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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文化 이야기

'만들어진 고대', 역사는 창조하는 것

역사는 창조하는 것? - 『만들어진 고대』
□  발해는 '누구의 것'일까?

올해부터 시작하는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각종 학교의 교과서가 일부 개정되고 교육내용도 조금씩 달라졌다. 새롭게 쓰이고 있는 교과서를 살펴보러 서울의 한 대형서점을 찾았다. 가장 관심 있게 본 과목 중 하나는 '국사(國史)'. 제6차 교육과정에서 쓰이던 교과서와 비교해보아도 외형부터 확 바뀌었다. 상하(上下)로 나뉘어 있던 것을 한 권으로 합쳤고 내지(內紙)도 고급스럽다. 요즘 청소년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돌려세우려 애쓴 흔적일까? 컬러화보와 산뜻한 편집방식으로 절로 공부하고픈 마음이 들게 만든다.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외형뿐만 아니라 내용도 변화가 생겼다. 일단은 서술체계가 다르다. 이전 국사교과서는 편년체(編年體) 서술방식을 통해 선사시대-고대사회-중세사회-근대사회를 큰 단원으로 삼고 각 단원마다 그 시대의 모든 것을 완결적으로 다루었으나, 제7차 교육과정으로 새로 등장한 교과서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생활을 큰 단원으로 삼고 각 영역에서 역사의 흐름을 소개하는 방식이다. 즉 〈제3장 통치구조와 정치활동〉에서는 고대부터 근세까지의 정치적 변화를 일괄하고 있고, 〈제4장 경제구조와 경제생활〉에서는 고대이래 경제상황의 변동을 서술하고 있다.

그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지는 못했으나 일단 눈에 띄는 것은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이다. 매 단원에 '남북국 시대의 정치변화', '남북국 시대의 사회' 라는 식으로 '남북국(南北國)'을 새로이 등장시켰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하던 대략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초까지를 이제는 남북국 시대라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일부 역사학자와 그들의 저서에서 거론되기는 했지만 학계에서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들어왔는데, 국정교과서에 명시한 것을 보니 놀라웠다.

그럼 여기서 중국의 교과서를 살펴보자. 1993년 중화인민공화국 인민교육출판역사실에서 편저된 초급중학 교과서 『중국역사』 2권 24쪽에는 '당조 후기 강역과 변강(邊疆) 각족의 분포'라는 지도(地圖)아래 회흘, 갈라족, 토번, 남조, 흑수말갈, 발해 등을 모두 '변강 각족'에 포함시키고 있다. 중국 역시 국정교과서 체제이므로 발해에 대한 중국정부와 학계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처럼 '당 나라 시대의 지방정권'이다. 한편 구소련의 역사 연구에서는 발해의 문화적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시베리아 역사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있다. (『기억과 역사의 투쟁』(2002년 「당대비평」 특별호, 삼인) "'단일민족'의 역사와 '다민족'의 역사"에서 인용)

여기서 문제는 시작된다. 대체 발해는 중국 것(?)일까, 러시아 것일까, 아니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혹은 통일된 한국의 것일까. 발해가 천년 세월이라는 비교적 오래 전에 존재했던 나라이고, 과거 발해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영역이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커다란 영토분쟁이라도 일어날 판이다. 혹시나 아나? 중국이 만약 심각한 소수민족 분열상태에 빠지고 한국에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권이 등장했을 때, 또 그곳에서 혹시 엄청난 유전(油田)이라도 발견된다면 불난 집에 기름 끼얹듯 '옛 만주 땅을 되찾자'는 여론이 들고일어나 갖가지 역사적 근거를 대며 영유권을 주장하게 될지도(물론 이것은 황당한 상상일 뿐이지만, 수 천년 전 조상들이 머물렀던 땅을 이제와 되찾아야 한다며 전쟁까지 해대는 국제사회니….).

