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02.09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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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 서른네 살 김정국(金正國·1485~1541)은 정계에서 쫓겨났다. 기묘사화로 선비들이 죽어나갈 때였다. 국왕 비서(동부승지)처럼 잘 나가는 벼슬을 지냈던 그는 시골집으로 낙향했다. 고양군 망동리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팔여거사(八餘居士)’라 불렀다. ‘팔여’는 여덟 가지가 넉넉하다는 뜻. 녹봉도 끊겼는데 ‘팔여’라고? 한 친구가 생뚱맞은 새 호의 뜻을 물었다. 은퇴한 젊은 정객(政客)은 웃으며 말했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하게 먹고,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雪)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하게 맡는다네.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 했네.”
김정국의 말을 듣고 친구는 ‘팔부족(八不足)’으로 화답한다. 그의 내공도 만만치 않다. “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도 있더군.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고, 울긋불긋한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좋은 음악 다 듣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 여기지.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 부족한 게 있다고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 일러스트 정인성기자 1008is@chosun.com
- 저자(명지대 국문학과 교수)는 우리 한문학계에서 맛깔난 글을 쓰기로 손꼽히는 ‘글쟁이 학자’다. 그는 선비를 인물별로 나열하지 않고, 문헌 구석구석을 뒤져 주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생생한 삶을 주제별로 정리했다. ‘인생과 내면’ ‘취미와 열정’ ‘글과 영혼’ ‘공부와 서책’으로 장을 나눴다.
선비라고 해서 ‘도덕군자’들만 모은 것은 아니다. 남들이 손가락질 하든 말든 자기 취미에 푹 빠진 특이한 인물들도 등장한다. 18세기 사람 김광수(金光遂·1699~1770)는 서화와 골동품을 사들여 품평하는데 일생을 걸었다. 친구들은 그의 고칠 수 없는 ‘벽(癖)’을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김광수는 자신 같은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내가 문화를 선양해 태평시대를 수놓음으로써 300년 조선의 풍속을 바꾸어 놓은 일은 먼 훗날 알아주는 자가 나타날 수 있겠지.”
저자가 훑어 내리는 선비 취재는 때로 ‘기인(奇人)’을 만나기도 한다. 안면도에 살던 토정 이지함(李之?)은 계룡산 자락에 사는 친구 서기(徐起)에게 편지를 보냈다. “요새 학문에 진척이 있으신지요? 여기는 자식 놈이 감기를 앓고 있는데, 상태가 심해 걱정입니다. 내일 조카를 데리고 탐라(耽羅)를 가려는데 동행할 뜻은 없으신지요?”
내일 제주도에 함께 가자는 내용이다. 그러나 홍대용(洪大容)의 스승 김원행(金元行)은 이 짧은 편지에서 선비의 호기와 인품을 읽어냈다. “요즘 사람은 교외에 나가는데도 반드시 날을 잡고 양식을 장만한다고 법석을 떤다. 그러고도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다. 그런데 토정선생은 자식의 중병은 염두에 두지 않을 뿐더러 천리길을 가면서 약속을 내일로 잡았다. 하룻밤 사이에 말과 식량을 어떻게 마련하겠는가. 나는 이 편지에서 그 분들의 호쾌함을 보았다.” 이지함의 편지를 받은 서기는 제주도까지 동행하고 내친 김에 중국 남부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눈 앞의 이익을 좇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친구가 가진 명품 벼루를 빼앗고 “소동파도 그런 일이 있다”며 우기는 유득공(柳得恭), 계집종을 희롱하다 아내에게 들켜 부끄러워하는 늙은 선비의 이야기를 읽으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반면 가난한 이웃과 나누기 위해 한끼에 한 홉씩 쌀을 덜어 ‘절식(節食)’을 실천했던 실학자 이익(李瀷)의 모습에선 엄격한 선비의 품격이 느껴진다. 깊은 우물에서 찬물을 길어 올려 마시는 듯하다. 정신이 번쩍 난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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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더 그리운 ‘선비정신’ 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푸른역사 김승현기자 hyeon@munhwa.com [문화일보] 중학생 때 한자 ‘매매(賣買)’를 배울 때다. ‘팔 매(賣)’와 ‘살 매(買)’가 자주 혼동을 일으켰는데 선생님께서 “가난한 선비가 살 게 뭐 있었겠어. 선비 사(士) 들어간 것이 팔 매”라고 설명, 이 단어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박혔다.
또 ‘선비는 죽일 수 있을지언정 모욕은 줄 수 없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청빈과 지조, 선비는 이를 무기로 도(道)가 있으면 세상에 나아가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후학을 가르쳤다. 그것이 조선 500년의 힘이었다.
물론 명분론과 당쟁 등 선비의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단점이 장점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선비답게 산’ 진짜 선비의 고고한 도덕과 학식은 현재의 삶에도 여전한 귀감이 된다. 특히 어지러운 정쟁, 가혹한 물질문명의 혼돈이 극심한 최근의 현실에서 더 그렇다.
선비들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애도하는 ‘자만시(自輓詩)’, 자신의 무덤 묘지명을 스스로 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등의 형식으로 유서를 미리 썼다. 정조시대 선비 남종현은 관도 사용하지 말고, 옷가지도 넣지 말고, 묏자리도 가리지 말고, 봉분도 꾸미지 말며, 오로지 ‘…말은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했고/행동은 남들이 하지 않는 것만 했으며/장례는 남들이 하지 않는 것만을 했다/남들이 그의 어짐을 말하지 않으니/내 알겠다. 그의 어리석음을’이라는 자신이 쓴 명문만을 넣어달라고 했다. 선비들은 이런 자찬묘지명 등을 통해 남의 시선을 빌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후학을 경계했다. 좀 무겁기는 하지만 극작가 버나드 쇼가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미리 쓴 촌철살인의 묘비명과 맥이 닿는다.
