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1권
■경상도/단성현
동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12리이고, 남쪽으로 같은 주 경계까지 8리이며, 서쪽으로는 같은 주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는 산음현 경계까지 21리인데, 서울과 거리는 8백 80리이다.
【건치연혁】 강성현(江城縣)은 본래 신라 궐지군(闕支郡)이다. 경덕왕이 궐성(闕城)이라 고쳤고, 고려에서는 강성현이라 고쳤다. 뒤에 군으로 승격하였고 현종이 진주에 예속시켰으며, 공민왕이 감무를 두었다. 본조 공정왕조(恭靖王朝)에는 임시로 우접한 영선(永善)의 명진현(溟珍縣)을 합쳐서 진성현(珍城縣)이라 하였는데, 세종조에 명진을 다시 거제에 예속시켰다. 단계현(丹溪縣)은 본래 신라 적촌현(赤村縣)이다. 경덕왕이 단읍(丹邑)이라 고쳐서 궐성군 속현으로 만들었고, 현종이 합주에 예속시켰으며, 공양왕이 도로 강성에 예속시켰다. 본조 세종조에 두 현 명칭을 따서 지금 명칭으로 고치고, 현감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궐지(闕支)ㆍ궐성(闕城)ㆍ강성(江城)ㆍ진성(珍城)ㆍ귀성(龜城)ㆍ적촌(赤村)ㆍ단읍(丹邑)ㆍ단계(丹溪).
【성씨】 본현 문(文)ㆍ송ㆍ여(呂)ㆍ이ㆍ조(曺), 하(河) 진주(晉州). 주(周) 초계(草溪). 김 용궁(龍宮)ㆍ김해(金海)ㆍ계성(桂城)ㆍ송림(松林). 탁(卓) 속성(續姓)이다. 단계(丹溪) 이ㆍ하ㆍ서ㆍ여(余)ㆍ사(史), 송 투화(投化)에서 온 성씨이다.
【풍속】 근검함을 숭상하고, 절의를 높인다.
【산천】 내산(來山)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지리산 현 서쪽 41리 지점에 있다. 보암산(寶巖山) 현 북쪽 37리 지점에 있다. 월명산(月明山) 현 동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집현산(集賢山)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고 진주 경계이다. 둔철산(芚鐵山) 현 북쪽 30리 지점 산음현 경계에 있다. 소괴산(消怪山) 현 서쪽 8리 지점 진주 경계에 있다. 척지산(尺旨山) 현 북쪽 50리 지점인 산음현 경계에 있다. 올율산(?栗山) 현 동쪽 22리 지점에 있다. 신안진(新安津)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곧 산음현 우탄 하류인데, 진주 소남진(召南津)을 지나서 남강(南江)이 된다. 양천(梁川)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단계천(丹溪川) 하류로서 신안진에 들어가며 단계현에 있다. 물 근원이 산음현 황산에서 나오며 양천으로 들어간다.
【토산】 철 척지산에서 산출한다. 매실ㆍ감ㆍ비자ㆍ꿀[蜂蜜]ㆍ대[竹]ㆍ차ㆍ석류ㆍ은어[銀口魚].
【성곽】 동산성(東山城) 현 북쪽 7리 지점에 있으며, 삼면이 절벽이다. 둘레는 2천 7백 95척이고, 동남쪽 백여 척은 석축으로 보수되어 있다. 성 안에 샘 하나, 못 하나가 있으며 군창이 있다.
【봉수】 입암산 봉수(笠巖山烽燧) 현 북쪽 27리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 진주 광제산(廣濟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삼가현 금성산에 응한다.
【누정】 쌍청루(雙淸樓) 객사 북쪽에 있으며, 귀감(龜鑑)이라 하기도 한다. 신안루(新安樓) 딴 이름은 강루(江樓)이다.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으며, 동쪽 돌 벼랑에 달려 있는 듯하다. 매년 여름 장마 때면 위태하던 돌이 가끔 강에 떨어진다. 옛날 강성군이던 때에 태수가 밤에 객과 기생과 함께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술을 마시는 중에 돌이 떨어져서 배에 있던 자는 모두 빠졌고, 고을의 인장도 잃었다 한다.
【학교】 향교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역원】 신안역(新安驛) 현 북쪽 16리 지점에 있다. 벽계역(碧溪驛) 단계현에 있다. 신안원(新安院) 신안역 동쪽에 있다. 송계원(松界院) 송계부곡에 있다.
