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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기록]

[산행기]지리산/대성골-영신대-대성골/2001

 

산행후기는 잘 쓰지않고(소개식으로 쓰다보니), 사진 정리는 더욱 더딜 것 같고...

그래서 똑같은 코스를 진행했던 4년 전의 산행후기로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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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리 산 영신대 답사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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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 시 : 2001. 6.16(토)-6.17(일)
2. 산 행 지 : 지리산 영신대
3. 산행코스 : 의신마을-대성마을-큰세개골-대성폭포-영신대-세석산장-음양수샘
-큰세개골-대성마을-의신마을 (실제거리 약 26Km)
4. 소 재 지 :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동
5. 날 씨 : 맑은 후 흐림
6. 산행형태 : 1박2일 워킹산행
7. 참 가 자 : 30명(지리산 산길따라)

8. 장 비 : 개인기본장비,공동장비(텐트 3동,쟈일1동,보조쟈일1동,무전기)


9. 산행시간표

- 6. 16(토) 19:30 의신마을 집결지(산악인의 집)
22:00 만남의 시간
00:30 취 침

- 6. 17(일) 05:30 기 상
07:25 출 발/산행시작
08:15 대성마을/휴식
08:30 출 발
09:00 작은세개골/이정표
09:20 큰세개골/다리건넘/휴식
09:30 큰세개골 이정표/갈림길/선두조와 합류
09:35 출 발
09:42 집터/샘/통과
10:27 암반협곡/통과
10:50 대성폭포/휴식
11:00 출 발
11:25 휴 식
11:35 출 발
11:45 갈림길/전방 좌,중,우측으로 길있음
12:20 영신대 밑 암벽샘 도착/석문/점심
13:10 출 발
13:14 영신대 도착/입산제및 기우제
13:40 출 발
14:00 주능선 도착
14:15 세석산장 도착
14:30 세석산장 출발
14:37 거림-남부능선 갈림길
14:45 음양수샘 도착/휴식
14:55 출 발
15:15 남부능선-대성골 갈림길
15:30 무덤/통과/휴식
15:45 출 발
15:55 큰세개골 지류 도착/휴식
16:25 큰세개골 이정표/갈림길 있는 곳
16:30 큰세개골 다리건넘
16:50 작은세개골/휴식
16:55 출 발
17:25 대성마을/휴식
17:40 출 발
18:20 의신마을/산행종료


가. 설레이는 마음.

영신대...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라고 이름 알려진 곳....
대성골을 오르내리면서 그 곳으로의 길을 만나면 슬그머니 고개돌려 외면
하며, 그런 나의 비겁함에 씁쓸해 하던 곳...
그 곳으로 올랐던 많은 이들은 그 곳으로 올랐던 이야기들을 감추고 있고,
드물게 대할 수 있는 답사기록도 처한 상황과 계절적인 요인의 변수로
인해 무작정 텍스트삼아 오르기도 망설여 졌던 곳...
깊은 협곡과 폭포, 너른 암반, 짙은 수림이 나름대로의 연상으로 스크린
되는 그 곳...

영신대로 우린 떠난다.

아집과 편견, 그리고 욕심으로 범벅된 내 마음 떨쳐버리고, 지리를 대함에 있어 초심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리라.


그리고 민초들에게 희망의 단비를 내려달라며 무릎꿇고 빌리라.


나. 의신마을

지리 주능선은 대체적으로 동서로 길게 뻗으며 수많은 가지자락을 남북으로 드리우고 있는데, 지리산 남부지역에서 주능선의 중반부인 토끼봉(서쪽)에서 세석(동쪽)에 이르며 부채살처럼 드리워진 산길을 품고있는 곳이 하동군 화개면 의신마을이다.

 

다 다녀보지 못한 산길에 대해 무어라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안전하게 열려있는 길은 대성골-세석, 삼정-벽소령, 선비샘 직등루트 정도이며, 그 나머지 산길은 아직 일반산악인들 사이에 힘든 코스로 알려진 빗점골,절터골,산태골, 그리고 오늘 우리기 오를 영신대코스 등이 있다.

