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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숲속의 글마당

'녹아버린 얼음보숭이', 권경업 시인 11번째 시집

by 지리산 마실 2007. 7. 11.
권경업 시인 11번째 시집 '녹아버린 얼음보숭이'
北 지배계층 풍자·동포 걱정…날카로우면서 따뜻한 시어들
북한 방문 때 받은 충격 직설적 화법으로 표현

 
아마 이대로라면 권경업 시인은 다시 북한의 초청을 받지 못할 것같다. 그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북한 사회의 역린(逆鱗)을 건드린다. '가진 것이라곤 목숨뿐인 이들/어쩌면 고구려 유민(遺民)의 설움 같을,/걸핏하면 뒷골목으로 내몰릴 주홍글씨/찬 서리 이슬잠(露宿)으로 떠돌며/허기진 한 끼에 몸을 팔아야하는 거짓웃음/지친 육신의 노동, 싸구려로 내던질/저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통 큰 위원장님! 하루라도 빨리/당신을 위해,/당신의 선한 인민들을 위해 하야(下野)하십시오…('통일은 할 수 없습니다' 중)

최근 11번째 시집 '녹아버린 얼음보숭이'(신생)를 펴낸 권경업 시인은 조금 상기된 표정이었다. "2005년 7월 평양에서 5박6일 동안 열린 남북문학작가대회에 초청됐습니다. 그때 가서 본 북한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그쪽의 위정자들에게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그 때의 체험은 그가 통일에 대해 더 진지하게, 깊이 생각하게 해줬다. '통일은 할 수 없습니다'는 이 상태에서 남북이 급히 통일된다면 북한 주민 상당 수는 자본주의 남한의 타자(他者)이자 희생양이 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치밀어 쓴 시이다.

'녹아버린 얼음보숭이'에 실린 시 대부분은 2005년 북한 방문 당시 보고 느낀 것들을 마음으로 삭히며 쓴 작품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 몇편을 언뜻 봐선 평소 북녘 동포들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그가 북한 현실을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녹아버린 얼음보숭이'의 속내는 통일과 동포에 대한 애정과 걱정으로 꽉 차 있다.

 
'어디가면 맛볼 수 있냐는 물음에/"공화국 북반부에서도, 요즘은/얼음보숭이라는 말 잘 안씁네다/아이스크림이라면 다 알아듣습네다"//아쉽습니다, 정말 아쉽습니다/먹어보지도 못하고 녹아버릴/아름다운 이름이, 어디/얼음보숭이뿐이겠습니까'('녹아버린 얼음보숭이' 전문). 이 시는 북한의 호텔에서 여성복무원에게 '얼음보숭이'(아이스크림)를 주문했을 때 돌아온 말을 그대로 시로 옮겼다. "북한이 간직하고 있는 것 중 좋은 것도 많지 않느냐. 아름다운 우리말이 대표적이다. 자본주의와 개발의 열풍이 북으로 번지면 그 좋은 것부터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내 심장이, 아직/왼쪽에서 펄떡이는 것은//뜨겁게 안았을 때, 비어 있을/당신의 오른쪽 가슴을 위해서입니다'('왼쪽에서' 전문). 북한 현실과 위정자들의 허세를 맵게 꼬집는 시들과 동포와 통일에 대한 애정을, 권경업식으로 독특하게 그린 시들이 눈길을 끈다.

권 시인이 말했다. "잠깐 갔다 와서 시집냈다고 사람들이 뭐라고들 하겠죠?" 한국을 한달 돌아보고 한국의 이미지를 춤 작품으로 만든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쉬는 "한달이 너무 짧지 않냐?"는 비아냥에 "그렇다면 얼마면 충분한가? 한 나라를 알기 위해 충분한 시간이란 없다"고 말했다. '남해 금산'을 쓴 이성복 시인에게 남해 사람들이 "남해를 모르고 썼다"고 비판하자 그는 "나의 금산이 당신의 금산과 같을 수 없다"고 답했다. 예민한 촉수를 지닌 시인의 운명이 그런 것이다.

조봉권 기자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