『신증』 【교량】 양천교(梁川橋) 양천에 있다.
【불우】 운룡사(雲龍寺) 보암산에 있다. 율곡사(栗谷寺) 척지산에 있다. 정취사(淨趣寺) 둔철산에 있다. 청안사(靑安寺) 월명산에 있다. 봉서암(鳳棲庵) 올율산에 있다. 소괴사(消怪寺) 소괴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단계 폐현(丹溪廢縣) 현 동북쪽 28리 지점에 있으며 군창이 있다. 송계부곡(松界部曲)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문을(文乙)부곡 현 서쪽 9리 지점에 있다.
【명환】 본조 강윤(姜允)ㆍ손창(孫昌) 정사에 임하여 청렴하고 간명하여서 성종이 특별히 한 품계를 승진시켰다.
【인물】 고려 문익점(文益漸) 공민왕 때 과거에 올랐다. 정언으로써 서장관이 되어 원(元) 나라에 갔다가, 목화(木花) 종자를 구해서 돌아왔다.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더니, 3년 만에 크게 번식하였고, 씨앗 발라 내는 기구와 실 뽑는 기구는 모두 천익이 만들었다.
익점이 홍무년 중에 어미 상을 만나 곁에서 시묘하였다. 그때 왜적이 한창 성하여서 사람들이 모두 도망쳐 숨었으나, 익점은 움직이지 않고 3년을 마쳤다. 본조 태종조에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우거】 고려 허옹(許邕) 충숙왕조(忠肅王朝)에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전리판서에 이르렀다. 호는 오헌(汚軒)이며 강직한 것으로써 이름났다.
본조 윤자영(尹子濚) 율정(栗亭) 택(澤)의 현손이다. 과거에 올랐고 또 중시와 발영시에도 뽑혔다. 벼슬은 진주 목사에 이르렀다.
【효자】 고려 주경(周璟) 아비가 죽자 상례를 《가례(家禮)》와 똑같이 하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정문하고 비석을 세웠다. 허계도(許繼道) 허옹의 아들이며 벼슬이 개성 소윤(開城少尹)에 이르렀다. 홍무 계해년에 아비가 죽자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때 왜적의 침해가 한창 성하였으나, 계도는 하루도 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이 알려져서 장려하였다.
본조 천년(千年) 지극한 효성으로 어미를 섬겼다. 큰 비가 와서 가옥이 모두 침몰하였는데, 천년은 처자를 버리고 어미만 업고 피하였다. 그리하여 처자는 모두 떠밀려 가버렸다. 일이 알려져서 상으로 베를 주고 복호(復戶)하였다.
본조 나유문(羅有文) 연산조(燕山朝)에 복상제도(服喪制度)를 단기(短期)로 하는 법이 엄하였다. 그러나 유문은 어미가 죽자 홀로 예법대로 집상하였다. 몹시 애통하였으므로 인해 병이 되었는데, 죽을 무렵에 그의 아내와 영결하면서, “3년 동안 어머님께 제(祭)하는 것을 내가 살았을 때와 같이 하오.” 하였다. 아내는 그 말과 같이 하여서 비록 비와 눈이 와도 몸소 무덤에 제하여 폐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5년에 정려되었다.
【열녀】 본조 소사(召史) 16세이었는데 남편이 나무하다가 범에게 해를 당했다. 소사는 매우 슬퍼하여 뼈가 드러날 지경으로 수척하였다. 부모가 억지로 그의 뜻을 꺾으려 할까 두려워하여 항상 맹세하기를, “나에게 딴 뜻이 있으면 무슨 면목으로 시부모를 볼 것이며, 지하의 죽은 사람을 볼 것인가.” 하였다. 하루는 그의 부모가 과연 딴 곳에 시집보내려고 하였는데, 소사는 미리 알고 목매어 죽었으므로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었다. 이씨(李氏)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고 19세에 홀로 되었다. 3년 동안 매우 슬퍼하였다. 그 아들이 또 요절하였으나 시부모를 정성껏 섬겼다. 그 아비가 젊은 나이에 홀로 된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그 지조를 억지로 굽히고자 하였다. 이씨는 듣고 3일 동안 통곡하다가 집 앞에 두어 길이나 되는 깊은 못이 있었는데 스스로 빠져 죽었다. 이웃 여자가 놀라서 그의 오라비에게 알려서 구원하여 깨어났다. 그 뒤로부터 시부모 섬기기를 더욱 정성스럽게 하였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고 복호하였다. 연이(燕伊) 밤에 남편이 문 밖에서 신을 삼고, 연이는 문 안에서 삼(麻)을 매만지고 있었는데, 범이 남편을 물어가자, 연이는 왼손으로 범 꼬리를 잡고 오른손으로 범을 때렸다. 그리하여 범이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서 남편이 살아났다.