하지만 주능선쪽이 아닌 단천골, 수곡골, 자빠진골등 남부능선쪽으로의 오름길을 감안하면 이 곳 의신마을에서 오르는 산길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이번 산행의 집결지인 의신마을 산악인의 집은 이 마을 터줏대감이며 진주소방서 화개 119산악구조대장을 맡고 있는 정영훈씨(40)가 경영하는 민박집이다. 정대장은 여러모로 바쁜 시간을 쪼개어 동행제의를 흔쾌히 수락, 함께 산행을 하게 되었다.


다. 만남의 시간

이번 산행의 집결지 참석자는 26명이고, 산행을 한 대원은 21명인데, 서울,부산,논산,전주,대구,포항 등의 각지에서 참석하였다. 김삿갓님을 포함한 서울팀이 맨 마지막으로 도착하여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은 지리산에 취하고 그리고 사람에 취하기 마련이다. 반가운 만남에 이야기 꽃이 만발하며 의신의 밤은 깊어만 간다.

이번 산행에는 부산에서 박신희님(팔랑)이 처음으로 참석하였고, 히말라야 원정준비중인 논산의 박경식(청림)아우와 전주에 있는 그의 산후배가 같이 참석하여 처음으로 인사나누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이제 50세를 넘어가는 52년생 용띠분들이 무려 12명이나 참석했다는 것이다. 물론 산행능력도 대단할 뿐 아니라, 산을 대하는 자세도 아주 진지하여 모범이 되는 분들이다.

마천 문수암에서 일주일째 마음공부를 하고있던 초암님이 뜻밖에 집결지에 도착하여 반가운 해후를 하다.

이광전 선생님이 미리 도착하여 준비해 놓은 약초를 넣어 빚은 막걸리와 최화수 형님의 꼬냑, 부산에서 약 20인분 정도 마련해간 횟거리등으로 반가운 인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다.

숙소는 민박 방 2개로하고, 텐트 1조, 그리고 나머지는 마루에서 비박하기로 하는데 평상마루 4개에 잘 공간은 충분하다.

24:0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안효신(돌메이)선배가 불을 피워달란다.
내일 아침식사를 팥죽으로 준비해서 팥을 삶기 위해서라는데 팥죽용 단지등 요리장비를 많이 준비해 왔다. 그리고 같은 조원인 나는 이 팥을 삶느라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공식 취침시간인 00:30분을 지나 산에 취하고, 잣주에 취하며, 사람에 취하며, 또 식용나방에 취하는등 우여곡절 끝에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든 사람은 5명이다. 그런데 그 중 부처님같은 2명이 들어있어 놀랍고, 나머지 3명은 누구라고 언급하지 않아도 다 잘 알 것이다.


라. 큰세개골에 안기다.

05:30 기상

07:25
간단한 아침을 먹고 점심용 김밥을 준비한 후, 장비정리를 끝낸 다음 의신마을 아래쪽의 벽소령산장 앞에서 드디어 오늘 산행의 첫 발을 딛다.

숲은 깨어난 지가 한참인 듯 진초록의 나뭇잎 사이사이로 햇살이 빗살처럼 퍼진다. 이번 산행은 안전확보 상 선두조와 후미조 구분없이 같이 걷자고 신신당부했으나 왠지 선두의 걸음이 엄청 빠르다. 고도 200M를 오르며 약 2.5Km 거리에 있는 대성마을까지 약 40분만에 도착한다.
벌써 숨이차며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오랜 가뭄에 수량은 그리 많지 않으나 계곡의 물소리는 우렁차다.
2가구가 사는 대성마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집 뒤의 엄청 크게 자란 후박나무의 너른잎에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선두가 출발하고, 산행출발시 잠깐 자리를 달리해 일행에 뒤쳐져 뒤에 따라오는 안효신선배를 기다리느라 후미 담당인 나는 잠시 기다리는데 잠깐 사이에 15분이 지체되어 버린다.

'오늘 못오르면 평생 가보지 못할것 같아 기를 쓰고 따라 왔다'며 땀을 비오듯이 흘리는 안선배가 한마디한다. 오늘 날씨에 아마 나도 엄청 땀을 흘릴 것 같다. 의신에 남아 있는 가족걱정에 되돌아오는 산이가 '형님 선두와 너무 떨어졌습니다.'하는 말에 오늘 산행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한다.