이같이 살면서도 죽음을 예비했던 우리나라 선비들의 다양한 일화를 인생과 내면, 취미와 열정, 글과 영혼, 공부와 서책 등 4부분으로 나눠 엮었다.
13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쓰며 사대부의 눈으로 18세기의 역사, 독서 경험을 남긴 유만주의 교훈은 아직도 유효하다. 식욕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던 이익의 철학이나 생전에는 영화를 누렸으나 사후에 역사가 평가한 김안로, 거꾸로 생전에 불우했으나 역사가 되살린 유몽의 이야기는 지식인의 처세와 관련,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또 벼슬 대신 책과 예술품 수집에 나선 김광수와 이하곤,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천민 시인 홍세태 등을 통해 선비들의 우아한 취미와 뜨거운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이규보의 편지나 박지원과 박규수의 책읽기 등을 통해 과거 선비들이 어떤 정신으로 어떻게 공부했는지 짐작케 한다.김승현기자 hyeon@munhwa.com기사 게재 일자 2007/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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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 명품 벼루 강탈한 유득공>안대회 교수 '선비답게 산다는 것'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8세기 조선지식인 사회에는 벼루 수집 열풍이 일었다. 이 분야에 가장 애착을 보인 이 중 한 명이 유득공(柳得恭. 1749-1807).
한데 이런 그에게 어느 날 탐나는 벼루가 눈에 들어왔다.
절친한 이로 이정구(李鼎九)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영ㆍ정조 시대 저명한 실학자 중 한 명인 이서구(李書九. 1754-1825)의 사촌 동생. 이정구는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한 길에 시모노세키에서 비싼 값을 쳐 주고 적간관연(赤間關硯)이라는 벼루를 사왔다. 이 벼루는 당시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명품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저 벼루를 어떻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 유득공은 이정구에게 애걸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좀체 내어 놓을 생각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삼십육계 줄행랑이었다. 얼른 벼루를 낚아채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는 달아났다.
그렇지만 못내 미안했던지 유득공은 이런 시를 이정구에게 써 주었다.
"벼루를 본 나 몹시도 갖고 싶었네 / 친구는 몹시 곤란하다는 낯빛을 보였네 / 미불(米불<초두 밑에 市>)은 옷소매에 벼루 숨겨 훔친 일 있고 / 소동파는 벼루에 침을 뱉어 가진 일 있네 / 옛사람도 그러했거늘 나야 말해 무엇하랴 / 낚아채 달아나니 걸음도 우쭐우쭐 / 이 벼루 색깔 붉어 그리도 얻기 어려운겐가? / 적간관이란 그 이름 이상타 할 게 없네."
송나라 때의 저명한 시인들인 미불과 소동파조차 탐나는 벼루는 훔쳐 얻었다 했거늘 나라고 그렇게 못할 까닭이 없다는 저 능청에 이정구라고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유득공의 벼루를 향한 욕심은 그가 사용한 실물 벼루에서 다시금 확인된다. 조선왕조 내시 출신이라는 고 이병직 소장품 중에 유득공의 벼루 1점(20.5x12.7x1.5㎝)은 지금은 그 행방이 묘연하나, 70년대 문화재관리국 조사에서 흔적이 포착된 적이 있다.
두만강 돌로 제작한 이 운지연(雲池硯) 뒷면에는 유득공이 쓴 이런 구절이 새겨져있다.
"이 두만강 돌은 쇳소리가 나고 미끄럽기는 하나 먹을 거부하지 않네. (소)동파의 풍미연(風味硯)과 동일한 제품이 아닐까? 특이하구나. 고운(古芸)."
고운은 유득공의 호.
한국한문학 전공인 안대회(46)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옛글을 읽다가 발견한 선비 특유의 모습과 흥미로운 사유의 자취를 모아 엮어" 최근에 나온 '선비답게 산다는 것'(푸른역사)에서 소개한 유득공의 모습이다.
유득공은 스승격인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뺀질이'에 가까운 면모를 농후하게 보이는데, 안 교수는 "'뺀질이' 보다는 '해학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지적한다.
희락당(希樂堂) 김안로(金安老. 1481-1537). TV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선한 사람들을 괴롭히며 권력에만 눈이 먼 악의 화신으로 묘사된 그는 대단한 서정시인이었다.
"봄바람이 복사꽃 봉우리 터뜨리는 계절 / 그네 뛰는 철이라고 비는 내려 먼지를 씻네 / 비단 신은 꽃을 스쳐 붉은 이슬에 젖어들고 / 고운 다리 버들을 헤쳐 푸른 안개 갈라놓네."
이는 그에게 장원급제를 안겨준 '그네'라는 시의 전반부다. 욕 먹을 만큼 먹은 김안로를 이제는 지옥에서 건져내야 한다고 안 교수는 역설한다.
이 외에도 안 교수의 이번 책을 통해 '나에게 부치는 편지'를 쓴 이규보, 13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흠영'이라는 일기를 쓴 유만주(兪晩柱. 1755-1788), 유득공처럼 이상한 수집벽이 있던 김광수와 장서가 이하곤, 고증학자 성해응, 천민시인 홍세태 등등 조선 선비 문화의 다양한 층위를 맛볼 수 있다.
주제의 신선함에 탄탄한 증거 제시. 하지만 이런 내용물을 포장술(편집)이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한 듯한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본문 이해에 필수적인 도판 대부분은 원색을 유지했야 했음에도 흑백으로 처리했으나 그조차 선명도가 떨어져 아쉬움을 남긴다. 302쪽. 1만2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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