【제영】 이락무인행자성(籬落無人杏子成) 정윤의(鄭允宜)의 시에, “첫 새벽에 말을 달려 외딴 성에 들어오니, 울타리엔 사람 없고 살구 맺었다. 뻐꾸기는 왕사(王事)가 급한 줄 알지 못하고, 숲 속에서 종일토록 봄갈이만 권하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 32년 산음현(山陰縣)과 합하였다 왜구가 모두 섬멸시켰기 때문이다. 광해주 5년에 다시 두었다. 치소(治所)를 내산(來山) 밑으로 옮겼다가, 숙종 28년에 강성(江城) 옛터로 옮겼으나 영종 7년에 다시 내산으로 옮겼다.
【방면】 현내(縣內) 끝이 15리이다. 오동(梧桐) 동쪽으로 끝이 10리이다. 도산(都山)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원당(元堂)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북동(北洞) 서북쪽으로 처음이 3리, 끝이 25리이다. 생북양(生北陽) 동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채등(彩燈)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범물야(凡物也) 북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이다. 신동(新洞) 북쪽으로 끝이 40리이다.
【창고】 읍창(邑倉) ㆍ단계창(丹溪倉) 고현(古縣)에 있다.
【진도】 신안진(新安津) 동쪽으로 5리이다.
【토산】 숫돌[?石].
【사원】 도천서원(道川書院) 태종 신사년에 세웠고 정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문익점(文益漸) 자는 일신(日新)이고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공민왕 때에 서장관으로 원 나라에 가서 목화 씨를 얻어 와 우리나라에 심었다. 벼슬은 좌사의 우문관제학이었다. 본조 태종조(太宗朝) 때에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권도(權濤) 자는 정보(靜甫)이고 호는 동계(東溪)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벼슬은 대사간이었는데 이조 판서를 추증했다.
[민족문화추진회]
■경상도/단성현
동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12리이고, 남쪽으로 같은 주 경계까지 8리이며, 서쪽으로는 같은 주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는 산음현 경계까지 21리인데, 서울과 거리는 8백 80리이다.
【건치연혁】 강성현(江城縣)은 본래 신라 궐지군(闕支郡)이다. 경덕왕이 궐성(闕城)이라 고쳤고, 고려에서는 강성현이라 고쳤다. 뒤에 군으로 승격하였고 현종이 진주에 예속시켰으며, 공민왕이 감무를 두었다. 본조 공정왕조(恭靖王朝)에는 임시로 우접한 영선(永善)의 명진현(溟珍縣)을 합쳐서 진성현(珍城縣)이라 하였는데, 세종조에 명진을 다시 거제에 예속시켰다. 단계현(丹溪縣)은 본래 신라 적촌현(赤村縣)이다. 경덕왕이 단읍(丹邑)이라 고쳐서 궐성군 속현으로 만들었고, 현종이 합주에 예속시켰으며, 공양왕이 도로 강성에 예속시켰다. 본조 세종조에 두 현 명칭을 따서 지금 명칭으로 고치고, 현감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궐지(闕支)ㆍ궐성(闕城)ㆍ강성(江城)ㆍ진성(珍城)ㆍ귀성(龜城)ㆍ적촌(赤村)ㆍ단읍(丹邑)ㆍ단계(丹溪).
【성씨】 본현 문(文)ㆍ송ㆍ여(呂)ㆍ이ㆍ조(曺), 하(河) 진주(晉州). 주(周) 초계(草溪). 김 용궁(龍宮)ㆍ김해(金海)ㆍ계성(桂城)ㆍ송림(松林). 탁(卓) 속성(續姓)이다. 단계(丹溪) 이ㆍ하ㆍ서ㆍ여(余)ㆍ사(史), 송 투화(投化)에서 온 성씨이다.
【풍속】 근검함을 숭상하고, 절의를 높인다.
