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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기록]

[산행기]웅석봉, 달뜨기능선을 찾아.

by 지리산 마실 2004. 3. 16.

기록적인 100년만의 3월 폭설이라는 뉴스와 많은 차량들이 24시간 이상 고속도로에 갇혀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우리는 주저없이 고속도로로 차를 얹었다. 오후즈음이면 찻길이 열리겠지하는
막연한 기대감과 그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히 해결할만한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하지만 천안을 들어서면서부터 더 이상 진행을 하지못한 채 발이 묶이자 국민소득 2만불 시대
를 여는 나라, OECD 가입국가, 인터넷강국 등등하며 그럴듯한 걷치레에 최면당한 채, 아직도
기본에 턱없이 모자라는 수준에 서있는 현실을 보고 실망보다는 너무나 큰 아쉬움을 느끼게 된
다. 그런 정도의 도로상황이었으면 차량의 진입을 막았어야하는 게 옳았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멀고 먼 길이었다. 시간이 지체되면서 길을 바꾸어 겨우 빠져 나온 국도는 눈길이 아닌
빙판길로 바뀌어버려 이리저리 미끌어지는 차체에 정신이 하나도 없고, 긴장감 때문에 바싹 마
른 입술은 급기야 말라 터져버려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을 안 때는 천신만고끝에 대전을 벗어나
인삼랜드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동행한 산유화 아우가 알려줘서였다.

 

보름을 갓넘긴 만월이 따스함이 비치는 엷은 노랑의 색을 섞어 산자락에 조용히 내려 앉아있는
넓은 대원사주차장에 들어 선 시각은 새벽 02시가 조금 지났고, 조금 전까지도 우리의 운행확
인을 하던 몇몇도 그 사이 잠들어버렸다. 오후 2시에 출발하여 약 12시간이 지난 시간에 도착
을 하였지만 이렇게라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오히려 가벼운 안도감을 느낀다.

 

갑자기 숨이 막히며 기침이 터져나오려한다. 아직도 신열이 가시지않은 몸은 주변에 널려져있
는 소줏잔을 외면하고 잠자리를 찾게 만든다. 달빛에 젖은 주차장 마당이 잠시만이라도 나와보
라는 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지만, 이미 허허로운 내 마음은 애써 눈을 감아야겠다며 외면해
버린다.

 

지지난해의 이 맘때였을까...

 

'바람은 머물면 죽는다', 즉 움직이지 않으면 소멸해버린다는 명제에 '역마살은 바람과 같은
것이고, 역마살 낀 자는 움직이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라며 길을 나서는 자들의 입장을
소설 '만월까지'에서 조용하고도 설득력있게 이야기하던 유영국선생의 글에 감동받고, 깊은
동지애를 느끼던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나는 그 글귀에 경도되어 길 떠나는 나의 모든 행위
에 대하여 정당성을 스스로 부여하였고, 또 모든 변명의 구실을 만들었던 것이다.

아! 그 때, 나는 얼마나 희열감에 젖어있었던가...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 위해서는 길을 걸어야만한다'라고 외치던 허만하선생의 詩를 만났을
때 느꼈던 그 것과도 같은 감동이었다. 그런 내가 지리자락에 들어서서도 아무런 느낌없이 잠
자리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내심 나 스스로도 놀라웠다.

 

시절이 주는 고단함과 시간의 흐름에 부대끼는 중년의 나약함이라고나할까.... 
하지만 나는 그런 나자신이 결코 부끄럽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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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찾은 지리자락은 또 하나의 산줄기이자 지리자락과 연결이 되는 지리산 동쪽에 병풍처
럼 길게 드리워져있는 웅석봉과 달뜨기능선이다. 지리산 동부능선과 웅석봉의 산자락을 이어
주는 고갯길이 바로 덕산과 산청읍 인근의 지리자락 마을인 향앙리와 수철리를 국가지원 지방
도가 지나가는 정점에 있는 밤머리재이다.        