□ 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경향성

발해와 신라가 공존하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 명명한 것은 발해든 신라든 우리 민족의 뿌리이므로 이 두 나라를 후세(後世)인 우리들이 편의상 남국(南國)과 북국(北國)으로 구분하여 부르자는 것이다. 단순히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는데 그 기저에는 '원래 한 나라가 되어야 했을 두 나라가 갈라져 있었다'는 의미, 나아가 일종의 아쉬움까지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발해의 의미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고려의 건국을 "새로운 통일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등학교 『국사』, 70쪽)고 평가하고 이때부터를 '중세사회'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도대체 무엇을 통일했다는 말일까? 국사 교과서 73페이지에는 고려에 건국에 "민족의 재통일"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그 위상을 정의한다. '민족'을 재통일하였다…, 그렇다면 고려가 통일한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는 한 민족인가? 무엇을 근거로 이들을 한 민족이라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재통일'이라면 원래 하나였던 것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는 의미인데, 그 '원래 하나였던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발해-신라를 남북국 시대라 한다면 '하나였던 시대'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국사』에 의하면 '고조선'밖에 남지 않는다. 결국 고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이며, 이 나라가 멸망한 후 천년 이상 흩어져 서로 싸우기도 하며 살던 우리 민족은 고려에 이르러 비로소 재통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과연 고조선을 무슨 근거로 우리 민족이 세운 최초의 '단일 국가'라 부를 수 있는가? 고조선 사람들을 '우리 민족'이라고 할 만한 어떤 확실한 기준이나 근거도 없거니와, 삼국유사 등 몇 가지 사료에 나타난 설화나 소개를 제외하고는 고조선을 한국 역사의 출발점으로 되는 고대국가로 삼을만한 객관적 설명 역시 빈약하다.

자, 그럼 지금까지의 논의 몇 가지를 하나의 창으로 겹쳐보자. 위의 짧은 논의를 통해서도 우리는 일정한 '경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단일 민족국가'를 이상형(理想型)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보았듯 발해와 신라를 남북국 시대라 하는 것도 단일 국가라는 관념적 지향점을 마음속에 상정해 놓고, 이렇게 하나가 되었어야 할 나라가 둘로 갈라져 있었으니 하나는 남국, 다른 하나는 북국으로 분류하여 부르자는 의미다. 또한 고구려?백제?신라를 삼국(三國)이라 부르는 것도 "이 나라들은 원래 한 나라인데 갈라져 살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발해와 신라가 활발한 교류를 했다거나 한 민족이라는 동류의식이 강했다면 모르겠으되 사실(史實)은 그러하지 않았으며,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전쟁과 교역 등 빈번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것은 사실이나 그러한 관계라면 진(晉), 위, 송, 수, 당과도 멀지 않았는데 굳이 세 나라만을 묶어 특별히 '삼국'이라 칭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경향성은 현재의 남북한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의 영토를 우리 민족의 근거지로 삼고, 이것을 중심으로 '이 땅 위에 살았던 사람들'은 우리 민족으로 간주하여 '우리 역사'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성은 "현재의 이상을 과거에 투영하여 해석하려는"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지극히 현대에 이르러서야 형성되기 시작한 '민족국가'에 대한 인식, 심지어 남북통일에 대한 바램을 과거에 이입하여 이 땅에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마치 그러한 이상과 지향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그러한 관점아래 사실을 추출?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국사』에는 '우리' 혹은 '우리나라'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물론 '대한민국'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또한 과거의 어느 특정 왕조(王朝)나 국가를 지칭하는 말도 아닐 것이다. '우리', '우리나라' 는 '상상 속의 우리', '상상 속의 국가'다. 한번도 이뤄 본 적이 없는 단일민족국가, 미래의 국가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역사의 구석구석에 대입시켜 '그렇게 되자'를 음양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정통성(正統性)'이라는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 순결주의를 듬뿍 느끼게 하는, 어찌 보면 섬뜩한 용어를 주저 없이 사용하면서 말이다.

