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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숲속의 글마당

문학의 태어나는 자리-공포/이승수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18)공포-합리·규범의 경계에 출몰하는 내면의 괴물
입력: 2008년 05월 16일 17:31:19
많은 경우 공포는 유년기의 체험으로 기억된다. 아이는 어느 시점 ‘무서운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무서운 이야기’는 낯설고 경이로운 세계이다. 일단 이 세계를 접한 아이는 눈을 가리면서도 거기에 탐닉한다. 때로 아이는 세계와의 합일이 깨지고 낯선 세계에 혼자 남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눈을 떠보니 엄마가 없는 것이다. 경이로운 세계를 접하든, 혼자 낯선 세계에 남겨지든 아이가 체험하는 것은 공포이다. 거대한 세계와 무서운 힘을 체감하는 것이다.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로 疾走하오. / … / 十三人의 兒孩는 무서운 兒孩와 무서워하는 兒孩와 그러케 뿐이 모혓소.

-이상, ‘烏瞰圖’

빠져나가지 못해, 빠져나갈 수 없기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는 아이는 악몽을 꾸는 아이다. 제1의 아해부터 13의 아해까지는 공포가 증폭되고 증식되어감에 따라 달라지는 하나의 아해일 뿐이며, 나중에 남는 것은 ‘무서운 아이’(공포의 대상)와 ‘무서워하는 아이’(공포의 주체)로 분열된 자아이다. 막다른 골목은 차단된 출로를, 질주는 공포 심리를 상징한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아이는 시인의 기억을 좀체 떠나지 않는 형상 중의 하나이다. 기형도는 동짓날 밤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듣던 문풍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라고 울었고, 스스로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라고 자위했다(‘바람의 집-겨울 版畵 1’). 아무도 없는 기억 속 옛집에 들러, “덜컹이는 문고리 하나. / 막다른 골목에 갇혀 / 그 소릴 듣는다”는 시인 또한 유년기의 공포 체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백인덕, ‘적막한 이주 5’).

공포를 체험하면서 아이는 혼자 남겨지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그럼에도 혼자 남겨지는 상황이 반복되면 공포는 마음 깊은 곳에 누적된다. 공포가 쌓여 있는 곳은 심해이고 절해고도이며 인적이 닿지 않는 저 깊은 숲이다. 거기에는 공포를 먹고 자라는 괴물이 산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생각되고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의 한계에서 출몰하며, 어떠한 정의에도 붙잡히지 않으면서 정체성과 관련된 우리의 공적인 규범들에 도전한다(리처드 커니). 심해의 괴물은 가끔 수면 위로 출몰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건 각자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에드거 앨런 포(1809~1849)는 세 살 이전에 부모를 잃었다. 젊어서부터 술과 도박과 아편에 탐닉했다. 지독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글을 썼는데, 그가 남긴 74편의 단편 대부분은 공포 이야기다. 그는 자기 작품이 표방하는 주제는 공포이며, 그 공포는 영혼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했다. ‘검은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는 초자연적인 괴물의 형상이며, ‘어셔가의 몰락’의 초반부에 그려진 늦가을 저물녘 늪가의 황폐한 옛집은 바로 괴물의 집이다. 검은 고양이와 그 기괴한 분위기는 유년기에 포의 마음 깊은 곳에 축적된 공포감에서 나온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괴물들은 사회집단의 무의식에 거주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기 의지와 앎을 압도하는 자연현상·사회 흐름·권력에 공포를 느꼈다. 미지의 거대한 힘이 합리적으로 풀리지 않고 굴절, 변용되면서 전설이 태어났다. 한밤중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귀신, 해마다 처녀를 공물로 받아먹는 지네, 부녀자를 납치하여 지하국으로 데려가는 금돼지 등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공포의 표현이다. 부모가 아들의 겨드랑이에 난 날개를 꺾자 앞산에서 용마가 울며 날아갔다는 ‘아기장수설화’는 권력에 대한 공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과학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한때 학교에서는 매번 2등만 하는 학생이 1등을 독차지하는 학생을 죽인 뒤 벌어지는 괴기담이 유행했고, 얼마 전에는 빨간마스크라는 흉측한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이러한 이야기 뒤에는 무한경쟁에 내몰려 살해 충동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공포감과, 외모지상주의 사회의 시민들의 낭패감이 도사리고 있다. 이야기들은 사회집단의 내면 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신묘한 거울인 셈이다.

