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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탐방]

[하동]쌍계사와 용추 쌀바위

하동 쌍계사와 용추 쌀바위

임용일 기자 / yiim@dominilbo.com
쌍계사

화개골 사십리 쉬엄쉬엄 뒤쫓아온 봄이 앞지른다

지리산에 맨 처음 봄소식을 전해주는 하동. 평화롭고 한가한 강변마을의 매화꽃이 하동포구 80리 물길을 따라 오르는 나그네의 발길을 화사하게 반긴다.

우리네 옛사람들의 애환과 고락을 고스란히 담고 흐르는 섬진강 강변도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하얀 백사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백사장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300년 노송이 숲을 이뤄 이를 백사청송(白沙靑松)이라 부른다.

하동읍에서 쪽빛 섬진강 풍광에 취해 11㎞ 가량 오르면 지리산의 거대한 능선이 남으로 가지를 친 남부능선의 대미에 해당하는 성제봉 아래 드넓은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유명한 악양 평사리이다.

이곳의 지명은 중국의 악양과 닮은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벌판을 가로질러 형제봉 초입에 들어서면 고소산성을 오르는 왼쪽 언덕빼기에 웅장한 최참판댁이 모습을 드러낸다. 3000여평의 부지에 한옥 14동 및 조선후기 우리 민족의 생활 모습을 담은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2001년부터 전국 문인들의 문학축제인 토지 문학제가 매년 열린다.

지금은 모방송국에서 드라마 촬영을 하느라 분주하다. 최참판댁에서 내려다 본 악양 벌판은 온통 초록빛이다. 멀리 보이는 평사리 공원과 섬진강의 풍경이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최참판댁을 나와 형제봉 중턱 해발 300m 고지에는 사적 제151호로 지정된 고소성이 묵묵히 천년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이 성(城)의 유래는 600년대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원군인 위병의 섬진강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구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험한 산줄기를 등지고 서남으로 섬진강과 동정호를 눈 아래에 둔 천연의 요충지로 남해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토지의 주인공 길상과 서희의 이야기를 뒤로 한 채 강변을 따라 4㎞ 남짓을 더 오르면 지난해 개통된 남도대교가 위용을 자랑한다. 남도대교를 지나면 화계동천 초입의 화개장터가 길손을 반기지만 옛 모습은 간데 없고 관광지로 복원됐다.

여기서부터 신라 천년고찰 쌍계사 입구까지 십리 벚꽃길이 펼쳐진다. 화개장터에서 의신마을까지 약 16㎞의 화개계곡은 수많은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펼쳐놓고 있다. 야생차 나무의 초록 빛깔이 바위 틈 사이에서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쌍계교를 지난 쌍계사 초입 매표소를 지나면서부터 아름드리 굴참나무와 삼나무가 하늘 가리는 통에 어둡기까지 하다. 500여m 오르면 왼편으로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쌍계별장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와 잠시 들여다보면 한옥 3칸으로 옛날 도원암이라는 암자였다는 주인의 이야기와 함께 마시는 차(茶) 맛이 일품이다.

쌍계사는 진감선사가 신라 문성왕 2년(840년)에 초창한 이래 임진왜란때 불에 탔던 것을 조선 인조 19년 벽암스님, 숙종 21년 백암스님의 중수를 거쳐 영조 11년 법훈스님의 중수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보물 제500호로 지정됐다.

대웅전에는 세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며 절 마당에는 국보 제47호로 지정된 ‘진감국사 대공탑비’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균열이 심해 철재로 보강돼 있다. 이 탑비는 신라 고승 진감선사 혜소의 높은 법력을 추앙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신라의 대문장가인 고운 최치원 선생이 비문을 짓고 썼다.

악양 평사리 최참판댁, 신라 천년고찰 쌍계사

불일폭포 웅장함 아래엔 세속 욕심 꾸짖는 ‘쌀바위’


절 경내를 한바퀴 둘러본 후 등산로를 따라 3㎞ 가량 오르면 지리산 10경(景)의 하나인 불일폭포가 나온다. 불일폭포로 향하는 길을 따라 400m 가량 오르면 국사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가 나온다.

국사암은 삼법화상이 신라 성덕왕 21년(722년)에 건립하여 수도하던 곳으로 삼법화상이 입적한 후 110년만에 진감선사가 중건했다. 이로 인해 이 암자의 이름이 국사암이라고 지어졌다고 한다. 국사암 입구에는 진감선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거목 사천왕수가 눈길을 끈다.

불일폭포 가는 길에 커다란 반석의 바위가 있는 데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학을 부르며 놀던 곳이라 하여 환학대라 부른다. 숲속을 지난 불일 휴게소에서 약 200m 가량 비탈길을 내려가면 연중 물이 마르지 않는 불일폭포의 웅장함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폭포 밑에는 용추못과 학못이 깊은 자연의 신비를 안겨준다.

이곳에는 ‘용추 쌀 바위’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아득한 옛날 불일암이라는 암자에서 한 스님이 열심히 수도를 하고 있는 데 어느날 천지가 개벽되는 것 같은 변화가 닥쳐 폭포가 생겨나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언덕에 큰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호기심에 스님은 뚫어진 구멍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순간 스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구멍에서 쌀이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스님은 부처님의 자비로 생각하고 부지런히 쌀을 암자로 옮겼다.

다음날도 그 구멍에선 계속해서 쌀이 흘러 나오고 스님은 이를 화개장에 내다 팔아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했다. 재산이 늘어나는 재미에 푹 빠진 스님은 염불을 외는 것도 귀찮게 생각했다. 하루는 장사하는 아주머니가 이 스님에게 “매일 이렇게 쌀을 조금씩 가져오지 말고 며칠 모아 놓았다가 한꺼번에 가져오면 수고도 덜고 목돈도 가질 수 있다”고 말하자 귀가 솔깃해진 스님은 구멍을 더 크게 판다면 쌀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지땀을 흘리며 닷새동안 구멍을 뚫게 되었다. 구멍은 처음보다 무려 3배 이상 크게 되었다.

스님은 내일부터 더 많은 쌀이 나올 것이라고 믿고 밤잠을 설쳤다. 해가 뜨기가 무섭게 부푼 마음으로 달려간 스님은 구멍 속을 들여다 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구멍 속에는 단 한톨의 쌀도 없었다. 스님은 누군가 밤새 훔쳐간 것으로 알고 뜬눈으로 구멍을 지켰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쌀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뒷날 사람들은 스님의 욕심이 때문에 천벌을 받아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쌀이 나온 바위를 용추바위라 부른다. 쌀 바위 이야기를 뒤로한 채 하산한 기자는 화개골 찻집에 들러 지리산 정기를 머금은 차(茶) 한잔을 마시며 여행의 노곤함을 달랬다.

쌍계사에서 의신마을 방면으로 4㎞ 가량 더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곳곳에 야생차 밭이 눈에 들어오고 신흥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5㎞ 더 가면 아자방(亞字房)으로 유명한 칠불사를 오른쪽으로 5.5㎞ 가면 화개골의 마지막인 의신마을이 나온다. 의신마을에는 지금 고로쇠물이 한창이다.

의신마을의 특산물인 흑염소와 함께 고로쇠물을 맛보는 것으로 하동포구 팔십리와 화개골 사십리의 긴 여정이 모두 끝난다. 언제 찾아도 좋은 섬진강과 화개골, 자연이 가져다 준 소중한 선물이기에 가슴 가득 자연을 안고 돌아서는 발길이 매번 서운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경남도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