앞에서 잠깐 제기했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정말 발해는 '누구의 것'일까? 발해사는 중국사, 한국사, 러시아사 중 어느 귀퉁이에 포함시켜야 할까? 이러한 질문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과거에 존재했던 어느 국가(집단)의 역사를 현존하는 특정 국가의 역사에 귀속시켜 그것을 마치 소유권(所有權)처럼 다루어도 괜찮은 것인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발해사가 중국사인지, 한국사인지, 러시아사인지 어떻게 검증할 수 있으며, 설령 그것을 검증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만주벌판 말달리며 호랑이 때려잡던 민족의 후손이면 자긍심이 살고, 군주가 감히 황제를 칭하지 못하고 대국에 조공(租貢)하며 살던 민족의 후손이라면 지금도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이제부터 소개할 책 『만들어진 고대』는 이러한 '역사콤플렉스'를 일깨워 주는 내용이 많다.

□ 과거를 배타적으로 점유하려는 투쟁

『만들어진 고대』를 쓴 이성시(李成市) 교수는 재일한국인 2세이다. 고대 동아시아사와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였고 '오늘의 필요에 따라 과거의 역사를 끌어오는 행위의 범죄성(?)을 밝히는데 힘을 쏟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그는 고대사 서술에 있어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를 "고대 속에 현재의 욕망을 매개 없이 투영하는" 오류라고 꼬집는다. 한국에 소개된 그의 저서로는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청년사)이 있고, 『기억과 역사의 투쟁』(계간 「당대비평」 2002년 특별호, 삼인)에 '한?일 역사교과서의 고대사 서술을 둘러싸고'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한?일 역사교과서의 고대사 서술을 둘러싸고'는 뒤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그의 글은 전문적인 내용이 많지만 대체로 쉽게 쓰여있어 일반인도 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만들어진 고대』는 특히 번역이 매끄럽고 광개토왕비, 발해사 문제 등 우리에게 친숙한 주제가 포함되어 있어 더욱 쉽게 손에 쥘 수 있다.

먼저 살펴볼 부분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 주지하다시피 임나일본부설은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에 진출하여 그곳을 경영할 통치기구로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학설이 가장 힘을 얻었던 때는 1883년 광개토왕비의 묵본(墨本 ; 탁본의 한 종류로, 글자의 테두리를 딴 후 그 안을 묵으로 채워 넣는 방식)이 일본에 입수되었을 때인데, 당시 일본 학계는 비문 중 일부를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신라를 쳐부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의 유력한 근거로 삼았다. 나중에야 이 비문 해석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어 임나일본부설은 지금은 일본에서도 소수의견으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이성시 교수는 광개토왕비문을 해석해 임나일본부설의 진위여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것이 유포된 '배경'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그는 20세기 초반 일본 사학계의 제일인자였던 시라토리 구라카키(白鳥庫吉)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시라토리는 광개토왕비를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 그리고 이를 억누르려는 고구려와의 대립으로 해석하면서 자신이 지금 살고 있던 시대와 동일선상에 놓는다.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 이것을 억누르려는 청?러시아로 대비시키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타당성을 역설한다. 즉 1500년 전의 텍스트를 엉뚱하게도 20세기 초반의 상황으로 끌어들여, 철저히 현대 일본인의 시각으로 자의(恣意)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발해사 문제.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 교수는 발해를 둘러싼 남북한, 중국 등의 입장을 각각 살펴본다. 고찰을 통해 저자는 북한이 발해를 조선사의 일부로 간주한 것은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즉 북부에서 발흥한 국가에서 정통적인 계보를 찾아내려는 시도"라고 이야기한다. 또 남한이 기존에 통일신라로 불리던 나라의 '통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뒤집으면서 남북국 시대라 명명하고, 이렇게 남북한이 한 목소리로 발해를 한민족의 국가로 간주하게 된 것은 "오늘날의 분단상황 극복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신라?발해 병립시대에 투영하여 동일 민족이 남북으로 병립해 있는 부자연스러움과 불완전함을 환기시키고 통합에의 전망을 열어보려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나아가 발해를 당대 소수민족인 말갈인의 지방정권이라 주장하는 중국 측의 입장에 대해서도 "오늘날 쉰이 넘는 여러 민족의 단결을 도모하고, 또 그 위에 10퍼센트도 되지 않는 소수 민족이 차지하는 전국토의 60퍼센트 지역을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이 되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 영토로서 자리 매김 하려는 현실적 과제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하면서, "다민족 국가의 현상을 과거에 투영하여 해석하는 원근법적 도립(倒立)"이라고 비판하다.