【산천】 내산(來山)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지리산 현 서쪽 41리 지점에 있다. 보암산(寶巖山) 현 북쪽 37리 지점에 있다. 월명산(月明山) 현 동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집현산(集賢山)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고 진주 경계이다. 둔철산(芚鐵山) 현 북쪽 30리 지점 산음현 경계에 있다. 소괴산(消怪山) 현 서쪽 8리 지점 진주 경계에 있다. 척지산(尺旨山) 현 북쪽 50리 지점인 산음현 경계에 있다. 올율산(?栗山) 현 동쪽 22리 지점에 있다. 신안진(新安津)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곧 산음현 우탄 하류인데, 진주 소남진(召南津)을 지나서 남강(南江)이 된다. 양천(梁川)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단계천(丹溪川) 하류로서 신안진에 들어가며 단계현에 있다. 물 근원이 산음현 황산에서 나오며 양천으로 들어간다.
【토산】 철 척지산에서 산출한다. 매실ㆍ감ㆍ비자ㆍ꿀[蜂蜜]ㆍ대[竹]ㆍ차ㆍ석류ㆍ은어[銀口魚].
【성곽】 동산성(東山城) 현 북쪽 7리 지점에 있으며, 삼면이 절벽이다. 둘레는 2천 7백 95척이고, 동남쪽 백여 척은 석축으로 보수되어 있다. 성 안에 샘 하나, 못 하나가 있으며 군창이 있다.
【봉수】 입암산 봉수(笠巖山烽燧) 현 북쪽 27리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 진주 광제산(廣濟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삼가현 금성산에 응한다.
【누정】 쌍청루(雙淸樓) 객사 북쪽에 있으며, 귀감(龜鑑)이라 하기도 한다. 신안루(新安樓) 딴 이름은 강루(江樓)이다.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으며, 동쪽 돌 벼랑에 달려 있는 듯하다. 매년 여름 장마 때면 위태하던 돌이 가끔 강에 떨어진다. 옛날 강성군이던 때에 태수가 밤에 객과 기생과 함께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술을 마시는 중에 돌이 떨어져서 배에 있던 자는 모두 빠졌고, 고을의 인장도 잃었다 한다.
【학교】 향교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역원】 신안역(新安驛) 현 북쪽 16리 지점에 있다. 벽계역(碧溪驛) 단계현에 있다. 신안원(新安院) 신안역 동쪽에 있다. 송계원(松界院) 송계부곡에 있다.
『신증』 【교량】 양천교(梁川橋) 양천에 있다.
【불우】 운룡사(雲龍寺) 보암산에 있다. 율곡사(栗谷寺) 척지산에 있다. 정취사(淨趣寺) 둔철산에 있다. 청안사(靑安寺) 월명산에 있다. 봉서암(鳳棲庵) 올율산에 있다. 소괴사(消怪寺) 소괴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단계 폐현(丹溪廢縣) 현 동북쪽 28리 지점에 있으며 군창이 있다. 송계부곡(松界部曲)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문을(文乙)부곡 현 서쪽 9리 지점에 있다.
【명환】 본조 강윤(姜允)ㆍ손창(孫昌) 정사에 임하여 청렴하고 간명하여서 성종이 특별히 한 품계를 승진시켰다.
【인물】 고려 문익점(文益漸) 공민왕 때 과거에 올랐다. 정언으로써 서장관이 되어 원(元) 나라에 갔다가, 목화(木花) 종자를 구해서 돌아왔다.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더니, 3년 만에 크게 번식하였고, 씨앗 발라 내는 기구와 실 뽑는 기구는 모두 천익이 만들었다.
익점이 홍무년 중에 어미 상을 만나 곁에서 시묘하였다. 그때 왜적이 한창 성하여서 사람들이 모두 도망쳐 숨었으나, 익점은 움직이지 않고 3년을 마쳤다. 본조 태종조에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우거】 고려 허옹(許邕) 충숙왕조(忠肅王朝)에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전리판서에 이르렀다. 호는 오헌(汚軒)이며 강직한 것으로써 이름났다.
본조 윤자영(尹子濚) 율정(栗亭) 택(澤)의 현손이다. 과거에 올랐고 또 중시와 발영시에도 뽑혔다. 벼슬은 진주 목사에 이르렀다.
【효자】 고려 주경(周璟) 아비가 죽자 상례를 《가례(家禮)》와 똑같이 하고 3년 동안 시묘하였다. 정문하고 비석을 세웠다. 허계도(許繼道) 허옹의 아들이며 벼슬이 개성 소윤(開城少尹)에 이르렀다. 홍무 계해년에 아비가 죽자 3년 동안 시묘하였다. 그 때 왜적의 침해가 한창 성하였으나, 계도는 하루도 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이 알려져서 장려하였다.
