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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숲속의 글마당

山中, 시간이 멈춘듯, 바쁜 것은 구름뿐

by 지리산 마실 2008. 1. 25.

"시간이 멈춘듯 ··· 바쁜 것은 구름뿐" 산중

산중

두루 산세를 보니 사방에 터진 곳이 없었다. 지세는 높고 드넓은데, 절터는 평평하고 발라 가야산을 안산으로 삼고 있었다. 봉 머리엔 흰 구름이 감겼다 펴지며 변화가 무상하였다. 앞문을 활짝 열어 젖치고 하루 종일 마주 보았다. 의미가 무궁한 것이 참으로 절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머물고 싶었지만, 갈 길에 얽매여 뜻을 이룰 수 없어 안타까웠다. 산승들은 모두 여름 땔감을 마련하러 나갔다. 인적이 없었다.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긴 하루를 보냈다.

周觀山勢, 則四無空缺, 而地勢高曠, 寺基平正, 以伽耶爲案. 峯頭白雲, 卷舒無常. 拓開前門, 終日相對, 意味無窮, 眞絶境也. 意欲留住, 而拘於前路, 未果, 可恨也已. 山僧盡出伐夏柴, 閱無人跡, 或坐或臥, 以終永日.
-정시한(丁時翰, 1625-1707), 《산중일기(山中日記)》

여행 중 성주(星州)의 수도암(修道庵)에서 보낸 하루를 적은 일기다. 높은 산 깊은 곳에 자리한 암자에 스님들은 나무하러 가서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다. 나 혼자 하루를 보냈다. 방문을 활짝 열고, 건너편 봉우리 위로 말렸다 감겼다 하는 구름을 본다. 잠깐 사이에도 변화가 무쌍하여 지겨운 줄을 모른다. 내가 마치 구름 위에 앉은 신선 같다. 앉아서 툭 터진 경계를 내려다보며, 구름 한번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뒤로 벌렁 누워 팔베개를 하고 또 이런저런 인연들을 떠올렸다. 긴긴 하루해가 이렇게 떠내려갔다. 속세의 시간이 멈춘 곳, 바쁜 것은 구름뿐이다. 잠착히 앉았노라면 지나온 삶이 부끄럽게 떠오른다. 물끄러미 내면이 다 들여다보인다.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시한은

본관 나주. 자 군익(君翊), 호 우담(愚潭). 서울 출생으로 강원도 원주 법천(法泉)으로 낙향해 평생 벼슬길을 멀리했다. 정약용은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이후로 진정하고 순수한 유학자는 오직 선생 한 분뿐이다”고 그를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