정대장이 수시로 무전기로 위치파악을 해가며 오르는 터라 걸음에 그리 부담을 느끼지는 않고 페이스를 유지하며 걷는다. 하지만 발걸음은 자연적으로 쫓기듯 빨라지게 되고, 결국 쉬이 지치게된다.

이곳에서 또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남부능선으로 오르는 길과 계곡을 따라 영신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오는 큰세개골 이정표가 있는 곳까지의 산길은 계곡을 우측에 둔, 숲으로 꽉 막혀 다소 지루한 길이긴 하지만 길은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그 사이에 작은세개골의 다리를 지난다. 작은세개골에서 큰세개골 다리까지는 20여분 소요된다.

큰세개골 다리를 지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무전이 날라온다.
다리건너지 말고 건너기 직전의 '등산로 없음'길로 들어오라고. 분명 다리건너 남부능선 가는 길 도중 이정표앞에서 계곡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있었는데하며 의아해하면서도 후미조 3명은 되돌아와 그 쪽으로 들어서서 진행한다.


주민들이 고로쇠수액 채취등을 위하여 낸 길인 듯한데 길바닥에 바위가 다소 있기는하나 길은 아주 잘 나있다. 길을 들어서서 조금 진행하자 큰 암반이 있는 계곡으로 길이 연결되며, 갈림길인 큰세개골 이정표앞 계곡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선두조를 이내 만난다.

오늘 영신대로 오르는 길은 계곡으로 오르는 길이다.
그리 많지 않은 수량에 허옇게 들어난 큰 바위와 너럭바위등을 타고 오르는 계곡산행인데 짙은 수림과 협곡에 감추어진 이 곳 길을 진행한다니 긴장이 된다.

계곡의 좌측으로 건너 진행하는데 흰색과 검은색의 고로쇠물 집수관이 제법 튼튼하게 나있고 몇개의 집수통이 보이더니 휴식후 출발지점에서 5분여 거리가 되는 곳에 구들장의 흔적이 있고 정갈한 샘이 있는 곳이 나온다. 치약 등의 흔적으로보아 사람이 가끔씩 머무는 곳인 듯하다.


여기서부터 고로쇠 집수관이 연결되어 있는 산길을 비스듬히 돌다가 집수관을 버리고 다시 오른쪽의 계곡으로 내려서는데 고로쇠 집수관은 계곡의 좌측 가장자리로 쭉 연결되어 있다. 이제 계곡을 건너 우측의 숲길로 산길은 연결되며 가지능선들이 합쳐지는 곳인지 길은 완만한 경사로 평평해지고 산죽밭 사이로 잘 나있다. 이 고로쇠 집수관은 계곡의 좌측 가장자리로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

계곡은 아주 너르나 물은 스며들었는지 흐르지 않는다.
다시 왼쪽으로 내려와 계곡을 만난 뒤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제는 계곡을 가로질러 계곡의 좌측 가장자리 너덜길을 오르는데 고도는 대략 1000고지이고 이 곳에서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지류가 나타난다. 우리는 그대로 계속 큰 계곡으로 직진한다. 고로소 집수관도 우리와 길을 함께한다.

10:27 좌측으로 까마득히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급사면의 바위벽으로 몸을 세운 협곡으로 들어서면서 길은 우측으로 연결된다. 수량이 많을 때에 영신대로 오르르면 숲길로 우회하는 길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곳 만은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데 수량이 아무리 많더라도 이 곳은 지나갈 수 있을 만큼만 물이 흐른다고 까마득한 협곡의 우회로를 묻는 나에게 정대장이 설명해준다. 그리고 이 이후로 나는 협곡이 주는 위압감과 계곡의 바위를 타고 오르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10:45 드디어 대성폭포의 하단부에 도착하다.
폭포와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암반위에서 휴식을 취한다. 수량이 너무 적어 폭포의 위용을 보지못해 다소 아쉽다. 폭포의 물길이 닿는 바로 아래에는 암반위에 욕조형태의 홈이 파져 있는데 선녀탕이라고 한다. 진중하고 성실한 물길이 긴 세월동안 일념으로 만든 것이다. 너른 암반과 연결되어 바로 아래쪽에 있는 평평하고 너른 바위에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좌대가 있고 바로 맞은 편의 절벽에는 코끼리의 큰코를 가진 듯한 형상의 거대한 바위가 서있다.

