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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이야기/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

등구사登龜寺 이야기③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57>등구사登龜寺 이야기

 

[등구사 삼층석탑지에서 바라본 지리산. 중앙의 높은 봉우리가 천왕봉(1915m)이다. 천왕봉 양 옆에 있는 중봉과 제석봉은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등구사 석탑지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등구사 사적에 의하면, 등구사는 656(신라 태종무열왕 2)에 창건되었고 나말여초에 이르는 시기에 화재로 불타버려 빈터로 남아있었는데, 1708년 인근의 안국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탄기(坦機) 등의 승려들이 이곳에 절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1710년에 중창을 완료하였다고 한다. 등구사 사적말미에는 탄기를 비롯한 절집의 중창불사에 참여한 승려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이들에 대한 행적이나 승려들의 족보라 할 수 있는 법맥(法脈)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뜻밖의 문헌기록에서 이들 몇몇의 흔적이 발견되며,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 이곳에서 활동한 승려들의 모습이 짜 맞춰지듯 이어지고 있어 흥미롭다.

 

지리산의 산중암자에서 독서하기 위해 1686415(음력) 삼정산 자락 군자사(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도착한 우담 정시한(1625~1707)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다음날 임천을 건너 금대암으로 향했다. 우담은 이날 대오(大悟) 종장이라는 승려를 만나려했으나 출타 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인근의 안국사로 가서 사흘을 머물게 되는데, 당시 안국사 승려들과의 만남을 그의 산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승통 일겸(一謙)스님과 탄기(坦機)스님이 꿀물과 진귀한 과일 등을 내오며 반겨주었다. (중략) 저녁 식사 뒤에 일겸탄기스님과 함께 서암(西庵)까지 걸어갔는데, 본사(本寺)와는 수리 가량이다.”

 

이렇듯 1708년 안국사에 화재가 나기 22년 전인 1686년에 우담이 만난 안국사 승려 탄기의 모습에서 등구사 사적에 기록되어 있는 안국사와 등구사의 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이다. 탄기는 구한당(龜閑堂)’이라는 건물의 시주자로도 나오는데, ‘통정대부 탄기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등구사의 현당(玄堂)’이라는 건물의 시주자로 가선대부 증계(證戒)라는 승려 이름이 나온다. 증계는 조선후기 불교의례집의 텍스트북이라 할 수 있는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이하 범음산보집)이라는 문헌에서 그 이름이 발견된다. 주로 지리산의 절집에서 주석하였던 당대의 고승 석실명안(石室明眼,1646~1710)이 쓴 이 책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신라시대에 진감 노스님이 서쪽 중국에서 법의 등불을 잇고, 겸하여 범패의 방법을 익히고 돌아와서 옥천사(지금의 하동 쌍계사)에 메아리를 남겨 주었으니, 이는 범패가 우리나라에 크게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복을 빌거나 영가(靈駕)를 위해 재를 올릴 때, 범패가 아니면 할 수가 없어 예로부터 계속 이어졌다. 오늘날 그 방법을 이을 수 있는 이는 안국사의 증계 바로 그 사람이다. 지환(智還)이 그 법을 터득하고 절묘함을 전하니 청출어람이라 하겠다.”

 

그리고 무용수연(無用秀演.1651~1719)이 쓴 다른 서문에는 지환은 방장(方丈)의 무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글에서 이 책의 편찬자인 지환은 당시 지리산 안국사에 주석하고 있던 유명한 범패승(魚山이라고도 한다) 증계로부터 범맥(梵脈)을 이었고, 그 역시 안국사에 머물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범음산보집1709년 곡성 도림사에서 처음 간행된 후, 1721년에는 삼각산 중흥사(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서도 발간될 정도로 조선후기 불교의례에 큰 영향을 미친 문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범패가 금지되었던 일제 일제강점기 때 양산 통도사에 주석하고 있던 증곡치익(曾谷致益. 1862~1942)이 쓴 어산청유상록서魚山廳留上錄序에는 진감선사(774~850)가 도입한 범패가 증계와 지환을 비롯한 석덕(碩德,고승)들에 의해 그 묘음이 전해졌다라는 내용의 글을 남기고 있어, 범음산보집이 전국적으로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세기 초반 지리산 하동에서 꽃을 피운 범패의 역사가 그로부터 9세기 후에는 이렇듯 함양 안국사와 등구사에 머물렀던 증계라는 승려에 의해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모처럼 시계가 양호한 날 등구사에 들렀다. 해발 700m 고지에 위치한 겨울 등구사의 추위가 매섭다. 쫓기듯 돌아서는 걸음에 증계라는 선명한 이름이 오히려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언젠가 눈 밝은 이가 나타나길 기대하며 등구사 이야기를 맺는다.

 

조용섭/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