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洞哀歌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 아홉 꽃 봉오리 피어보지 못한 채로
가마귀 우는 골에 병든 다리 절며 절며
달비 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 없이 쓰러졌네
'산동애가'(山東哀歌)의 일부이다. 산수유가 노랗게 지리산 녘을 뒤덮을 때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노랫말이다.
1960년대 대중가수에 의해 노래가 불려지기도 했으나, 그 연원을 찾아보면 해방공간의 가슴
아픈 현대사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산동은 산수유마을로 널리 알려진 전남 구례군
산동면이다. 지리산온천관광단지에서 불과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이다.
이 노래를 처음으로 불렀던 주인공은 백부전으로 알려져 왔다. 산수유 피는 봄 소식을 전할
무렵이면 신문들 마다 '빨치산 여전사 백부전이 부른 노래'라고 노랫말을 소개해오고 있다.
기자는 한 때 이 '백부전'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산동면에 사는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고,
면사무소 호적을 찾아보기도 했다.
맨 왼쪽이 '산동애가'의 주인공 백순례.
백부전은 실제 인물이었다. 산동면 상관 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열아홉살 여순사건 때
국군에 의해 총살당한 것으로 추적되었다. 부전은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었고, 호적상의
이름은 백순례(白順禮)였다. 왜 그 노래를 남긴 것일까.
1948년 여순사건 당시 구례군 산동면을 비롯 황전·토지면 일대는 좌익군인들의 무대였다.
여수에서 반기를 든 좌익군인들이 이곳까지 이르렀기 때문. 특히 산동면은 군경과 좌익이
대치하며 피를 흘렸던 비극의 현장이었다.
해방공간에서 온 나라가 좌, 우로 갈렸었다. 구례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여순사건중 산동
에선 이른 바 '좌익 명단'이 큰 회오리를 일으켰다. 어떤 식으로든 좌익단체에 그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혐의를 벗어나기도, 결백을 주장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뿐 아니라
'밤손님들'(좌익군인)에게 협조했다는 구실로도 죽임을 당한 것은 부지기수였다.
백순례의 조카가 살고 있다. 그가 할머니로부터 들었다는 사연은 이렇다.
"당시 미혼이었던 아버지와 고모(백순례)가 군인에게 함께 끌려갈 처지였다고 합니다.
끌려가면 바로 죽음이었으니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고모가 나서서 '제가 갈 테니 오빠
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집안의 대를 잇는 대신 자신을 희생한 것이죠.
고모가 아니었다면 제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백순례가 끌려가면 스스로 지어서 불렀다는 것이 바로 이 산동애가. 수많은 산동의 처녀
들이 산수유 열매를 따려 이 노래를 이어받아 불렀다. 지금도 산동에 가면 들을 수 있다.
해마다 봄이 오면 그 역사의 현장에서 '산수유축제'가 열린다.
구례 산동면의 한 마을. 봄이 되면 지리산녘 아래는 노란색 산수화 풍경이 펼쳐진다.
사진=김영근
출처: chosun.com 블로그 <남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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