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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이야기/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 지리산 유람①

재간당(在澗堂)과 수용암((水舂巖). 부안김씨 김익복(1551~1598)이 기묘명현 안처순의 손녀사위가 되어 남원으로 옮겨와 살면서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는데, 재간당은 그의 둘째 아들인 김화(1571~1645)가 지은 정자이다. 왼쪽 단애를 이루는 바위에는 수용정(水舂亭)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48>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 지리산 유람

 

1611년 음력 328(양력 510), 남원부사 유몽인(1559~1623)목동’(木洞. 현 남원시 산동면 목동마을)으로 향하며 지리산 유람에 나선다. 한 달 전 지리산 유람에 동행하기로 약속한 승평(순천)부사 유영순(1552~1630)이 목동에 와있다는 소식을 접한 다음날이다. 삼각산, 금강산, 묘향산 등 팔도의 수많은 명산을 유람한 바 있는 유몽인은 오랫동안 마음에 두어왔던 지리산 유람을 수령 부임 2개월 만에 행동에 옮긴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평안도와 경상도의 감사를 지낸 후 남녘 두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유몽인은 선조 재위 말년인 16081월 말에 도승지가 되었는데, 불과 이틀 후인 21일 선조가 붕어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있다가, 16112월에 공석으로 있던 남원부사에 임명된 상태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사람이 지리산 유람을 다녀온 후 4개월 후에, 무능하고 태만한 호남의 수령들을 파직하여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 대상 명단에 둘 다 올랐고, 결국 유몽인은 남원부사에 임명된 지 채 1년도 못되어 옷을 벗게 된다. 이후 유몽인은 다시 조정으로 불려 들어가 예조참판,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며 비교적 순탄한 벼슬살이를 하게 되나, 1618년 인목대비 폐모사건, 1623년 인조반정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당색이 북인이면서도 폐모론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척당하였고, 반정 이후 새 임금에 대한 확실한 거취 표명을 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되어 역모 누명을 쓰고 외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유몽인의 삶은 사후 171년이 지난 1794년에 그의 절개를 높이 산 정조 임금에 의해 신원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게 된다.

 

남원부를 출발하여 목동 재간당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시작된 유몽인의 지리산 유람은 910일로 이어지며, 여정의 기록은 유두류산록에 남겨져 있다. 그의 유람 노정을 오늘날의 지명으로 보면 대체로 남원시 산동면 목동-장수군 번암면(대론삼거리)-유치-운봉 황산대첩비지-인월-백장암-뱀사골-와운마을-영원사-군자사-용유담-송대마을-허공달골(두류암)-(동부능선)-하봉-중봉-천왕봉-(주능선)-영신암-(하산)-하동군 의신마을(의신사)-신흥사-쌍계사-불일암-화개-구례군 산동-숙성령을 거쳐 다시 남원으로 돌아오는 동선으로 이루어진다.

유람 첫날 유몽인 일행은 술자리를 벌이고 대취하여 시냇가 재간당에서 그대로 잠을 잤다고 한다. 재간당은 김화(金澕 1571~1645)가 지은 정자이자 그의 호로 쓰는 이름이기도하다.

부안김씨인 그의 집안은 부친인 김익복(1551~1598)이 기묘명현 사재당(思齋堂) 안처순의 아들인 안전의 사위가 되어 남원으로 와서 옮겨 살게 되면서 후손들이 남원에 세거하게 되었다. 김익복의 차남인 김화는 지난 1파근사편에서 소개한 김지백의 중부(仲父)가 된다.

 

김익복은 임진왜란 때에 능성현감으로 있으면서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 영광군수로 있으면서 1598년 예교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김화는 이괄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집의(執義)에 증직되기도 하였다.

 

재간당(在澗堂)

 

 수용암(水舂巖)

 

 

재간당 옆에는 단애를 이루는 수용암(水舂巖)과 거대한 암반 사이로 물이 흐르는 예쁜 계곡이 있고, 너럭바위에는 세이암(洗耳岩)’이라는 각자도 있다. 재간당 정자에서 마을로 조금 내려서면 지리산서북능선과 만복대에서 영제봉까지 길게 이어지는 장쾌한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몽인 일행은 329일 서둘러 목동마을을 출발하여 요천을 거슬러 오르며 반암을 지나고, 정오 무렵 운봉의 황산 비전(碑殿)에 도착하여 쉬었다. 지금의 남원-장수를 잇는 19번국도와 비슷한 동선으로 이동하다가, 장수군 번암면 대론삼거리 즈음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운봉으로 향하였을 것이다. 이 길은 현재 지방도인 성암길-유정로로 길이 이어지며, 동학농민혁명 유적비가 서있는 유치에서 운봉으로 들어서며 황산대첩비지로 향한다. 그런데 1895년 남원부에서 장수군 관할로 바뀐 번암면의 지명에 의문이 생긴다. 유몽인은 반암(磻巖)이라고 하여 강 이름(. 번으로도 읽는다)을 쓰고 있는데, 현재 한자 지명을 보면 서릴 반’()자를 쓰고 번암으로 읽고 있다. 장수군청 홈페이지에 보면 반이 번으로 와전되었다라고 하는데, 18세기에 편찬된 남원지, 용성지, 해동지도등에 분명히 반암방(磻岩坊)’으로 나타나는 것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겠다. 반면 19세기에 편찬된 호남읍지 등에는 반, , 등이 무질서하게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장암 전경

 

운봉 황산대첩비 비전에서 휴식을 취한 유몽인 일행은 인월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운봉수령을 만나 함께 백장사로 향하였다. 1586년 양대박의 유두류산록과 마찬가지로 유몽인의 글에도 현재 실상사의 말사인 백장암은 백장사로 표기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본사였던 실상사가 15세기 세조 연간에 불타버린 후 200여 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1680년대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이 기간 동안에 백장사가 본사의 역할을 하였다는 이야기와 부합된다고 하겠다. 유몽인 일행은 백장사에서 유람 둘째 날의 여정을 마무리 하였다. 남원에서 목동-번암을 거쳐 백장암에 이르는 거리는 약 30km에 이른다.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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