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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숲속의 글마당

치밭목에서 아름다운 실패를 보다/술산 강영환

by 지리산 마실 2008. 3. 10.

강영환 시인의 '시가 있는 산' <4> 치밭목에서 아름다운 실패를 보다
산은 욕심만으로 오를 수 없는 곳 … 실패 알아야 성공도 배워
지리산 종주 200차 앞둔 선배와 눈길에 막혀 하산
진정한 산행이란 산을 이기는 것 아닌 자신을 이기는 것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얼마 전 200회 지리산 종주에 도전하는 이광전 선배가 묵묵히 치밭목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3월부터 산불 방지기간이 시작되어 지리산 출입이 통제되었다. 산문이 닫히기 전에 산에 들었다. 지리산 주능 종주 200차를 앞둔 이광전 선배와 199차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번 195차 때 함께 가다가 고관절 통증으로 인해 나는 눈물을 머금고 벽소령에서 홀로 하산한 기억이 있기에 이번엔 기필코 완주해 볼 요량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종주 경험은 예닐곱 번 정도를 기억하고 있지만 지리산 주능 종주 200차라는 엄청난 일에 함께 한다는 사실이 가슴 설레게 했다.

부산 사상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산청 덕산에 내려 택시를 타고 유평계곡 새재마을에 들었다. 치밭목에 오르자 대피소를 지키는 민병태 소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눈에 덮인 대피소가 아름다웠지만 작은 창문을 흔드는 초속 40여 미터의 광풍은 발목을 싸고도는 냉기와 함께 밤잠을 설치게 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장엄한 일출이 펼쳐졌다. 달뜨기 능선 위로 붉게 솟구치는 태양에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동이 밀려왔다. 이런 풍광이 나를 부르는 것이다. 나는 '그리운 치밭목'에다 그렇게 토했다. 치밭목을 한없이 짝사랑하나 보다.


2박 3일이 아니라도

다시 떠나기 위해 돌아왔다

산을 먹고 돌아온 날 밤에 아이를 낳았다

아버지가 그리운 사생아

집이 그리운 산으로 컸다

불쑥불쑥, 눈치 없는 치밭목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을 헤치고 써레봉에 올라 중봉과 천왕봉을 바라보았다. 맑은 날씨 덕에 천왕봉은 눈썹에 닿을 듯했다. 그러나 더 많은 눈이 발을 가로막았다. 몰려온 눈은 허리까지 차올라 러셀(눈을 쳐내어 길을 다지면서 나아가는 일)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산이 어디 가나. 몸만 지키고 있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지 않나. 내려가자."

실패도 아름다운 것이라며 선배는 과감하게 돌아섰지만 나는 흔적도 없이 파묻힌 길을 몇 번이나 돌아보며 발길을 돌렸다. 선배의 얼굴에도 아쉬움이 조금은 남아있다. 산길이 막히면 5월에나 종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산은 욕심으로는 갈 수 없다. 실패할 줄도 알아야 성공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백리 종줏길이라 하여 겁부터 주던 선배도 있었고 시원찮은 장비에 등산로도 지금처럼 잘 정비되지 못한 때였다. 욕심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마음을 비우라 하지 않던가. 선배는 가장 힘들었던 기억을 1998년 여름 직장 동료들과 함께 빗속을 오르던 코재라 했다. '그때도 포기했어야 했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 종주에 어려웠던 일이 어디 한두 번뿐이었겠는가.

요즘 사람들은 산을 너무 빨리 달린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야간산행이 가능하던 때는 당일 종주를 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느끼고 올까? 중간중간 마련된 대피소에서 음식 조달과 편한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어 훨씬 수월해졌다. 산을 느끼고 자신을 느끼고 그렇게 2박3일의 고된 길을 완주하고 났을 때의 희열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산을 운동장처럼 여긴다. 텐트와 온갖 취사도구 그리고 부식까지 짊어져야 할 때 종주는 인내심의 한계에까지 도달하는 일이 많았다. 산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멋진 한판 승부였다. 산을 이기려하지 말고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산행이 아닐까.

200차를 목표로 정하고 걸어온 것이 아니라 산이 있어 묵묵히 걷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도달해 있었다는 선배는 전혀 조급해 하지 않았다. 나도 뒷날의 200차에 함께 갈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어제의 도전은 행복했고 오늘의 실패는 아름다웠다. 이런 멋진 승부를 200차나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삶의 역사가 아닐 수 없고 200차를 훌쩍 넘어 더 먼 길을 갈 선배의 뒷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입력: 2008.03.09 21:00 / 수정: 2008.03.09 오후 9:25:05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