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先人들의 智異山

남명 유두류록(遊頭流錄)따라/강동욱<1>

▣[남명 조식 선생과 지리산]

-경남일보 강동욱 기자가 신문에 1년간 연재하고, '칼을 찬 선비, 남명 조식'이라는 이름
으로 책을 낸 바있는 내용의 글을 옮겼고, 이 글 제목은 저가 정했습니다.-두류-

------------------------------------------------------------------------------------


▣두류산 유람록을 따라 <1>삼가-진주까지

남명은 1558년 4월 11일부터 25일까지 두류산을 유람했다. 일정은 삼가 계부당-진주 마현
-사천-곤양 앞바다-하동포구-쌍계사 - 신응사-악양-정수역-뇌룡사였다. 이때 진주목사
김홍, 고령현감을 지낸 이희안, 자형 이공량, 청주목사를 지낸 이정 등 이 지역 선비 40여
명이 대거 동행했다.

남명은 이때 두류산 유람을 하고 나서 기행문인‘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다. 남명의
‘유두류록’은 단순히 산수의 경치를 보고 감탄하기 보다는, 선비의 산수 유람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남명의 유두류록은 ‘남명의 정신세계’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기자는 ‘유두류록’여정을 따라 옛 선비들이 보고 느꼈던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500년전 남명이 갔던 그 길을 따라 나섰다.〈편집자주〉


1558년 초여름 남명은 진주 목사 김홍(金泓), 이공량(李公亮), 고령 현감을 지낸 이희안(李
希顔)과 청주 목사를 지낸 이정(李楨)과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였다.

남명과 동행했던 진주목사 김홍(1496-?)은 경주 김씨로 충북 보은 사람이다. 남명의 벗 대
곡 성운의 처가 사람이기도 하다. 이공량(1500-1565)은 전의 이씨로 진주 사람이며, 남명의
자형이기도 하다. 이희안(1504-1559)은 합천 이씨로 초계 사람이다. 남명과 같이 유일로 천
거되어 고령현감을 지냈다. 이정(1512-1571)은 사천 이씨로사천 사람이며, 만년에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10일 이우옹이 초계에서 뇌룡사(雷龍舍)로 와서 함께 묵었다. 뇌룡사는 현재 합천군 삼가
면 토동에 있었던 남명이 살던 집이다. 남명은 48세때 김해에서 삼가로 돌아와 뇌룡사를
지어 사방에서 배우러온 제자들을 가르쳤다. 뇌룡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복원되지 못
하다, 그 뒤 1678년에 합천군 봉산면 계산에 있었던 용암서원의 부속 건물인 뇌룡정으로
재건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용암서원이 없어지자 뇌룡정도 같이 없어졌다.
1883년 허유, 정재규 등 삼가의 유림들이 옛날 뇌룡사가 있었던 삼가 토동에 뇌룡정을 중
건하여 현재까지 이어져온다.

이우옹은 이희안을 가르킨다. 이희안의 자(字)가 우옹(愚翁)이므로 이우옹이라고 한 것이
다. 이희안은 당시 초계에 사고 있었다. 현재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에 후손들이 살고 있으
며, 그를 기리는 황강정(黃江亭)이 있다.

11일 남명과 이희안은 계부당(鷄伏堂)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여정에 올랐다. 계부당은 뇌
룡사 근처에 있었던 남명이 살던 또 다른 집이다.

