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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유 지리산록(遊智異山錄)-이륙(李陸.출처:속동문선)

이육(李陸)


지리산은 또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영남 ㆍ 호남의 교차로에 웅거하여 높고 넓음은 몇 백 리인지 알 수 없다. 산을 둘러서 목(牧)이 하나, 부(府)가 하나, 군(郡)이 둘, 현(縣)이 다섯, 부읍(附邑)이 넷이 있는데, 그 동은 진주(晉州) ㆍ 단성(丹城)이요, 그 남은 곤양(昆陽) ㆍ 하동(河東) ㆍ 살천(薩川) ㆍ 적량(赤良) ㆍ 화개(花開) ㆍ 악양(岳陽)이요, 그 서는 남원(南原) ㆍ 구례(求禮) ㆍ 광양(光陽)이요, 그 북은 함양(咸陽) ㆍ 산음(山陰)이다.

 

산 위에 최고봉이 둘이 있는데, 동쪽은 천왕봉(天王峯)이요,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인데, 서로 백여 리가 떨어지고 항상 구름이 가려 있다. 천왕봉에서 조금 내려와 서쪽으로 가면 향적사(香積寺)가 있고, 또 서쪽으로 50리쯤 가면 가섭대(迦葉臺)가 있고, 대의 남쪽에 영신사(靈神寺)가 있다.

 

서로 20리를 내려가면 공허한 벌판이 있는데, 편편하고 기름져 종횡이 6 ㆍ 7리가량 되고, 왕왕 저습한 데가 있어 곡식을 심기에 알맞다. 해묵은 잣나무가 하늘을 가려 있어 그 낙엽에 무릎이 묻히고, 한가운데서 사방을 돌아보면 끝이 뵈지 아니하여 완연히 하나의 평야다. 돌아서 남으로 시내를 따라 내려가면 의신(義神) ㆍ 신흥(新興) ㆍ 쌍계(雙溪) 등 세 절이 있다.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어 20리를 가면 칠불사(七佛寺)가 있고, 쌍계사에서 동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서면 불일암(佛日庵)이 있다. 그밖의 명사(名寺) ㆍ 승찰(勝刹)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산의 절정에 있는 향적사(香積寺) 등 두어 절은 다 목판으로 덮고 거처하는 중도 없는데, 오직 영신사는 기와를 덮었다. 그러나, 거처하는 중은 역시 한두 명에 불과하다. 산세가 동떨어지게 높아서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접촉할 기회가 없으니, 자연 고승(高僧)이 아니고서는 안착할 수 없게 되었다. 물이 영신사(靈神寺)의 작은 샘으로부터 근원되어 신흥사(新興寺) 앞에 이르러서는, 이미 큰 내가 되어 섬진(蟾津)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이를 화개동천(花開洞川)이라 이른다.

 

천왕봉에서 동으로 내려가면 천불암(千佛庵) ㆍ 법계사(法戒寺)가 있다.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어, 동으로 큰 바다에 다다르고 서로 천왕봉을 짊어졌는데, 극히 맑은 운치를 지녔으며 이름을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 또 두 물줄기가 있는데,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내려오고, 하나는 법계사(法戒寺) 밑에서 내려와 살천(薩川)에 이르러 합쳐서 하나가 되어, 소남진(召南津)의 하류로 들어가 진주(晉州)를 둘러 동으로 가는데, 이것을 청천강(菁川江)이라고 부른다.

 

소남진(召南津)은 산 북쪽의 물이 동쪽으로 와서, 단성현(丹城縣)에 이르러 또 꺾어져 서쪽으로 흐른다. 살천 마을에서 20여 리를 가면 보암사(普庵寺)가 있는데, 그 살천 마을 이내는 내산(內山)이라 이르고, 이외는 외산(外山)이라고 한다. 보암사(普庵寺)에서 곧장 올라 빨리 가면 하루 반에 천왕봉에 당도할 수 있다. 그러나 돌비탈이 험준하여 오솔길을 찾기 어렵고, 또 느티나무 ㆍ 회나무가 하늘을 가려 있고, 아래는 멧대가 빽빽이 들어차고, 혹은 나무가 천길의 비탈에 비껴 있어, 이끼가 부스러져 떨어지고 또 샘 줄기가 멀리 구름 끝에서 날아와 그 사이를 가로질러, 아슬한 밑바닥으로 쏟으니 나아가려고 해도 발뒤축을 돌릴 수 없고, 돌아서려고 해도 뒤가 보이지 아니한다. 수십 그루의 나무를 베어내야 비로소 조금 하늘을 볼 수 있다.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자가 왕왕 돌덩이를 주워서 바위 위에 두고, 노정을 표시하며 골짝에는 얼음과 눈이 여름을 지나도 녹지 아니하고, 6월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며, 7월에 눈이 내리고, 8월에는 얼음장이 깔리고, 초겨울을 당하면 눈이 심하여 온 골짝이 다 편편하니 사람이 오고 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산에 사는 자가 가을에 들어가면, 이듬해 늦봄에야 비로소 산을 내려오게 되며, 혹 산 밑에서는 크게 뇌성하고 비가 쏟아지더라도, 산상은 청명하여 구름 한 점 없으니, 대개 산이 높아 하늘과 가깝기 때문에 기후가 자연 평지와 더불어 엉뚱하게 다른 모양이다. 대부분 산의 모습이 아래는 감나무 ㆍ 밤나무가 많고, 조금 올라가면 느티나무뿐이요, 느티나무가 끝나면 삼회(杉檜)가 가득한데, 반이나 말라 죽어 청백(靑白)이 서로 섞여서 바라보기에 그림과 같다. 최상에는 다만 철쭉나무가 있을 뿐인데, 높이가 한 자에 차지 않는다.

 

모든 아름다운 산나물과 진기한 과실이 다른 산보다 많아서, 이 산과 가까이 수십 골들이 모두 그 이익을 얻어 먹고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전문 옮김]

 

 

이륙 [李陸, 1438~1498]
본관 고성(固城). 자 방옹(放翁). 호 청파(靑坡). 좌의정 이원(李原)의 손자이며, 사간 이지(李墀)의 아들이다. 1452년(문종 2) 사마시에 합격한 후 지리산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젊었을 때 호방하여 무슨 일에나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지리산에 들어가 3년 동안 제자백가(諸子百家)를 공부하며 나오지 않자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464년(세조 10) 춘방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여 왕명으로 도성의 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1468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응교(應敎)·장령(掌令) 등을 지냈으며, 성종이 즉위한 후에는 대사성·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1477년(성종 8)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는데, 이때 아버지 이지가 괴산군수로 있자 성종은 전지(傳旨)를 내려 그를 곧 서울로 불러들였다. 1488년 동지중추부사에 이어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490년 예조참판으로서 정조사(正朝使)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94년 성종이 죽자 고부사(告赴使)로 다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연산군 즉위 후에는 경기도관찰사·대사헌·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이 민첩하였으며, 특히 역사에 일가견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