또한 이 교수는 남북한의 역사학계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발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 주요 구성원이었던 말갈족의 위상을 극도로 낮게 평가한다든지, 역으로 중국이 현재 소수민족으로 자리하고 있는 조선족을 국가 영역 안에 포함시키기 위해 한국사 범주에 포함되는 고구려의 흔적을 애써 지워버리려 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종합하여 저자는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공통성'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동아시아 나라들 사이에는 현재를 과거에 투영하여 과거를 배타적으로 점유하려고 하는 표상을 둘러싼 투쟁이 전재되고 있으며, 상이한 두 이야기가 서로 부딪치는 가운데 두 이야기가 서로 강화되어 가는 관계를 간파할 수 있다."(27쪽)

□ 역사교육의 목적은 국민의식의 육성에 있다?

이렇게 '배타적으로 점유하려고 하는 표상'의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광개토왕비를 든다. 1,500여 년 동안 비바람 견디며 홀로 서있던 광개토왕비는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그 웅장한 모습과 역사적 가치를 세상에 드러낸다. 그러나 바라보는 비석은 하나로되 이것을 해석하는 시각은 제각각 달랐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여기에 새겨져 있는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고대 일본의 대륙진출 추이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고 탄성을 터트렸고, 현재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광개토왕을 '대왕'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이 비석을 "고구려인 기상을 느낄 수 있는 위대한 기념비"라고 칭송한다. 일본은 20세기 초반 30톤이 넘는 이 비석을 도쿄로 가져올 계획을 세운 바 있는데, 남북한 역시 가져오고 싶은 마음은 그에 못지 않을 테지만 여건상 복제품을 만들어 조선중앙역사박물관(평양), 독립기념관(천안) 등에 전시하고 있다. 그 의도에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떻게든 광개토왕비를 국민교육의 한 소재로 활용하고 싶은 것이다.

저자는 "고구려 멸망 이후 1,200여 년 동안 주목받은 적이 결코 없었던" 광개토왕비가 "19세기 말에 '발견'되자마자 역사 저편에서 홀연히 소생"한 사실에 먼저 주목하며, 차분히 광개토왕비의 이모저모를 뜯어본다. 우리가 여기서 이러한 저자에게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동안 주요 논쟁사항이 되었던 텍스트의 해석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광개토왕비를 둘러싼 한일역사학계의 대립은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委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는 해독불능)이라는 32자의 해석에 집중되어 있었다. 앞서 보았듯 일본학계는 이것을 "백제?신라는 본디 속민이었으므로 원래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는 신묘년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제?□□?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일본의 군대가 한반도에 진출한 증거로 삼는다. 이렇게 정석화되어가던 해석에 도전장을 던진 사람은 일제시대 역사학자였던 정인보(鄭寅普). 그는 32자중 비어있는 자구를 보충하여 "그리하여 왜는 일찍이 신묘년에 [고구려에 가서 침범하고] [고구려도 또] 바다를 건너 [왜를] 무찌르고, 백제는 [왜와] 내통하여 신라를 침범했다. [태왕은] 신민(인 백제와 신라가 왜 이런 일을 하는가)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새롭게 해석했다. 정인보의 해석은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金錫亨)과 박시형(朴時亨)에게 계승되었고, 이들은 대체로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왔으므로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왜를 쳐부수었다"는 데 의견을 일치하여 고구려 우위로 정세를 분석하려 한다. 이러한 시각은 남한에도 이어져 "광개토왕비문은 고대에 왜, 즉 일본에 대한 한민족의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한 텍스트"로 정론화된다.

