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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병자호란 다시 읽기](58)전운 그림자에 불안, 막막한 현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8) 전운 그림자에 불안, 막막한 현실 후금이 대릉하 원정에 앞서 평안도 일원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자 조선의 위기의식은 바짝 높아졌다. 인조는 강화도 정비에 몰두하는 한편, 후금의 침략에 대비한 군사적 방책 마련에도 신경을 썼다.1631년 8월, 인조는 서쪽 교외로 나아가 무..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57)대릉하성의 비극② [서울신문] [병자호란 다시 읽기](57) 대릉하성의 비극 (2) 명이 조대수를 시켜 대릉하성을 쌓은 목적은 명확했다. 산해관의 방어를 확고히 하면서, 후금에 빼앗긴 요서(遼西)와 요동을 수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후금군은 성의 방어 시설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조대수는..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56)대릉하성의 비극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56) 대릉하성의 비극 (1) 1631년(인조 9) 8월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 당시 성안에는 사령관 조대수(祖大壽)를 비롯하여 1만 5000명 남짓한 명군이 있었다. 성의 치첩(雉堞)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 미처 돌아가지 못한 인부가 3000명, 상인이 2000명 정도 있었다. 후금군..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55)후금,조선을 떠보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5) 후금,조선을 떠보다 후금군이 침략해 오고, 사신을 보내 배를 빌려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의 위기 의식은 높아졌다. 조정은 김시양(金時讓)을 도원수로, 이완(李浣)을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서북으로 내려보내고 전국에 징병령을 내렸다. 하지만 후금과 맞설 수 없는 처지에서 ..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54)후금, 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4) 후금,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아슬아슬했다. 조선은 후금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바로 명과 가도라는 바깥 변수 때문이었다. 유흥치가 피살된 뒤, 가도를 탈출하..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53)끝없는 가도의 風雲 [병자호란 다시 읽기] (53) 끝없는 가도의 風雲 인조가 원종 추숭을 위해 골몰하고 있을 때 가도의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반란을 일으켜 조선의 정벌 대상이 되었던 유흥치(劉興治)는 조선에 대한 물자 징색(徵色)을 멈추지 않았다. 유흥치를 토벌하려 했던 ‘원죄’ 때문에 조선은 그의 보복을 .. 더보기
병자호란 이야기(51)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휘둘리고, 엄당의 참소가 곁들여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높아 가던 분위기 속에서 엄당 계열의 온체인(溫體仁)은 다섯 차례나 상소를 통해 원숭환을 죽이라고 촉구했다. 반면 동림당 계열의 신료들은 ‘적이 성 아래까..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우여곡절 속에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을 무렵 명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후금의 위협이라는 커다란 외환(外患)을 앞에 두고 명은 이런저런 내우(內憂)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복은커녕 망하는 길로 확실히 접어들고 있었다.1630..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