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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文化 이야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7)조희룡의 '호산외기'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7) 조희룡이 지은 전기집 ‘호산외기’

사마천은 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으로 본기(本紀)·표(表)·서(書)·세가(世家)·열전(列傳)의 다섯 가지 체제를 채택했다. 본기는 제왕들의 이야기이고, 표는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이며, 서는 제도를 서술한 부분이다. 세가는 제후들의 이야기이고,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제외한 각계 각층의 이름난 사람들 이야기이다. 전(傳)은 ‘그 사적을 적어서 후세에 전한다.’는 뜻인데,‘사기’ 식의 역사서술을 기전체(紀傳體)라고 분류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역사를 서술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벼슬도 못한 중인들의 삶을 전기로

전(傳)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남다르게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라야 후세에 전해진다. 한문학의 갈래 가운데 전(傳)이 있어서, 예전부터 충신, 효자, 열녀의 이야기를 전(傳)의 형태로 기록했다. 충(忠)·효(孝)·열(烈)은 삼강(三綱)의 덕목이니, 충신, 효자, 열녀가 생기면 그의 후손들이 이름난 사대부에게 찾아와 전기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름난 문인이 전기를 지어야 그의 문집에 실려 그 이름이 후대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충신, 효자, 열녀에게는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기 때문에, 임금이나 관찰사, 군수 등이 이름난 문인에게 전기를 지으라고 명하기도 했다.

양반들의 직업은 관리 하나뿐이지만 중인들은 직업이 다양한데다 봉건체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도 또한 달랐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지은 전들도 또한 사대부들의 전과는 내용이나 분위기가 달랐다. 특히 당대의 질서를 거부하고 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던 몇몇 중인들의 전이 관심을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대부들이 교유관계에 따라 중인의 전을 지어주기도 했지만, 중인 후배들이 자랑스러운 선배의 전을 짓기도 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가가 조희룡이다. 그는 중인들의 전기를 책으로 내게 된 동기를 ‘호산외기(壺山外記)’ 서문에서 밝혔다.

“내가 집에 머물면서 무료한 나머지, 내 귀로 직접 듣고 눈으로 직접 보았던 몇 사람의 삶을 기록하여 전을 지었다. 다행히도 이 전기가 천지간에 남아 있다가, 뒷날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 사람이 옛날의 ‘사기’를 대했던 것처럼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가 전기를 지었다고 해서, 중인들의 생애가 후세에 꼭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 첫머리에 ‘백이·숙제’를 싣고, 그 끝머리에서 이렇게 질문하였다.“여항인(閭巷人)이 품행을 닦고 이름을 세우려 하더라도, 청운지사(靑雲之士)의 붓에 실리지 못한다면 어찌 그 이름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는가?”

사마천이 다행히도 청운의 선비였기에 사기에 실린 인물들은 그 책과 함께 이천년 동안 이름이 전해졌지만, 조희룡은 “내가 어찌 사마천 같은 사람이겠는가?”하고 탄식하였다. 후세에 전할 만한 중인들의 전기를 다 지어 놓고도, 역시 중인인 자신의 신분 때문에 이 책마저 땅에 묻히고 말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였다. 그러나 그가 첫 번째 중인들의 전기집을 냈기 때문에 중인들의 남다른 삶이 기록에 남겨졌고, 그 뒤에도 이를 바탕으로 한 중인들의 전기집이 계속 지어지게 되었다.

찬의 형식을 빌려 중인들의 삶을 평가

조희룡이 56세에 지은 ‘호산외기’에는 효자 박태성부터 시인 박윤묵에 이르기까지 39항목 42명의 전기가 실렸는데, 이 차례는 직업순도 아니고 나이순도 아니다. 대체로 영·정조 때의 사람들 이야기를 자신이 보고 들은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다가, 직하시사의 선배격인 송석원시사의 마지막 시인 박윤묵에서 끝냈다. 박태성의 증손자 박윤묵의 이야기에서 끝낸 것은 우연이다.

역관·화원·의원·악공 등 전형적인 중인들뿐만 아니라 바둑꾼·책장수·아전·협객, 심지어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그 직업도 다양하다. 지배층 양반이 아닌 사람은 고루 다 포함시켰다. 물론 지배층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삶은 위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그 속에 참이 있었고, 또한 몸부림이 있었다. 조희룡은 자기의 호인 호산거사의 입을 빌려서, 또는 본문 뒤에 덧붙인 찬(贊)의 형식을 빌려서 이들을 평했다. 서리 박윤묵의 경우를 보자.

“처음부터 그에게 인욕(人慾)이 일어나지 않았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끝내 천리(天理)로써 이긴 자이다. 그런 까닭에 존재(存齋 박윤묵)는 군자다.”