이 거대한 바위는 최화수 형님의 글을 미루어 보았을 때, 폭포옆의 독립 암봉이라 할 수 있겠는데, 나머지 나란히 서 있다는 암봉은 생각하지도 못하였기에 찾지를 못했다. 대성폭포는 4단으로 된, 길이 120M의 대형폭포이지만 슬랩오르느라 신경을 쏟느라 그 전체 크기를 가늠해보지 못하였다.

그러는 사이,

참을 수 없는 폭포의 유혹에 못이겨 엽기적인 모습으로 폭포와 하나된 그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물세례를 받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거대한 암반으로 되어있는 폭포의 좌측으로는 나무와 비교적 쉬운 홀드가 있어 오르기가 수월하다. 하지만 중앙부의 반들반들한 암반은 거의 세미클라이밍을 하여야 할 정도의 슬랩인데 물기가 있는 채 오르면 아주 위험하다. 모두들 바위에 익숙해져 있는지 잘 오른다.


4단으로 된 폭포 위를 오르면 의외로 또 너덜길 같은 마른 계곡길이 나온다. 체력소모가 아주 심한 구간이라 할 수 있겠다. 약 1200고지로 추정되는 이 길을 오르며 후미로 오르던 몇 명은 폭포를 출발한지 25분만에 10분간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한다.

11:40 약 70도 방향의 오른쪽 계곡으로 나있는 너덜지역 쪽으로 향한다.
주능선이 다와가는지 하늘이 활짝 열린다. 5분 여 진행하면 아마도 큰세개골로 영신대에 오르는 길 중, 가장 조심하여 방향을 잡아야 할 곳이 나온다. 전방 좌측과 전방, 그리고 전방 우측의 방향으로 길이 나 있는데 우측의 직벽물 길로 난 길 이외에는 시그널이 매달려 있다. 정대장은 우측 바위 물길 옆으로 올라 대원들은 모두 그리로 올랐다.

청림아우는 쟈일을 가지고 올랐다. 이 곳 바위를 먼저 올라 쟈일을 내리는데, 큰형님은 옛날의 기억을 더듬더니 중간의 직진길로 몇발자욱 가서 바로 우측의 경사진 곳으로 방향을 튼다. 그런데 이 길은 바위로 오르는 길과 금방 만나게 된다.

그러면 맨 전방좌측의 시그널이 매어진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일까?
그 길은 영신대쪽이 아니고 아마도 칠선봉쪽으로 지능선이 연결되는 것으로 추측되며, 그래서 영신봉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길을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또 수량이 많은 경우에는 물길이 흐르는 바위로는 진행할 수 없고, 중간길로 쭉 오르다 우측으로 다시 계곡과 만나는 길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그 길을 확인하고 또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 길을 오르자마자 또 다시 큰 바위로 완전히 길을 숨기는 소위 나바론요새가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이끼가 서린 바위길을 조심스럽게 디디고 오르니 큰 바위사이로 물이 흐르는 영신대 바로 아래로 오른다. 12:20

오르는 길 우측으로는 돌기둥에 석문이 있고 그 쪽으로 또 다른 샘이 있는데 수량은 그 곳이 오히려 더 많다. 12년전 큰형님은 우측으로 돌아 석문을 통과하여 영신대로 들어왔다고 한다.

약 5시간에 걸친 힘든 오름길이었다. 비교적 평탄한 큰세개골 입구까지 2시간을 빼더라도 약 3시간을 계곡의 바위길을 걸어 오른 셈이다. 아침에 준비하여 가지고간 김밥등으로 점심을 먹는데 체력소모가 심했는지 모두들 잘 먹는다. 대체적으로 걸음이 빠랐던 선두조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원들이 오르는 사이에 행동식을 그리 챙겨 먹지 않은 듯하다.

잠시 뒤를 돌아 우리가 올라온 길을 둘러보다.
도저히 길이 나있을거라곤 짐작이 가지 않는 짙은 수림사이로 계곡이 지나가는 흔적만 짐작해볼 뿐이고, 방장님이 늘 이야기하던 나바론의 요새 위에 있는 이 곳은, 저 아래에서는 전혀 그 위치를 가늠하지 못할 곳인 것 같다.