저자는 이러한 논쟁의 어느 한쪽에 기울기 전에, 광개토왕비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세워진 것인지' 그 건립배경에 관심을 갖는다. 즉 현대 한국과 일본인의 입장에서 무리하게 텍스트를 해석하려고 애쓸게 아니라 '고구려인의 시각으로' 되돌아가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비문을 쓴 사람의 의도는 무엇이며, 광개토왕비가 향하고 있는 '독자(讀者)'의 실체를 밝히는데 주력한다. 사건을 풀어나가는 단서로 저자는 광개토왕비가 왕의 업적을 칭송하는 단순한 현창비(顯彰碑)가 아니라 점을 포착한다. 이어 "비석은 어디까지나 고구려 독자의 제도인 수묘역(守墓役 ; 특정한 사람들에게 왕의 무덤을 지키도록 하는 의무) 체제에 관련된 법령 선포의 매체"라고 강조한다. 고구려 정세를 종합적으로 고찰하면서, 당시 고구려에는 "왕릉의 수묘인을 전매하거나 제멋대로 파는 부유한 자가 출현하는 중대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밝히고, 따라서 광개토왕 사후 세워진 이 커다란 비석은 "수묘역을 유지보존하기 위한 법령선포의 매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비석에 새겨진 텍스트의 주요한 방향은, 왕의 위업을 칭송하는 한편 앞으로 닥쳐올지 모르는 가상의 적에 대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이를 위해 왕의 권위를 세울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비에 새겨진 왜(倭)라는 표현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왜를 일본으로 등치시키는 단순한 대입법을 벗어나, 왜를 "적과 자기편, 외부와 내부라는 차이를 명확하게 하여 비문의 독자를 질서로의 충동으로 휘모는 장치"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왜는 구체적인 실체라기보다는 "광개토왕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는 트릭스터(trickster ; 허구적 장치)"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강조하였듯 저자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문제가 아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왕릉을 둘러싼 여러 제도가 소멸함과 동시에 비문의 독자를 잃은" 비석이 그로부터 약 1,200년 후 "비문의 새로운 독자"를 만나게 된 것이 이 책을 쓴 이성시 교수가 천착(穿鑿)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근대 일본인들이 비문을 베낀 묵본을 입수하면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앞서 재빨리 자기의 문화적 콘텍스트에 끌어들여 비문을 해독하고 거기에서 근대와 아주 비슷한 국제 정세를 읽어 내었다"면서 "어느새 비문의 '왜'는 아무런 의문 없이 일본으로 읽혀져 고구려의 텍스트는 근대 일본의 텍스트로 커다란 전환을 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또 "이렇게 해서 근대의 국민을 독자로 가진 비문은 이윽고 한국인 독자도 획득함으로써 근대 한국의 텍스트로서, 고구려 텍스트로서의 비문에는 없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였다"고 꼬집는다. 정리하자면 '과거의 왜 = 지금의 일본'이라는 등식을 상정하면서, 이 비문의 해석에 따라 현재의 국가 자존심이 좌우된다고 생각하면서 몇 글자의 문구해석에만 집착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을 헤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아시아의 역사가들은 아직까지도 전적으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신들의 사회와 그 성장에 전념하여 국가라는 틀을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라는 유럽 역사가들의 비판을 곁들이면서, "역사의 주요 목적의 하나가 국민의식의 육성에 있다고 하는, 19세기에 강했던 신념의 흔적 탓"이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근대의 컨텍스트에 끌어당겨진 고대를 고대의 컨텍스트에서 다시 읽는 작업을 조속히 하여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다.

