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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숲속의 글마당

주왕산에서 부피의 산을 가다/술산 강영환

by 지리산 마실 2008. 4. 23.

강영환 시인의 '시가 있는 산' <9> 주왕산에서 부피의 산을 가다
높이의 산을 가지 않고 나무와 풀과 나와의 관계를 셈해보라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주왕산 제1폭포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솟은 암벽이 학소대로 계곡 어디선가 학이 날아 올 것만 같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주왕산은 그 수려함으로 등산의 산이기보다는 관광의 산이다. 720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에는 깊은 협곡에다 많은 폭포, 웅장한 바위군으로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그 산에는 주왕과 관련된 많은 전설들이 있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굳이 산을 오른다면 금은광이 쪽이나 절골을 타고 가메봉으로 올라 대전사로 내려오면 산행과 관광을 한꺼번에 즐길 수가 있다.

핏빛 전설을 간직한 수달래는 일러서 아직 피지 않았고 대전사 경내 벚꽃은 이제 다 졌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세월을 잊기 위해 산에 들었다가 세월의 빠름만 되새기고 다시 하산하게 된 것을 어찌할까?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세속인의 삶이 아닌가. 계곡과 폭포를 순례하다가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감미로운 하산을 감행해야 했다.

젊었을 때는 무조건 산 정상을 밟아야 속이 후련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실패로 규정하고 뒷날에 다시 가서 밟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때는 꼭대기를 산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산이 넓어졌다. 등성이를 흐르는 선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여름까지 계곡에 쌓여있는 낙엽더미에서 의미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나무와 야생화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색을 즐기게 되었다. 체력이 떨어진 이유도 있겠지만 산을 그렇게 바쁘게 달려갈 것은 무엇인가라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구경도 하고 음미도 하고 그러면서 가는 산. 그것은 부피로 느끼는 산일 것이다.

지나가다 만나는 나무나 풀 한 포기 이름도 모른 채 산을 간다면 그것은 단지 등산이 아닌 운동일뿐 아니겠는가? 이름을 모른다는 것은 그 사물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그 나무나 풀을 훼손하더라도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나무와 풀과 나와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산을 가면서 그저 길만 보거나 산정상만 딛고 와서는 올바른 산행이라고 할 수 없다. 나와 사물과의 교감을 통하여 서로의 존귀함을 느끼고 거기에서 존재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길 가에 앉은 바위에게도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

칠선골 묵은 계곡 시커멓게

세월의 외투를 껴입고 누워있는 영원한 노숙자

오래된 바위에게 이름이 없다는 건 이상하다

풀에도, 나무에도, 산봉우리에도 이름이 있듯이

작은 바위에도 이름이 있었으면

밤길에서도 길을 잃지 않았을 터인데

존재의 무거운 몸을 알 수 있었을 터인데


소설가 요산 김정한 선생은 작품에 이름 모를 나무, 이름 모를 들꽃이라고 쓰면 야단을 치셨다. 어찌 나무나 꽃에 이름 없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작가 정신에 합당하지 못하다. 그 이름을 찾아 주고 불러 주는 것이 작가의 도리가 아닌가. 그랬다. 당신 스스로 식물도감을 만들어 소설을 쓸 때 사용하였다. 나무나 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서는 산은 더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산과 더 친근해지며 산의 체온과 숨소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산악회마다 누적 표고를 셈하며 얼마의 높이에 도달했는가를 으뜸으로 삼는다. 산을 보고 숲을 보지 못하면 그것은 올바른 산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산행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나무를 보는 것은 곧 바로 나 자신을 만나는 일이다. 급하게 산을 오르면서 지금껏 높이의 산만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 숲속에는 무엇이 살고 무슨 이야기가 있고 무슨 느낌이 드는지 셈하며 천천히 걷는 것, 그것은 바로 풍요롭고 행복한 산행이 될 것이다. 무엇을 만나고 돌아 왔는가. 높이로만 산을 가지 않고 부피로 느끼면서 산을 가고 싶은 이유이며 산행의 화두다.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