저 멀리로 왕시루봉 능선의 잘록이인 느진목재가 엄청 크게 기울어지며 길이 연결되고, 반야봉의 그 봉긋한 모습과 이상스럽게도 항상 실제보다 멀어 보이는 노고단이 아득히 보인다. 옅은 개스에 쌓여 시야가 그리 맑지는 않다.

식사를 마치고 짐을 정리하는 사이 입산제와 기우제를 지낼 제물을 운반한 대원들이 먼저 바위샘 좌측의 키작은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영신대앞 제단으로 이동한다.

마. 영신대에서 무릎꿇다.

바위샘에서 잠시만 오르면 너른 마당이 나오고 편편한 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괴기스러운 영신대의 큰 바위앞 공간이 트인 곳으로 제단이 만들어져있다. 먼저 올라온 대원들이 제물을 다 챙겨놓았다.
당초 영신대 제단에서 기우제만 지내려했으나, 지리산 산길따라 그룹산행이
처음인지라 입산제를 겸해서 지내기로 하고 제문도 그렇게 만들었다.


격식을 갖춘 제문을 만드는 일을 자신도 없었거니와 지난번 낙동정맥 때의 제문에 틀을 맞추고 내용을 맞추어서 만들었다.

산신께 祭를 모심을 告하는 잔을 올리고는 다들 무릎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祭文을 낭독했는데 목소리의 떨림이 아주 컸다.



祭 文

단기 4334년 음력 윤4월23일, 서기 2001년 6월 17일, 저희 지리산 산길따라 가족 26명은 신령스런 이 곳, 지리산 영신대 앞에서 지리산 아흔아홉골 의 산자락을 보듬고 아우르기 위한 산행의 첫 발을 디디게 되었음을 천지신명과 지리산신께 삼가 고하나이다.

저희들의 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어여삐 여기시어 산에 들어와서 나갈 때 까지 안전한 귀가가 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고 지리산 산길따라 가족간에 우애와 우정이 가득차고 보람된 산행으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그리고 언제나 겸손하고 한없는 애정으로 지리산을 대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전지전능하신 천지신명이시여! 지리의 산신이시여!
지금 우리나라는 유례없는 가뭄이 들어 민초들의 고생이 실로 크나이다.
영원한 어머니의 산, 지리산의 산신이시여!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주듯 단비를 내려 부디 민초들의 고통을 거두어
주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이 천지신명과 지리산신이 민초들을 긍휼히 여기고 있음을 알게하소서.

여기 그 간절한 염원의 일념으로 이 성스러운 제를 올리나이다.
이 한잔 술을 흠향하여 주옵소서.



단기 4334년, 서기 2001년 6월 17일
지리산 산길따라 가족 일동



전국에서 모이고 아직 얼굴도 잘 익혀지지 않은 지리산 산길따라 가족이었지만 이 祭를 지내면서 어느새 모두 한마음,한 뜻의 절실함으로 하나가 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나 자신도 감격스러움에 고양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느 용띠 형님은 갑자기 쿡하며 치밀어 오르는 격한 감정에 낭패를 당하여 제를 마친 후, 한참 뒤돌아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제문을 불사르며 기우제를 끝낸다.

이번 영신대 山祭를 지내며 잊어버릴 수 없는 사실이 또 하나있다.
약 15Kg 정도 나가는 수박을 지고 올라온 것이다. 그 수박을 매고 올라 온 사람은 자그마한 체구의 닭띠 전사 솔개님이다. 가끔씩 번갈아 매고 올라왔다는데 아마도 그 정성은 산신을 감동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뭏든 영신대에서 먹던 그 수박이 맛있었던 것은 힘든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그 아름다운 마음이 더해졌기 때문이리라...
祭가 끝난 후, 간단한 음복과 과일을 나누어 먹고는 주능선으로 오른다.

주능선을 오르며 최화수형님에게 창불대와 좌고대에 대하여 잠시 묻다. 예전에 큰형님이 소개한 선인들의 기록만으로는 확실히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단다. 다만 영신대 뒤에 또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위에는 챙달린 모자를 엎어놓아 튀어나온 부분이 마치 좌대처럼 여겨지는 곳이 있긴하다. 남효온 선생의 글을 보면 그 뒤 큰 바위가 창불대이고, 아주 좁지만 좌대처럼 생긴 그 곳이 좌고대인 것으로 짐작은 할 수 있으나 확실치가 않은 것이다.