뛰어난 글재주를 지니고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던 그였지만,“평소에 닦은 학문의 힘이 드러나서” 죽은 친구의 첩이 은혜를 고마워하며 스스로 시중 들기를 원했는데도 다른 곳으로 개가시킨 행위를 칭찬했다. 그야말로 사대부들의 궁극적 목표인 ‘군자’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협객과 함께 놀던 시절을 회상하며 지어

사대부들은 대개 전기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자료를 보고 전기를 썼지만, 조희룡은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기로 썼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자신이 확실히 모르는 사람의 전기도 썼지만, 조희룡은 대부분 자신과의 관계를 밝혔다. 그랬기에 그가 지은 전기는 더 신빙성이 있다. 협객 김양원의 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김양원(金亮元)은 이름을 잃어버리고 자(字)로 불려졌다. 젊었을 때는 협기있게 놀기를 좋아했으며, 계집을 사서 술청에 앉아 술도 팔았다. 몸집이 큰 데다 얼굴도 사납게 생겼다. 기생집이나 노름판으로 떠돌아다녔는데, 서슬이 시퍼래서 사람들이 감히 깔보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처사들과 일행이 되어 시에 맛들이더니, 지금까지의 버릇을 꺾고 시인들을 따라 노닐게 되었다. 시로써 이름난 사람이라면 젊고 늙고 할 것 없이, 마치 귀한 손님이라도 만난 것처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시를 짓는 솜씨가 재빨라서, 남이 열을 지으면 자기도 열을 짓고, 남이 백을 지으면 자기도 백을 지었다. 남에게 뒤지기를 부끄러워했다.(줄임) 시사(詩社)에 갔다가 하루라도 시를 짓지 않으면 화를 내며 “어찌 시사가 모이는 의미를 저버린단 말이냐?”고 꾸짖었다. 호산거사가 이렇게 말했다.“문인이 술청에 앉아 그릇을 씻었던 모습을 위로는 사마상여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고, 아래로는 양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양원이 어찌 사마상여겠는가마는 그 뜻을 따랐을 뿐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게 글공부를 했는데, 김양원은 여자를 사서 술집을 차렸다. 기생집뿐만 아니라 노름판까지 휘어잡은 협객이었는데, 시를 배우더니 문장판도 휘어잡았다. 성품 그대로 급하게 지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게으른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랬기에 성서시사(城西詩社)도 그가 이끌 때에는 시끌벅적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적막해졌다. 사마상여가 부잣집 딸 탁문군을 꾀어 동거했는데도 장인이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자, 이들 부부는 술집을 차렸다. 자기의 딸이 술장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장인도 결국 살림을 나눠 주었다. 김양원이 사마상여같이 위대한 문장가는 아니었지만, 시대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술장사를 하게 된 것은 서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김양원의 전기 후반부는 조희룡의 회상이다.

<20년 전에 김학연과 함께 흔연관(欣涓館) 화실로 소당(小塘·이재관)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서로 “양원에겐 말하지 말자. 시를 지어 그림 그릴 흥취를 깨뜨릴까 염려되니까.”라고 약속했다. 소당이 시를 못 짓기 때문이었다.

흔연관에 이르렀더니 봉우리 그림자가 뜨락에 와 덮였고, 사람의 발자취도 없이 고요했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소당이 이웃집 중에게 관음상을 그려주고 있었는데, 미처 다 끝내지 못했었다. 서로 손을 맞잡고 즐거워하면서, 좀처럼 얻기 어려운 오늘의 만남을 놀라워했다. 천장사의 중 금파(錦波)와 용해(龍海)도 마침 이르렀는데, 모두 시를 짓는 중들이었다. 용해는 묘향산에서 온 지가 겨우 며칠밖에 안 되었다. 여러 명승지들을 두루 얘기하는데, 산속의 안개와 노을이 그의 혀뿌리에서 일어나는 듯했다.

이때 비비람이 몰아치더니 안개가 일어나며, 마치 신군(神君)이 오는 듯했다. 갑자기 검은 구름 속에서 “고기 사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로 우스갯소리로 말했다.“아마도 선재동자(善才童子)가 관음보살의 연못에서 잉어를 훔쳐와 우리 인간들을 놀려 주나 보네. 그러지 않고서야 비바람치는 빈 산속에 고기를 팔러 오는 자가 어찌 있겠나?”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마치 세상 사람들이 그려 놓은 철선(鐵仙) 같았다. 어깨엔 큰 고기 한 마리를 둘러메고 구름을 헤치며 나타나서, 수염을 떨치며 한바탕 웃어댔다.“내가 은하에서 고기를 낚아 왔다네!” 깜짝 놀라 바라보니, 바로 양원이었다. 그가 크게 소리쳤다.“자네들이 나하고는 차마 같이 오지 못하겠다니, 누군들 참을 수 있겠나?” 그러고는 고기를 삶고 술을 데우며, 서로 예전처럼 시 짓기를 재촉했다.>

사대부가 썼다면 전기에 들어가지도 못할 이야기지만, 조희룡의 체험으로 쓰다 보니 김양원의 협객적인 면모가 실감나게 드러났고, 시인과 화가, 스님들이 어울리던 시사의 모습도 구체적으로 남게 되었다. 화가 이재관의 전기가 뒤에 실렸다고 소개해, 관심있는 독자들이 찾아 읽게 만들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t서울신문 07.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