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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큰 선비 남명 조식

by 지리산 마실 2007. 3. 20.
역사 속의 지리산(14)큰 선비 남명 조식
천왕봉 닮은 남명의 사상적 고향


‘청컨대 천 석 들이 종을 보시게 /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안 나지

나도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될 수 있을까 /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고 의연히 서 있는’

- <남명 조식이 지리산 덕산 시냇가 정자의 기둥에 쓴 시>

1555년 남명은‘단성소’를 올린다. 더 이상 썩은 정치를 묵과할 수 없었기에 조정의 폐정과 실정을 신랄하게 파헤쳤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묘사했다. 상소문은 정국을 흔들었으며 신하들의 만류가 없었다면 대죄를 면키 어려웠다. 조정의 심장부에 붓끝을 겨눴던 남명. 그의 기개는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남명은 가야산 자락에서 태어났지만 유독 지리산을 좋아했다. 58세 때까지 지리산을 10여 차례 올랐으며 61세 때는 천왕봉 아래 덕산으로 거처를 옮겨 12년 간 자신을 갈고 닦았다. 지리산은 실천적 유학자 남명의 사상적 고향이었다.‘하늘이 우는’ 혼돈의 세상에서 울지 않고 의연히 서 있는 천왕봉처럼, 그는 우뚝 서서 의연히 버팀목이 되고자 했다.

   
▲ 사진/김구연 기자
△남명의 지리산 유람


남명은 58세 때 벗들과 섬진강을 거쳐 쌍계사 방면을 유람했다. 아름다운 산수를 유람하면서 ‘아름답다’는 탄식도 했을 터이고, 경외감도 생겼을 것이다. 이는 여행을 하면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깊이 학문에 침잠했던 남명의 눈은 그런 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깊이 들여다보기를 자연스럽게 했다.

‘높은 산 큰 내를 보고 오면서 얻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유한·정여창·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비교한다면, 십 층 높은 봉우리 위에 옥 하나 올려놓고, 천 이랑 넓은 수면에 달 하나 비친 격이다. 물만 보고 산만 보다가 그 속에 살던 사람을 보고 그 세상을 보니, 산 속에서 10일 동안 품었던 좋은 생각들이 하루 사이에 언짢은 생각으로 바뀌어 버렸다. 훗날 정권을 잡는 사람이 이 길로 와 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지 모르겠다.’

남명의 유람은 산수에 남아 있는 고인의 흔적을 통해 그 인물과 그 세상을 만나는 구도여행이었다. 그는 다시 이런 관점으로 현실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높은 산을 오르면서 인간이 선한 데로 나아가기가 그처럼 어렵다는 것을 생각했고, 산을 내려오면서 인간이 악으로 나아가기가 그처럼 쉽다는 것을 생각했다.

‘처음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더니, 아래쪽으로 내려 올 때에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쏠려 내려갔다. 그러니 어찌 선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악을 따르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남명은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유두류록>이라는 유람록을 남겼다. 이 유람록에는 남명의 독특한 산수유람관이 들어 있다. 남명은 이 유람록 끝에 ‘물을 보고 산을 보고, 그리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았다. ‘간수간산 간인간세(看水看山 看人看世)’라고 썼다. 남명의 이 여덟 자 짧은 구절을 읽으면, 유람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여행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남명의 도반 천왕봉

남명은 61세 되던 해 짐을 꾸려 현 산청군 시천면 사리, 흔히 덕산이라 부르는 곳으로 들어갔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지리산 깊숙한 골짜기인 덕산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천왕봉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다.‘덕산복거’라는 시에서 그는‘천왕봉이 상제가 사는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갈고 닦는 데 철저했던 사람이 그냥 산봉우리를 바라보기 위해 들어갔을 리는 만무하다. 덕산을 찾은 두 번째 이유는 집을 한 채 짓고 산천재라고 이름지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산천재’의 산천은 <주역> 대축괘에서 따온 것이다. 대축괘의 괘사를 보면 ‘강건하고 독실하고 휘광하여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고 했다. 자신을 더 강건하고 독실하게 빛나게 갈고 닦아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덕산을 찾은 것이다.

대체로 61세가 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신의 사상이 어느 정도 정립돼 설교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남들에게 자신의 것을 가르치고 싶어한다. 그런데 남명은 가르치기보다는 자신을 더 닦고자 했다.

노인이 죽을 때까지 매일 매일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한 점, 그 자체가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 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것이 바로 몸으로 하는 공부다. 이처럼 몸으로 하는 공부는 이론을 따지기보다 깨달음을 중시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몸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없다. 남명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남명은 덕산에서 12년을 살다가 1572년 음력 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요란하지 않고 조용했다. 그러나 가끔씩 천둥처럼 세상에 울렸다. 그리고 남명은 어느덧 지리산 천왕봉이 되어 거기 그대로 있다.

도움말/최석기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경남도민일보 박종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