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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역사 속의 지리산<17>진주 청곡사 괘불

by 지리산 마실 2007. 3. 30.
역사 속의 지리산(17)진주 청곡사 괘불
한국불교에만 있는 전매특허품...조선후기 불화승 의겸 작석가모니 설법하는 장면


길이 10m, 폭 6.37m에 달하는 진주 금산 청곡사 괘불(국보 302호). 겸재 정선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선 후기 대표적 불화승 의겸이 10명의 화승과 함께 제작한 그림이다. 괘불은 당간지주(사찰내 법당인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세운 받침대)처럼 같은 불교문화권이지만 이웃 중국이나 일본 불교문화에는 없어 한국불교의 전매특허품이라 불린다.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도를 그린 이 괘불은 본존불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양 옆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화면 가득히 배치했다. 부처님의 당당하고 건장한 체구, 둥글고 원만한 얼굴은 세상을 감싸안으려는 자비심을 느끼게 한다. 청색, 하늘색, 연분홍색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복잡하고 화려한 꽃무늬와 장신구가 부처님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괘불은 원래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걸개그림을 말한다. 이때 야외에 설치되는 법단이 '야단'(野壇)인데, 괘불이 걸리는 날에는 사찰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야단법석'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지난해 7월 진주 금산면 갈전리 월아산 청곡사에 있던 괘불이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즈음 미술회화관 2층에서 1층으로 내리 걸려 관람객이 법석을 이룬 바 있다.

청곡사가 위치한 진주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왕후의 고향이다. 청곡사는 왕후의 고향에 위치한 사찰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왕실 원당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찰은 전소된다. 그러나 진주성 전투를 치르면서 목사 김시민(1554∼1592)의 통솔로 관민이 단결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다. 그 충절의 공적인지 청곡사는 전화의 피해를 빠르게 복구하고 17세기 들어 새롭게 중건된다. 이러한 청곡사의 역사적 배경은 1722년 괘불 조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청곡사 괘불'은 총 131인의 시주로 조성되었다. 시주에 참여한 인원을 기록한 시주질에는 승려 93명, 일반인 38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기입돼 있어 당시 괘불의 성대함을 느끼게 한다.

그럼, 길이 10m, 폭 6.37m에 달하는 괘불은 어떻게 보관됐을까. 청곡사 괘불을 보관하기 위한 나무함인 괘불함은 1722년 괘불과 함께 만들어졌다.

불화는 그림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화승이 제작했으나, 괘불함은 승려가 아닌 일반인이 제작했다. 괘불함은 나무를 전문으로 다루는 장인에게 의뢰되었다.

만들어진 시기와 제작자가 기록된 괘불함은 드문 편이다. 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보아도 나무의 휘어짐과 틀어짐이 없다. 청곡사 괘불의 화기에는 함을 만든 장인의 이름과 그가 행한 값진 공덕이 기록돼 있다. 함을 만든 장인은 서씨 성을 가진 '서선발'이며 나무를 다루는 장인이란 의미에서 유래한 호칭을 지니고 있다. 이 한 줄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를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도움말/김승희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관>

경남도민일보/박종순 기자 yard@ido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