이탁오는 말했다. 평소 식견이 풍부한 사람에게 평범한 것도 견문이 적은 사람이 갑자기 보면 괴이한 것이 된다고. 이 말을 받아 200년 뒤에 박지원은 말했다. 통달한 선비에게는 괴이한 일이 없으니, 견문이 적으면 괴이한 것이 많은 법이라고. 광우병 논란을 두고 괴담(怪談)이라고 하니, 식견 없는 사람들이 보면 괴담임에 틀림없다. 설사 괴담이라고 해도 그것은 생존본능을 위협받는 공포감에서 발아된 것으로 국민들의 마음 심연의 진실임을 알아야 한다. 공포감은 자칫 괴담을 거쳐 괴물로 진화하여 세상에 출몰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한 사회의 공포는 전란기에 최고조에 달한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에서 인간의 사유와 도덕적 판단은 중지되고 생존본능만이 작동한다. 생존본능에 공포감이 더해지면서 무자비한 학살과 피의 보복이 반복된다. 공포감은 공격성 및 살해 충동을 낳고, 그로 인해 공포감은 다시 증폭된다. 한 사회의 공포 상황과 한 개인의 공포 심리는 떨어질 수 없게 연결되어 있다. 문학은 둘의 관계를 정밀하게 추적해가기도 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기에 지바고가 적위군 빨치산에서 18개월 동안 지내며 듣고 본 이야기를 들려준다. 적위군 빨치산 대원 팔르이흐는 가족을 무척 사랑했다. 적위군과 백위군 사이 잔혹한 보복이 되풀이되는 동안 그의 가족이 부대에 도착했는데, 그 즈음 그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의 머리에서는 고문당하고 신음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는 사랑하던 아이들에게 목각 인형을 만들어주던 예리한 도끼로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가족에게 있을 고통을 미리 없애준다며(‘닥터 지바고’).

팔르이흐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백제 장수 계백의 이야기가 떠오르게 한다. 나당 연합 대군 앞에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계백은 처자식이 적의 노예가 되어 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죽는 게 낫다며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황산벌로 나아갔다. 김부식이 이 이야기를 ‘삼국사기’에 실은 이래, 계백은 오랜 세월 충의로운 장수로 칭송받아왔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계백의 행위는 공포에서 기인한 것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이건 꾸며진 것이다. 충의로운 적군을 칭송하여 자기편에 본을 보이고 군주의 의리를 내세운 것은 오랜 세월 지속되어온 통치 전술이다.

최윤은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88)에서 1980년 5월의 공포를 살려내고자 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15세 소녀는 시장에서 일하는 엄마와 둘이 산다. 대학에 다니던 오빠는 한해 전 석연치 않은 사고로 죽었다. 그 뒤로 소녀는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갈까봐 무서웠다. 그날도 엄마는 몇 번이나 소녀를 떼어놓으려고 했는데, 소녀는 필사적으로 엄마의 허리를 잡고 놓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몸에 구멍이 난 채 피를 흘리며 죽었다. 소녀는 누군가에 의해 낯선 마을에 버려졌고, 두꺼비만한 딱정벌레들에게 쫓겨 동굴로 몸을 피했다. 눈만 감으면 그 괴물들이 나타났다.

남자는 공사 현장 근처에서 소녀를 발견했다. 그가 소녀에게서 느낀 감정은 공포였다. 처음에 그 공포가 분노의 감정을 일으켜 남자는 소녀를 구타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통해, 모든 의미가 비어버린 실성한 웃음을 통해, 흔적 없이 지워져버린 인격의 모든 부재를 통해, 점점 더 자세하고 깊이 있게 그녀가 겪었을지도 모르는 소문의 도시 전체를 보았다. 그가 그녀와 함께 지낸 몇 달이 바로 지옥이었고, 그녀가 사라진 다음에도 지옥은 계속되었다. 극심한 공포는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당시 권력자는 공포에 사로잡혀 군대를 투입했고, 술을 마신 군인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살육을 저질렀다. 소설 밖 역사의 상황이다. 소녀의 엄마는 아들을 잃으며, 소녀는 엄마를 잃으며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에게 소녀가 제3자 ‘그녀’가 아닌 2인칭 ‘너’가 되면서, 소녀의 체험은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졌다. 그는 소녀의 행적을 찾아다닌 오빠의 친구들이고, 또 남겨진 자들이고, 소설 밖 독자들인 우리다. 작가는 그처럼 그날의 공포감을 체험하고 공유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괴물은 우리 안에 있는 타자이다. 아무리 없애도 사라지지 않는 에일리언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괴물이 우리 자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서 지난 공포를 잊으려 해서는 안 된다. 잊어버리려 하면 할수록 그 공포는 에일리언처럼 되살아난다. 공포에서 떠오른 괴물은 그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가 잊으려 하는 우리 내면 깊은 곳의 모습을 환기하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괴물을 불러내어 대화와 화해를 시도해야 하는 계절이다.

괴물은 우리 안에 있는 타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괴물이 우리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공포를 잊으려 해서는 안 된다. 잊으려 할 수록 그 공포는 되살아난다. 공포는 우리 내면 깊은 곳의 모습을 환기하는 것이다.

<이승수 경희대 연구교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