 

다행히 이 곳의 길에는 눈이 없다. 출발하기전 눈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와 다소 긴장했고,
만약 눈이 쌓여 고개가지 접근이 힘들다면 당초 예정이던 밤머리재-웅석봉-이방산으로 진행되
는 코스를 차량이동이 언제나 가능한 덕교마을에서 시작하여 이방산-감투봉-딱바실골로 하산하

는 역코스를 염두에 두고는 있었다.

 

도토리봉 아래, 밤머리재의 바람도 소문난 바람이다. 1차로 차량이동한 선발팀은 그 바람을
견디지못하고 먼저 진행하겠노라고 연락을 취해왔다. 북사면에서 세차게 불어제끼는 바람을
맞으며 도로의 동쪽 산자락으로 난 계단으로 올라서며 웅석봉으로 향한다.

 

'달뜨기능선....'

 

이태씨의 넌픽션 '남부군'에서 이 곳 산자락으로 들어서던 모습이 너무도 사실적으로 묘사되
어있고, 또 영화속에서는 거창쪽을 건너 온 빨치산들이 남자와 여자 두 그룹으로 나누어 모두
벌거벗고 계곡에 들어 가 목욕을 하며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던 모습이 인상적인데,
아마 그 때 빨치산 役중에 배우 '이혜영'이 누구 역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거친 여자 빨치산으
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 글은 빨치산들이 웅석봉을 들어서는 모습을 이태씨가 '남부군'에서 묘사한 내용의 일부
이다.

 

'앞서 가던 문춘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한 것이요!" 눈이 시원하도록 검푸른
녹음에 뒤덮인 거산이 바로 강건너 저편에 있었다. -中略-

 

1천4백명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시퍼른 연봉을 응시하며 "야아!"하는 탄성이 조용히 일었다.

여순(반란사건)이래의 구대원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듯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달뜨기....

 

이현상이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던 빨치산의 메카 대 지리산에 우리는 마침
내 당도한 것이다. 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에 젖으며 말없이 서 있는 녹음의 산덩이를 넋
을 잃고 바라보았다.

 

---지리산아, 이제 너는 내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 주려느냐..........(이하 略)'

 

이따금씩 능선에 노출되며 오름길 왼쪽의 북사면의 공간이 트일 때면 그 바람은 묵혀 둔 한
겨울의 추위를 고스란히 머금은 채 우리를 맞이하며 3월의 산길을 걷는 우리에게 잠시 계절
시계를 거꾸로 돌리라한다. 마치 빨치산들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긴장하여 너희들의 산길을
걸어라고 채근이나하는 듯이...

 

3월의 지리자락에서 우리 산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호사를 누리게 된다. 3월 新雪, 積雪산행
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눈이 쌓여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채 나무가지위에 올라 서 있는 형상들에는 가끔은 담비가

긴장된 모습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기도하고, 어떤 곳에는 곰이 나무를 타는 모습도

있다. 무심한 거북이 등을 돌리고 제갈길을 가기있기도하고...

 

이 눈들의 형상이 그대로 수목에 스며들어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이네들에게 귀한 힘을 불
어넣어 줄 것이다. 푸른 잎사귀의 정령으로 거듭 날 것이다.

 

무심한 듯한 사람들의 발자욱은 부드러운 신설에 리드미컬하게 길을 잘 내어놓았다.

 

능선을 올라서서 뒤를 돌아 본 순간이었다. 수철리쪽에 우뚝 솟아 하얀 눈을 이고 서있는 필
봉산과 왕산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서 있다. 마치 거대한 城이 우뚝 서있는 것 같기도
하고, 분화구가 새로이 생긴 것 같기도하다.

 

문득 지난 주 산길을 찾아들어가 하루를 보낸 왕산아래 쌍재의 아우가족이 생각난다.

 

 

-다음 편에 계속하겠습니다-

   

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