바. 천상의 화원과, 속세로 내려오는 돌 계단길...

정대장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인다.
그러니 이야기도 술술 잘 나온다. '여기서 우측으로 가면 음양수샘으로 바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라며 짙은 수림쪽을 가리키지만 우린 그저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다. 그리고 이 곳 영신대의 영험함에 대하여 정대장이 한마디 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영신대에는 소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제대로 마음이 서있지 못한 사람이 이 곳에서 하루를 지내면 밤새도록 귀신의 등살에 들볶여 단 하루도 못견디고 내려온다고 하며, 실제로 어떤 사람은 거의 반쯤 실성한 상태로 내려온 적도 있다고 한다.


최고의 기도처란 말은 그 만큼 기가 센 곳이라는 것인데, 그 것은 그 기를 받아들일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기도나 공부가 잘 되는 곳이란 이야기가 되는 모양이다.

13:40 영신대를 출발 주능선으로 오르다.
주능선으로 오르는 이 길은 사태가 났는지 길쪽으로 흐르는 잔돌이 무수히 깔려있어 낙석의 위험이 있는 위험 천만한 길이다. 나는 계속해서 낙석주의를 외치며 오르는데 아마도 이번 산행중 가장 마음 졸였던 길이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한다.


그 곳을 오르는 중에 음양수쯤에서 만날 것으로 예상했던 금정산님을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다. 오르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었고, 祭를 지내느라 우리가 다소 늦어졌던 모양이다.

20여분만에 그 익숙한 주능선에 닿다.
마음이 탁하고 놓인다. 세석고원에 이르는 주능선 길가에는 그 동안 공단의 꾸준한 관리와, 산을 찾는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졌음인지 엄청 무성한 숲이 만들어져 있다. 큰 형님의 표현대로 천상의 화원이다.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니 무척 기분이 좋다.


산오이풀의 그 싱그러운 내음까지 더해져서...

14:15 세석대피소에 들러 새로 부임한 주소장과 인사를 나누는데 대원사 주차장 주사장의 형이고, 이광전선생님과 큰형님과는 아주 잘 아는 사이다. 모처럼 들런 두 분 때문에 커피를 대접받는데 헬리포트에서 대기하던 형님들이 거의 시위성 무전을 계속 보내는 통에 빨리 내려온다.

 

하산하는 길은 크게 어려운 곳은 없다.
다만 큰세개골의 첫번째 지류까지 내려가는 길과, 이정표 앞까지의 바위 너덜길이 걷기가 좀 어렵다. 하지만 하산하는 이 길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헬기장에서 출발하여 5분여만 걸으면 거림골-남부능선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또 10여분 진행하면 음양수샘이 나오는데, 큰 암반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나오는 물이 합쳐져 아래에 샘을 이룬다. 잠시 물 한 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아직도 지친 표정을 짓는 사람이 없다. 놀라운 일이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서 정대장과 나눈 이야기이지만 사실 정대장 자신도 극기훈련코스
정도로 생각하고 대원들을 이끌었는데 너무도 잘 걷는다고 한다.

세석에서 음양수샘에 이르는 숲속길은 아주 걷기가 수월하고 주로 신갈나무와 자작나무종류인 사스레나무로 이루어진 숲이 매우 맑다.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은 삼신봉으로 연결되는 남부능선길이다.
서두르지 않고 산길 중간중간 시야가 트이는 곳에 나있는 전망대에 올라
주위 산자락을 조망한다.

 

세석앞의 촛대봉과 애절한 사연의 연진바위도....
산자락으로 드리워진 신록의 수림은 너무나 정갈하고 윤기흐르며 힘이 있어 보인다.

15:15 남부능선-대성골 갈림길에 닿다.


우리는 방향을 우측 하산길인 대성골 방향으로 튼다. 삼신봉에서 왔다는 안내산악회 한 팀이 우리앞에 앞질러 간다. 결국 그 팀의 산행에 무리가 있었는지 다리에 쥐가 난 사람때문에 길이 밀리자 비켜준다.


미끄러운 급경사 흙길과 또 바위길로 하산길을 맞이하는 대성골 루트는 사실상 걷기가 수월한 곳은 아니다. 내가 늘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그런 코스중의 하나이다.