남명이 모친상을 마친 후 옛집에 있다가 얼마 후 그 부근에 따로 집을 지어 계부당이라 하
고, 마을의 시냇가에다 초가를 지어 뇌룡사라 이름을 하였다. 계부는 “닭이 알을 품어서
병아리가 부화되어 나오듯 차분히 침잠하여 학문과 인격을 함양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뇌룡사는 현재 뇌룡정으로 복원하여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계부당은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옛 문헌에 의하면 뇌룡사 근처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남명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계부당의 위치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껏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 마을에 사는 노인들이 계부당의 위치를 현재 뇌룡정 서쪽 300미
터 지점쯤 마을 가운데 있었다고 증언을 하고 있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이봉영씨(63·삼
가면 토동)는 “계부당 위치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논란이 있다는 것은 정확한 위
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 계부당 터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터가 뇌룡정
소유로 되어 있어, 그것을 근거로 이야기 하는 것뿐입니다”라며 계부당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계부당에서 아침을 먹고 나오는데, 남명의 아우 조환(曺桓)이 따라 나섰다.조환은 충순
위를 지냈으며, 후에 남명의 명령으로 조상 제사를 모시게 된다. 이때 승려로 있다가 환
속한 원우석(元右釋)이라는 유생도 따라왔다. 원우석은 총명하고 노래를 잘 부르기 때문
에 함께 동행한 것이다.

남명, 이희안 조환, 원우석 네사람이 문을 나서 겨우 수십보쯤 갔을때, 한 어린애가 앞을
가로 막으며 말하기를 “저는 도망친 종들을 쫓아왔습니다. 종들이 이 길 아래쪽에 있는데
아직 못잡았습니다”라고 했다. 이때 이희안이 재빨리 관노비 네댓사람을 시켜 도망친 종
들을 잡아왔다. 이때 남명은 “우리는 우연히 손을 쓴 것인데 원망하는 사람도 있고 고맙게
여기는 사람도 있게 되었는데, 이 무슨 조화속이란 말인가”라고 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종들이 도망간 것을 보고 이를 해결해 주었는데, 주인측은 고맙게 여
기고, 잡힌 종들은 원망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말이다. 그 당시 양반인 남명이 잡힌
종들의 입장을 생각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남명은 이희안의 일 처리 능력을 칭찬하며 길을 떠나 저물녘에 진주경내에 도착했다.

현재 진주서 남명이 살았던 토동까지 30여킬로미터 남짓 되는 거리로 자동차로 30분정도면
갈 수 있다. 500년전 남명 일행은 중간에 도망친 종을 잡아주는데 시간을 지체했지만, 아침
에 출발하여 저물녘에 도착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남명은 진주 목사 김홍과 사천에서 배를 타고 떠나 섬진강을 거슬러 쌍계로
들어가기로 여정을 약속했었다.

진주 경내로 들어온 남명 일행은 마현(馬峴)을 넘어오다가 뜻하지 않게 종관인 이준민(李
俊民)을 만났다. 마현은 현재 진주 옥봉동에 있는 말티고개를 가르킨다. 지금 진주시내와
도동을 잇는 중요한 도로인 말티고개는 많은 차들이 질주하고 있다. 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진주서 합천가는 버스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남명이 이 고개를 넘어오다 이준민을
만난 것이다. 이준민은 남명의 자형 이공량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남명의 생질이 된다.
후에 좌참찬의 벼슬을 지냈으며, 율곡 이이와도 친했다. 이준민은 호남에서 아버지 이공량
을 뵈러 오는 길이었다.

남명은 진주서 목사인 김홍의 안내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김홍의 벼슬이 갈렸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 금산에 있는 자형 이공량의 집으로 향해 하루를 묵기로 했다. 당시 남명이 묵었
던 자형 이공량의 집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다만 현재 폐교된 가방초등학교 인근에 있었던
것 같다.

12일 큰비가 내렸다. 진주목사였던 김홍이 맛난 음식을 보내왔다. 이튿날인 13일에는 김홍
이 직접 찾아와서 소를 잡고 풍악을 베풀었다. 이희안 김홍 이준민 등이 경쟁이라도 하듯
술을 실컷 마신뒤 잔치를 마쳤다.

남명은 3박 4일동안 진주 금산에 있었던 자형집에서 머물었다. 일찍이 기자는 남명이 머물
렀던 자형집을 찾아 갔으나 흔적을 찾을 길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남명이 진주와 무슨 관
계가 있느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계속)

경남일/강동욱기자kdo@g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