□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의 문제점

이쯤하면 알 수 있겠지만 저자는 한국, 일본, 중국 가운데 어느 특정국가의 고대 역사관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고대를 읽어내려고 하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역사 인식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명제를 모든 나라에 공평하게 갖다 대고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고 있는 소재들이 주로 한국과 일본에만 관련되었다는 점인데, 현재 중국의 고대역사 인식 상에 나타나는 오류도 좀 더 상세히 사례별로 알 수 있었으면 한다. 

혹자는 이 책을 평하면서 "비판은 있으되 대안은 없다"고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즉 고대사 인식에 나타나는 잘못을 지적한 것은 명쾌하고 신선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정확한 해답은 무엇인지 제시해주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저자를 대신해 대답한다면 (이성시 교수의 뜻을 곡해하는 무례일수도 있지만) "바로 그것이 저자가 노리는 것"이다. 이 책은 시종일관 '관점과 자세의 문제'를 중심으로 잡고 있다. 여기에서 한치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래서 섣불리 그 반경을 벗어나 무언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주려는 오만을 범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답이 있다면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는 사실(史實)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곧 답"이라는 것이다. 고대인의 흔적을 현대인의 시각에서 꼭 어떻게 봐야 하는지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절대화하려 시도할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불리하다 하여 속 상해 할 필요가 없고, 또 유리한 부분이 있다하여 그것을 민족정기, 민족적 자존으로 연결시킬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고대인은 고대인일 뿐이니까.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역사를 도구로 삼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버리고 '인간의 입장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이해할 것을 저자는 조용히 주문한다.

위에서 소개한 임나일본부설, 발해사의 귀속문제, 광개토왕비 해석 이외에도 저자는, 일본이 전통회화양식이라 자랑하는 일본화(日本畵)가 사실은 근대에 서양화가 밀려들자 "대항 관계 속에 자각된 것"이라면서, 그런데도 이러한 일본화의 성립 과정을 잊고 "마치 고대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온 전통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고 꼬집는 등 다양한 사례를 들어 근?현대의 필요성 속에 고대를 끌어당기는 문제에 메스를 대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모두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하고 독자들의 일독(一讀)을 권하며, 끝으로 이성시 교수가 『기억과 역사의 투쟁』에 발표한 논문 「한?일 역사교과서의 고대사 서술을 둘러싸고」의 내용을 소개할까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글은 한?일 역사교과서의 고대사 부분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대상으로 삼은 것은 지난해 논란을 빚었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주축이 되어 쓴 『새 역사 교과서』와 대한민국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발행한 『국사』이다. 이 교수는 이 둘을 공평(?)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일본 『새 역사 교과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교수가 지적한 『국사』의 고대사 서술에 있어 문제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교수는 크게 네 가지를 문제삼고 있는데, 첫째로 지적한 것은 "민족을 초역사적?자연적 실재로 전제하는 바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단일 민족으로서 국가적 영위를 유지해 왔다" "우리 민족은 본래 한 핏줄로 이어진 단일 민족으로서 단일한 국가를 이루고 단일한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는 등의 표현을 문제삼으며 『국사』에는 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관점은 전혀 없이 고구려?백제?신라?가야?발해 등을 모두 동일민족의 국가로 취급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발해의 건국으로 만주는 계속 우리 민족의 생활무대가 되었다"는 『국사』의 기술을 이야기하며 이것은 "복잡한 역사상의 민족과 국가 문제에 대한 이해를 쓸데없이 혼란시키는 것밖에는 안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한국에서는 발해를 국사에 귀속시키면서 '만주(滿洲)'를 중국동북지방에 대한 지역명칭으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사례는 교과서 외에도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 벌판"하는 식의 대중가요 가사, "진정 나에겐 단 한가지 내가 소망하는 게 있어,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라는 통일 염원을 담은 노래에 '발해를 꿈꾸며'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만주를 과거의 우리 땅, 그리고 은근히 찾아야 할 땅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을까.
이 교수는 단일민족국가를 이상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우리 『국사』교과서의 문제를 지적하며 역사학자 홉스봄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세계 180여 개 국가 중에 자국 시민이 어떠한 실질적인 의미에서도 단일한 종족적 또는 언어적 집단과 일치한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국가는 아마도 12개도 되지 않는 세계에서, 이러한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내셔널리즘은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대단히 자기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둘째로 지적한 것은 "건국 신화를 다루는 방식"이다. 『국사』는 고조선과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건국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건국신화를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을 건국이야기로 인정, 여과 없이 소개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로는 "역사의 전개나 문화의 형성을 논할 때 주변 국가들과 관련을 지으면서 논하는 것이 극히 적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경시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역사학계의 일종의 콤플렉스를 잘 꼬집어 낸 부분이다. 우리 역사교육은 과거 중국과의 관계를 이야기 할 때 '대등함' 혹은 '자주성' '독자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고대 국가들이 주로 책봉이나 조공의 관계로 엮여 군신(君臣) 주종(主從)의 관계를 맺는 것은 너무도 빈번하고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우리는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피하면서 이러한 것을 언급하는 것은 마치 커다란 자존심의 상처라도 입는 것처럼 취급한다. 누차 강조했듯 '과거를 현재와 연동하여 생각하는 태도' 때문이다. 또 『국사』는 곳곳에 '문화적 독자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독자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거의 서술하고 있지 않다"고 이 교수는 지적한다. 주변 여러 지역과의 관계를 폭넓게 서술하지 않고 한반도만 뚝 떼어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성'에 대한 해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 전해 주었다", "가르쳐 주었다"는 내용도 평면적인 서술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조언한다. 넷째로는 이미 언급된 내용이긴 하지만 "고대 국제 관계 서술에 보이는 단순화의 문제"이다. 고대의 국제관계를 논할 때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중국 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화이(華夷)질서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고 복잡하게 전개된 나라들 간의 관계를 도식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고 비판하고 있다.

