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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역사 속의 지리산<7>서부 경남의 가야문화

고성 송학동 1호분, 고성과 가까운 사천 선진리 고분, 거제 장목고분 등에서 왜계 양식이 잇따라 발견됐다.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명성 속에 파묻혀 있는 고성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경남의 소가야. 5~6세기 그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왜계 유물 돌 화살촉.
 
5세기는 격동의 시대였다. 391년부터 시작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유례 없는 대외팽창은 한반도 남부까지 미친다. 그 힘은 가야까지 닿고 김해세력은 한순간에 붕괴된다. 이에 따라 금관가야와 왜의 교류는 5세기 후반 대가야로 옮겨졌다는 게 통설로 여겨졌다.

하지만 서부경남지역에서 가야유적의 발견은 이런 통설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왜일까. 무엇보다 대가야에서는 왜의 문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일본 규슈 서북부의 아리아케 연안지역과 북부 규슈지역과 연관이 있는 유물들은 소가야식 유물이 절대다수다.

또한 함안·고성·산청에서 발견된 서부경남 지역 가야 유물은 김해 금관가야의 마지막 유물을 그대로 잇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래 형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가야인이 활발한 해상활동 과정에서 왜인들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 결과 외래 문물이 서부경남 지역에 유입된 것이 아닌가라는 결론에 이른다.

고성 송학동 1호분·거제 장목고분 등

소가야가 왜와 교류했다는 사실은 소가야가 대가야만큼 거대했을 거라는 근거만 마련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는 임나일본부설을 깨는 근거도 된다.

20년 전 함안 도항리 말산리 고분에서 파란녹이 발견됐다. 빨간녹은 철을, 파란녹은 청동을 의미한다. 무엇일까 들춰보니 일제시대 헌병군화 경첩. 샅샅이 도굴하고 신발만 남기고 떠난 것이다.

일본은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애타게 찾은 것은 고분 속에 친일계 지배자가 남긴 상징적인 유물이다.

함안의 고분은 대충 헤아려도 1000여 기. <살아있는 가야사 이야기> 저자 박창희씨는 들녘에서 만난 노인들마다 ‘일본 것들이 금 캐듯 다 캐서 가져갔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1917년에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들은 함안 도항리 대형고분 52기를 발굴한다. 대충 조사보고서를 꾸민 뒤 160여점의 부장품들을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간다.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것인데, 결국엔 실패한 채 도굴꾼 노릇만 한 셈이다.

   
 
▲ 왜계 양식인 거제 장목고분 입구벽.
 
왜계 유물 잇단 발견…교류 흔적 증명


죽음을 앞두면 마음이 선해진다고 했던가. 죽음을 앞둔 이들 고적위원들은 하나같이 ‘임나일본부는 조선에 없다’는 말을 남겼다. 역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떠들어대지만 일본 고고학자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또한 일본에서는 입을 다문다.

서부경남 가야유적에 앞서 김해 금관가야에서는 더 확실한 근거가 등장하기도 했다. 4세기 갑옷과 말재갈이 그것이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갑옷은 나오는데 마구는 등장하지 않는다.

요약컨대 가야는 기병집단이었고 일본은 보병집단이었다는 것. 임나일본부가 지배했다고 한다면 일본의 보병이 기병을 부수고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얼토당토 않은 결론이 나온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나타나는 돌 화살촉 또한 말할 필요가 없는 근거다. 철이 발에 차이던 금관가야에서 과연 일본의 돌 화살촉이 필요했을까? 이는 일본이 가야의 철을 얻어가면서 남긴 자신들의 최고의 물건인 것이다.

왜계교류 관계를 짚어 볼 수 있는 서부경남의 가야유적은 아직 발굴도 연구도 미비한 상태. 하지만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막을 확실한 근거가 될지도 모르는 숨은 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