본조 천년(千年) 지극한 효성으로 어미를 섬겼다. 큰 비가 와서 가옥이 모두 침몰하였는데, 천년은 처자를 버리고 어미만 업고 피하였다. 그리하여 처자는 모두 떠밀려 가버렸다. 일이 알려져서 상으로 베를 주고 복호(復戶)하였다.
본조 나유문(羅有文) 연산조(燕山朝)에 복상제도(服喪制度)를 단기(短期)로 하는 법이 엄하였다. 그러나 유문은 어미가 죽자 홀로 예법대로 집상하였다. 몹시 애통하였으므로 인해 병이 되었는데, 죽을 무렵에 그의 아내와 영결하면서, “3년 동안 어머님께 제(祭)하는 것을 내가 살았을 때와 같이 하오.” 하였다. 아내는 그 말과 같이 하여서 비록 비와 눈이 와도 몸소 무덤에 제하여 폐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5년에 정려되었다.
【열녀】 본조 소사(召史) 16세이었는데 남편이 나무하다가 범에게 해를 당했다. 소사는 매우 슬퍼하여 뼈가 드러날 지경으로 수척하였다. 부모가 억지로 그의 뜻을 꺾으려 할까 두려워하여 항상 맹세하기를, “나에게 딴 뜻이 있으면 무슨 면목으로 시부모를 볼 것이며, 지하의 죽은 사람을 볼 것인가.” 하였다. 하루는 그의 부모가 과연 딴 곳에 시집보내려고 하였는데, 소사는 미리 알고 목매어 죽었으므로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었다. 이씨(李氏)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고 19세에 홀로 되었다. 3년 동안 매우 슬퍼하였다. 그 아들이 또 요절하였으나 시부모를 정성껏 섬겼다. 그 아비가 젊은 나이에 홀로 된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그 지조를 억지로 굽히고자 하였다. 이씨는 듣고 3일 동안 통곡하다가 집 앞에 두어 길이나 되는 깊은 못이 있었는데 스스로 빠져 죽었다. 이웃 여자가 놀라서 그의 오라비에게 알려서 구원하여 깨어났다. 그 뒤로부터 시부모 섬기기를 더욱 정성스럽게 하였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되고 복호하였다. 연이(燕伊) 밤에 남편이 문 밖에서 신을 삼고, 연이는 문 안에서 삼(麻)을 매만지고 있었는데, 범이 남편을 물어가자, 연이는 왼손으로 범 꼬리를 잡고 오른손으로 범을 때렸다. 그리하여 범이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서 남편이 살아났다.
【제영】 이락무인행자성(籬落無人杏子成) 정윤의(鄭允宜)의 시에, “첫 새벽에 말을 달려 외딴 성에 들어오니, 울타리엔 사람 없고 살구 맺었다. 뻐꾸기는 왕사(王事)가 급한 줄 알지 못하고, 숲 속에서 종일토록 봄갈이만 권하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 32년 산음현(山陰縣)과 합하였다 왜구가 모두 섬멸시켰기 때문이다. 광해주 5년에 다시 두었다. 치소(治所)를 내산(來山) 밑으로 옮겼다가, 숙종 28년에 강성(江城) 옛터로 옮겼으나 영종 7년에 다시 내산으로 옮겼다.
【방면】 현내(縣內) 끝이 15리이다. 오동(梧桐) 동쪽으로 끝이 10리이다. 도산(都山)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원당(元堂)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북동(北洞) 서북쪽으로 처음이 3리, 끝이 25리이다. 생북양(生北陽) 동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채등(彩燈)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범물야(凡物也) 북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이다. 신동(新洞) 북쪽으로 끝이 40리이다.
【창고】 읍창(邑倉) ㆍ단계창(丹溪倉) 고현(古縣)에 있다.
【진도】 신안진(新安津) 동쪽으로 5리이다.
【토산】 숫돌[?石].
【사원】 도천서원(道川書院) 태종 신사년에 세웠고 정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문익점(文益漸) 자는 일신(日新)이고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공민왕 때에 서장관으로 원 나라에 가서 목화 씨를 얻어 와 우리나라에 심었다. 벼슬은 좌사의 우문관제학이었다. 본조 태종조(太宗朝) 때에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권도(權濤) 자는 정보(靜甫)이고 호는 동계(東溪)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벼슬은 대사간이었는데 이조 판서를 추증했다.
[민족문화추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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