□ '인간의 역사'를 만들기를 소망하며

지난해 일본의 『새 역사 교과서』문제가 있을 때, 한국은 들끓었다. 물론 일본의 역사왜곡은 바로 잡아야 하며, 없는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는 역사를 감추는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국정교과서'라는 틀조차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지 않은가. 또 그 내용은 온전히 합당하다 할 수 있는가. 일본의 교과서 문제로 한차례 홍역을 겪고 나서야 한?일 양국은 정상회담을 통해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할 것을 합의했고,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바로 얼마 전 그 첫 회의를 서울에서 가졌다. 위원회의 성과를 회의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나는 이것을 구성하였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하며, 아쉬운 점은 이것을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 - 과거에 관계가 많았던 중국, 베트남, 인도 등으로 확대 구성하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유럽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학계를 중심으로 유럽 역사 공동연구 작업을 진행해왔으며, 지난 1992년 그 성과물의 하나로 『Histoire de l’Europe』을 내놓았다. (한국에는 『새 유럽의 역사』(까치)로 번역 출판되었다) 12개국의 역사학자들이 4년 남짓 함께 일하면서 토론과 논쟁 끝에 만들어낸 이 책은 "역사 교과서의 유럽통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교과서로 채택하여 활용하고 있는 학교도 있다. 세계의 석학들이 인종과 국가, 빈부의 차이에 상관없이 한 자리에 모여 인류의 역사를 함께 조명해 보고 공동의 연구성과를 내올 날 또한 기대해 본다.

지금까지 소개한 책 『만들어진 고대』의 서문에 실린 저자의 말 중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사람, 물건, 정보가 국가를 넘어 지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다. 근대 국민 국가가 성립되고 비로소 의식화된 국경이나 국민 문화에서 이제 슬슬 해방되어 조금 더 미래를 시야에 두고 역사나 문화의 연구가 기도되어도 좋은 것이 아닐까? '세계화 시대'는 바로 그와 같은 역사 연구나 문화 연구를 요청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 곽대중(본지 편집위원)
* 이 글은 시대정신 [2002 05-06월호] 제20호에 수록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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