 들어온 남명은 “절문 밖 수십보 지점에 높이가 10자나 되는 비석이 귀부 위에
우뚝 서있는데, 최지원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라고 하며 진감선사대공탑비를
일컬었는데, 지금도 이 비석은 그대로 있다. 887년(진성여왕 원년)에 건립되었으니, 남
명이 이 비석을 보았을 당시도 700년이 지난 때였다. 지금은 비신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뚝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의 승려 혜통, 신욱 등이 차와 과일을 내오고 산나물을 곁들인 음식도 대접하면서
반갑게 맞이했다. 밤에 남명은 갑자기 구토와 설사를 만나 저녁을 먹지 못하고 누워 지
냈는데, 이희안이 간호하면서 곁에서 같이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에 김홍이 와서 병이 좀 어떠냐고 문안하였다. 이때 전라도 어란달도(魚瀾
撻島)에 왜놈의 배가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곧장 산행을 중단하고 아침 밥
을 재촉해 먹고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한낮 쯤 되어 호남의 역리가 종사관의 편
지를 갖고 왔는데, 아침에 보고한 왜선은 조운선(漕運船)이라는 것이다.

비가 하루종일 그치지 않고 많이 내렸고 검은 구름이 사방에 자욱하여 인간 세상과는
몇겹의 구름과 물이 가로 막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날 저녁 자형 이공량과 이정도
배탈이 나는 등 몸이 아팠다.

18일 날이 밝자 불일암(佛日菴)에 오르고 불일폭포도 구경하고자 했으나 어제 내린 비로
길이 젖어 갈 수가 없었고, 신응사로 가려고 해도 시냇물이 불어 건너 갈 수가 없어 쌍계
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호남순변사 남치근(南致勤)이 술과 음식을 보내왔다. 그는 을묘왜변때 왜구를 크게 물리
친 공이 있었고, 나중에 임꺽정을 재령에서 잡아 목벤 사람이다. 남명의 자형 이공량의
아들 이준민이 남치근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고 있었으므로, 자기 부하의 아버지가 전
라도 접경으로 산행을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음식을 보낸 것이다.

19일 아침밥을 재촉하여 일찍 먹고 청학동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 청학동은 도교의 이상
향으로서 바로 무릉도원을 말한다. 그곳에 푸른 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청학동이라고 한
다.

쌍계사 뒤편으로 2km정도 오르면 지리산 비경중의 하나인 불일폭포가 있고 그 곁에 불일
암(佛日庵)이 있었던 옛터가 있는데, 남명은 이곳을 청학동이라고 생각했다.

북쪽으로 다람쥐 바위에 다달아 나무를 부여잡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다시 걸었다.
이때 우석은 장고를 치고, 천수는 피리를 불면서 두 기생을 데리고 선두가 되어 올라갔다.
남명과 여러 친구들은 새끼에 고기 엮은 듯 한 줄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해서 올라갔고,
물품을 책임진 강국년과 음식을 지고오는 종들은 뒤에 따라왔다.

길가의 큰 바위에다 사람들이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을 본 남명은 “대장부의 이름은 하늘의
밝은 해처럼 떳떳해야 한다. 훌륭하게 일생을 살았으면 여러 사람들의 입으로 입으로 전
해질 것인데, 째째하게 날 다람쥐나 삵괭이가 사는 수풀 속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새
그림자를 보고서 후세 사람들이 무슨 새인지 알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 이라
고 하면서 개탄을 했다.

산이 험준해 열 걸음 걷고 앉아서 쉬고 또 열 걸음 걷고 앉아서 쉬고 또 주변의 산 경치가
사람의 넋을 빼앗아갈 정도로 좋아서 열 걸음 옮길 때 아홉번은 둘러보았다. 이렇게 시엄
시엄 걸어 점심 때 가까이 되어 불일암에 당도하여 밥을 먹었다.

다시 불일암 뒤쪽의 봉우리에 올라갔다가 지장암에 들렀으니, 목단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푸르런 산속에 붉은 빛이 유난이 돋보였다. 지장암에서 하산을 하는데 잠깐 사이에 쌍계
사에 도착하였다.

올라갈 때에는 한 발짝 한 발짝 그렇게도 힘들더니 내려올 때에는 발을 들기만 해도 절로
몸이 내려갔다. 남명은 발자국을 옮기면서 한 이치를 깨달았다.

착한 일을 하기는 산을 올라가는 것처럼 힘들고 악한 일을 하기는 산을 내려오는 것처럼
쉽다는 것을.

쌍계사에서 배탈이 나서 기다리던 이공량과 이정이 등산로 초입에 있는 팔영루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에 이공량 이정 등과 함께 절 뒤채 동쪽에 있는 방장실에서 잤다.

20일 아침을 먹고 신응사를 찾아갔다. 신응사는 쌍계사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신응사 주지 옥륜과 중 윤의가 와서 맞이하였다. 중들이 술과 과일을 준비해 대접하였다.
남명은 바위 위에서 춤을 추며 실컷 즐기다가 시 한수를 지었다.


시냇물 절벽에 부딪쳐 흐르고,

산에는 봄빛 짙구나.

겸손과 자랑 심하지 않아.

그대를 바라보고 앉았노라.


남명이 두류산을 유람하면서 찾아 묵었던 신응사는 지금 없어졌다.

단지 남명의 ‘두류산 유람록’ 휴정(休靜)의 ‘두류산 신흥사 능파각기(凌波閣記)’등의 글을
통해 그 모습을 상상해 볼 수있을 뿐이다.

남명은 비 때문에 신응사에서 움직일 수 가 없었다. 22일에는 퇴계와 사단칠정에 대해서
편지로 열띤 토론을 벌였던 호남 장성의 선비 기대승 일행 11명이 정상에 올랐다가 비에
길이 막혀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신응사 주지는 자기 고을원에게 조세나 부역을 가볍게 해 주도록 남명에게 편지 한 장 써
주기를 간절히 부탁했으므로 남명은 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선선히 써 주었다.

23일 절에서 대접하는 아침을 먹고 산을 넘었다. 지리산 골짝기에 수많은 절이 있지만
남명은 신응사의 경치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시내를 따라 7리를 오니 쌍계사 중들이 전송
하기 위해 물을 건너와 기다리고 있었으며, 쌍계사 입구에서 또 6, 7리를 내려오니 마을
사람들이 닭을 삶고 소주를 가지고 와서 남명을 전송했다. 또 시내가 있었는데 악양의
아전들이 대를 엮어 임시로 다리를 놓아 주었다. 시내를 건너 10리를 내려오니 청룡이란
사람이 술과 고기를 갖고와 전송했다. 청룡의 아내는 옛날 서울에 살았기에 요리 솜씨가
대단히 좋아 음식이 매우 맛있었다.

거기서 배를 타고 배에서 점심을 먹고 악양현으로 내려가 악양현의 조창(강가에 배로 싣
고갈 세미를 보관하는 창고) 곁의 숙소에서 잤다.

경남일/강동욱기자kdo@g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