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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文化 이야기

문화재 이야기(5)숙수사와 소수서원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5) 숙수사와 소수서원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에는 비극적인 속설이 전합니다.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로 알 수 있듯이 이 곳엔 숙수사(宿水寺)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관군(官軍)의 방화로 절은 폐허가 됐고, 그 자리에 서원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소수서원 전경.
영주시 제공

세조 3년(1457년) 10월, 단종 복위 거사가 실패하자 본거지였던 순흥도호부 사람들이 토벌군에 떼죽음을 당한 사건을 역사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부릅니다. 소수서원의 지척에 당시 화를 입은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을 제사지내는 금성단(錦城壇)이 있으니 그럴싸한 추측입니다.

하지만 소수서원에서 발굴된 불상들은 ‘숙수사의 참화’가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 1953년 발굴된 25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인 숙수사터 여래좌상(7세기 중엽).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 박사에 따르면,1953년 12월1일 소수서원 곁에 고등공민학교를 새로 지으면서 지하 1m 지점에서 작은 불상이 한꺼번에 25구나 나왔습니다. 불상을 인수하러 간 사람은 훗날 한국 고고미술사학의 태두로 대접받는 김원룡 당시 학예연구관이었습니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은 “정식 중학교로 승격을 인가해 주어야 유물을 내놓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김 연구관은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하는군요. 결국 몇달이 지나서야 넘겨 받았는데, 이 학교가 이듬해 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것을 보면 교장의 작전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본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지금은 국립대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불상들은 6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이르는 매우 이른 시기의 것입니다. 종류도 여래상, 보살상, 반가사유상, 탄생불, 신장(神將)상, 공양자상 등 다양합니다. 불상들은 지름 60㎝, 높이 75㎝를 넘는 큰 항아리에 넣어져 묻혔습니다. 난리를 만나 서둘러 불상을 땅속에 파묻은 스님들의 긴박한 움직임이 눈에 보이는 듯 하지 않습니까.

통일신라시대 이후 것인 대형 토기의 존재는 이 불상들이 묻힌 시기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게다가 묻는다는 것은 피란(避亂)을 전제로 하는데, 복위 운동은 한동안 몸을 숨긴다고 수습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지요.

김 박사는 고려 고종 18년(1231년)부터 40년 동안에 걸쳐 국토를 휩쓸어버린 몽골의 침입이 숙수사의 폐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절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스님들은 몽골군에 잡혀갔거나 타향에서 죽기도 하여 훗날 불상을 수습할 사람조차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불상이 발굴된 지 50년이 넘었고, 소수고등공민학교에서 승격한 소수중학교가 읍내리로 이전한 지도 40년이 넘게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관군의 방화설(說)’이 여전히 소수서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은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에 대한 역사와 민심의 심판이 그만큼 준엄하다는 뜻이겠지요.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기사일자 : 2007-02-08    25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