큰세개골 바로 앞 내려오는 곳에서부터 한동안 계속되는 큰 바위너덜길을 조심스럽게 걷는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휴식을 취하며 걷는데, 무전이 날라온다. '여기는 원대성마을 입구인데 어디쯤인가? 오버'...


이제 평탄하고 수월한 길 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두조는 엄청 내달린 것이다. 휴식을 많이 취하고 출발했다는데도 20분 이상이나 차이가 났던 것이다.


'큰세개골 입구입니다. 바로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지만,
생각외로 그 호젓한 길은 생각보다는 길고 힘이 들었다.

16:25 오전 큰세개골 오름길 기점이었던 계곡앞 갈림길인 이정표에 닿고 지친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인다. 다리 부근의 계곡에 놓여져 있는 거대한 바위는 참으로 희고 매끈하게 잘 생겼다. 약 20분 걸어 작은세개골에 도착, 다시 휴식을 취한 후 출발하는데 선두는 대성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무전이 들어온다.

숲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는 계곡은 허옇게 바닥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물소리는 여전히 우렁차다.
빨치산토벌 격전장 이정표를 지나자 아까 정대장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영신대 아래 우리가 올랐던 큰 바위 부근에는 굴이 있는데 언젠가 그 안에서 많은 인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AK소총과 함께...
피아가 대치된 상황에서 화력이 모자라는 빨치산은 굴속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 속에서 그대로 굶어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적어도 지리산에 들어오면 아름다운 자연세계와 더불어 우리가 느끼고 가야 할 부분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절에 벌어졌던 많은 일들은 우리가 우리의 어른들에게 항상 마음의 빚을 지고 가야 할 것들이기도 하다. 특히 빨치산이 결정적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는 이 곳 대성골 산길을 걸을 때면, 나는 그 때의 박격포탄이 날라오는 절박한 순간들이 곧 잘 연상이 된다.

17:25 대성마을 도착
선두로 내려온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다.
산을 오르지 못한 산이는 가족과 함께 하루종일 이곳에 있다가 조금 전에 내려갔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이 곳을 다녀갔는지 막걸리가 다 떨어져 우리 팀은 소주한잔만 간단히 걸치고 일어나 의신으로 향한다. 17:40

마을로 내려가는 도중 계곡 저편으로 이쁜 꽃도야지 3형제가 모여 있다. 오늘 기우제에 산제물로 바쳐졌던 제물들인데...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지낸 기우제의 흔적을 대성계곡에 씻어 남기려 했나보다.

10시간 산행후에 걷기에는 결코 만만치가 않은 2.5Km 길을 걸어 의신마을로 내려온다. 대성교로 내려가는 길은 등산로를 막아 놓았다.

 

처음으로 선두와 후미를 맡았던 정대장과 내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걷는데, 서서히 발바닥이 아파오려 할 즈음 드디어 마을입구에 도착한다. 산행시작 후 장장 11시간이나 걸렸다. 18:20

산이가 미리 내려와 준비해 놓은 뒤풀이 자리...
늘 헤어지기 아쉬워 미적거리지만 갈 길이 너무 멀다.
새로이 준비한 막걸리와 맥주, 그리고 홍기님이 가지고온 비장의 스카치블루까지 나오고 하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아쉬움을 접다.

사. 산행을 마치고.

산행을 같이한 지리산 산길따라 여러님들...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습니다. 힘든 길이었지만 의연히 오르고, 마음을 다해 일심으로 비를 내려 달라고 빌던 아름다운 모습,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또 다시 영신대를 찾아오겠다고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또 이렇게 오를 수 있느냐는 질문에도 대답을 유보하렵니다.
저가 비록 영신대는 올랐으되 이제 맨 앞의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장님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행기를 쓰면서 이상스럽게도 시간기록에만 매달리는 저의 머리는 산행에의 느낌은 하얗게 지워지고 없고, 대신 귀가길의 빗방울과 그 뒤 계속 퍼 붓는 빗줄기에 그저 안도감만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힘든 산행에 차량이동하느라 애쓰신 여러 님들께 참으로 고마움의 말씀 올립니다.

그리고 智異山神님께 머리 조아리고 感泣합니다.


두류/조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