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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보니

[남명 조식 선생과 지리산]

-경남일보 강동욱 기자가 신문에 1년간 연재하고, '칼을 찬 선비, 남명 조식'이라는 이름
으로 책을 낸 바있는 내용의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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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보니

무릉닮은 산하 시조 읊으며 유유자적-두류산 양단수

1561년 남명 선생은 61세의 나이로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 보이는 덕산 사륜동(絲綸洞)으로
들어왔다. 현재 산천재가 있는 곳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실골’이라고 부르는 사리(絲里)이다.

고려가 망하자 녹사(錄事) 벼슬을 하던 한유한이라는 사람이 지조를 지키고자 이곳에 피신
해 살았다. 조선 임금이 한유한을 부르자 그 길로 이곳을 떠나 하동 악양방면으로 가 숨어
살았는데, 그가 살던 방에 “한 조각 임금명령 골짜기로 들어오니(一片絲綸來入洞)/비로소
이름 인간 세상에 떨어진걸 알겠네(始知名字落人間)” 라는 시구가 적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이 마을 이름이 사륜동이 되었다고 하며. ‘사륜’은 임금의 부름을 뜻한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이 덕천강인데, 양단수(兩端水)로 더 알려져 있다. 남명선생이 지었
다고 전하는 ‘두류산가(頭流山歌)’ 때문이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한때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이 시조는 남명이 덕산에 들어와 지은 것으로 전한다.
이 시조의 초장 '두류산 양단수를 녜 듣고 이제 보니'라는 구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산천재
앞을 흐르는 강물을 양단수라고 부른다.

남명의 ‘두류산가’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여러가지 말들을 많이 한다. 우선 남명이 이 시조
를 짓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 시조가 남명선생 문집에 실려있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시조는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것을 영정조(英正祖)시대
에 와서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김천택 김수장 등이 시조집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만든 시조집이 “청구영언(靑丘永言)” “해동가요(海東歌謠)”등이며 ‘두류산가’도 여기에 실
렸다.

남명이 세상을 떠난 후 약 200년이 흐른 후 비로소 문자로 기록된 것이다. 이를 두고 일부
국문학자들은 ‘두류산가’가 실린 여러 시조집들을 보면 단 2곳만이 조식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어, 남명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김일근 전 건국대 교수는 “두류
산가는 단연코 남명선생의 작품이다”라는 주장을 하며, 단 2곳만이 남명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청구영언 등 20종의 책에 실려 있다고 했다. 작가가 남명선생이 확실한 만
큼 다시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 시조 초장의 ‘두류산 양단수를 녜듣고 이제보니’에서 ‘두류산 양단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전해온다. 우선 ‘양단수’의 표기에 관한 문제이다.

양단수란 중산리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과 대원사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각기 덕산(德山)
에서 만난다 하여 이르는 말이다. 현재 덕산 장터에서 덕천서원 가는 중간지점 쯤에 강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점에 ‘산청두류청년회’가 세운‘남명선생시비’가 있다.

그런데 덕산에 사는 사람들은 남명 선생이 두류산가를 지었을 당시에는 ‘양단수’가 아니라
‘양당수’였는데, 시조집에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작품중의 ‘양단수’는 보통명사가 아니
고, 현재 덕천서원앞 산천재 근처, ‘양당’마을 앞을 흘러가는 여울물을 말하는 고유명사(지명)
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지역 마을 이름은 양당(兩塘)이며 통칭 ‘양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두류산가’는 남명이 1561년(61세) 봄 두류산아래 덕산동(현 산청군 시천면 사리)을
흐르는 양당수위에 산천재를 짓고 살면서 지은 시조 작품이 틀림 없으며, ‘양단수’도 ‘양당
수’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그 어떤 시조집에도 ‘양당수’라고 기록한 곳은 없다. 모두 두류산 ‘양단수’로
되어 있다.

남명이 두류산 밑으로 살곳을 정하고 나서, 따뜻한 봄날 제자들과 복숭화 꽃이 만발한 덕천
강가를 거닐면서 문득 ‘두류산가’를 읊지 않았나 추측을 해 볼 뿐이다.

덕산에 사는 사람들은 ‘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보니’라고 시조를 읊조리며 덕천강가를
거닐었을 남명선생을 기리며 시비를 세워 놓았는데도, 이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아는지 모
르는지 속력을 더하며 지리산으로 향하고 있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이라면 가던 길 잠시 멈
추고 남명선생이 거닐었던 그 길을 거닐며 시조 한수 읊조리는 여유를 가질만 하지 않은가.


경남일/강동욱기자kdo@gnnews.co.kr



♣남명 이야기-덕천강 꺽지머리 이빨자국


양단수가 있는 덕천강에는 꺽지(일명 꺽더구)가 유명하다. 덕천강 꺽지와 남명선생은 특별
한 인연(?)이 있다.

어느날 제자 도구 이제신이 남명 선생을 초대하여 덕천강에서 많이 나는 꺽지회를 특별히
준비하여 대접하려고 했다. 남명과 인근의 제자들이 함께 참석하여 음식을 들려는 순간,
그때 마침 서울에서 들려온 국상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있었다.

옛날에는 임금의 상을 당해서는 음악을 듣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근신하며 지내는
것이 예법이었다. 마침 남명은 조그마한 꺽지 한 마리를 집어 초장에 찍어 막 깨물려던 순
간이었다. 국상 소식을 듣자 마자 살짝 깨물었던 고기를 뱉아 강에 던져 버렸다. 그 꺽지는
마침 뒤에 살아났는데 머리에는 이빨 자국이 박혀있었다. 이 고기가 알을 낳아 덕천강에 꺽
지가 많이 번식하게 되어 오늘날까지도 덕천강 꺽지는 모두 머리에 이빨 자국이 있다는 이
야기가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