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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文化 이야기

문화재 이야기<19>이차돈 순교비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19) 이차돈순교비

신라는 국사시간에 배운 대로, 법흥왕 14년(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했습니다.

▲ 이차돈 순교비. 처형 장면을 제외한 나머지 5면에는 각각 7개의 세로줄에 25글자씩을 새겨넣었다. 위쪽에 원형의 자루가 남아있어 당초에는 지붕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신라의 불교 공인이 ‘대사건’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중국을 거쳐 인도에서 들어온 이 종교가 훗날 민심을 한데 모아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겠지요.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이차돈의 순교 설화를 담은 높이 106㎝의 아담한 비석이 하나 전시되고 있습니다. 헌강왕 10년(818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6각형 조각입니다.

‘스토리를 새긴 순교비’란 전례가 없습니다. 불상이나 석탑처럼 전통적인 양식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식 표현을 빌리자면, 조각가는 자신의 조형세계를 그야말로 마음껏 펼쳐놓을 수 있었겠지요.

한 면에는 순교 설화가 전하고 있는 대로, 이차돈이 처형되는 순간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는 젖빛 피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땅이 울리는 모습이 돋을새김되어 있습니다. 조각가는 이런 장면을 비면의 아래쪽에 집중배치했는데, 전통 조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도가 참신함을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 다섯 면은 둘러가며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 설화의 내용을 글자로 새겨놓았습니다.

순교비는 경주 북쪽에 있는 소금강산의 백률사(栢栗寺)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옛 이름이 자추사(刺楸寺)인 백률사는 순교 당시 망나니의 칼에 잘려나간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자리라고 설화는 기록하고 있지요.

경주박물관에는 1914년 3월에 찍은 사진이 남아있는데, 처형 장면을 조각한 비면이 하늘을 향한 채 순교비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입니다. 방치되는 동안 순교비의 지붕돌도 사라져 여태껏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순교비는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의 공인을 설화의 형태로 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이 설화로 각색되어 전승되는데 얼마 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를 짐작할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지요.

실제로 이차돈의 순교 설화는 순교비 말고도 몇가지가 더 전합니다.‘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도리사 아도화상사적기’ 등입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법흥왕이 토착신앙을 고수하려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국가적 이념으로 정착시키려 하는 과정에서 이차돈을 희생시켰고, 그 결과 불교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으로 압축됩니다.

특히 최광식 고려대 교수는 법흥왕과 뜻을 같이하던 이차돈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직접적인 이유로 ‘해동고승전’ 등에 등장하는 천경림(天鏡林)의 존재에 주목했습니다. 천경림은 당시 사회적으로 널리 일반화되어 있었던 토착신앙의 성스러운 공간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이차돈이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사를 일으키려 했으니 갈등과 마찰은 불가피했다는 것입니다.

법흥왕은 불교의 단계적 정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반면 이차돈은 처음부터 토착신앙의 본거지에 사찰을 지음으로써 일거에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하려 했다는 뜻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염촉(厭觸)이라고도 불린 이차돈은 순교 당시 22세였습니다. 순교비는 죽음으로 신라사회를 바꾸어놓은 젊은 ‘혁명가’를 조명하는 데 모자람이 없을 만큼 역사성과 조형미를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dcsuh@seoul.co.kr

기사일자 : 2007-05-17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