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조반정

병자호란 다시 읽기(40)정묘호란과 모문룡 [병자호란 다시 읽기]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1627년 4월21일, 용골산성의 영웅 정봉수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평안도 구성부터 곽산까지 후금 군사들이 가득 차 있고 용골산성은 고립되어 있다. 성안에는 7000명 가까운 군사가 있지만 양식이 다 떨어져 굶어 죽은 자가 이미 30명이 넘었다. 후금군..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39)정묘호란 이모저모 [병자호란 다시 읽기] (39) 정묘호란 이모저모 ‘인조실록’과 장유(張維)의 ‘계곡만필(谿谷漫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정묘호란 당시 강화도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불과 100리 밖까지 적의 대병이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 신료들은 대개 화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척화(斥..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38)정묘호란 일어나다③ [병자호란 다시 읽기] (38)정묘호란 일어나다 Ⅲ 조선 사신이 ‘재조지은을 배신할 수 없다.’며 침략을 힐문했을 때 아민은 즉각 반박했다. 반박의 핵심은 ‘조선이 명의 은혜만 기억할 뿐 자신들이 베푼 은혜에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과거 울라(烏拉)의 부잔타이(布占泰)가 조선을 ..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37)정묘호란 일어나다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37)정묘호란 일어나다Ⅱ 1627년 후금이 갑자기 정묘호란을 도발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합적이었다. 조선과 후금,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과 명(-모문룡 문제를 포함) 사이의 문제점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특히 누르하치가 죽은 뒤 추대 형식으로 즉위했지만 한(汗)의 위..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앍기(36)정묘호란 일어나다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후금군 파죽지세… 인조 강화로 피난갈 궁리만 홍타이지는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오랫동안 후금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한 뒤 모문룡도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35)명과 후금의 정세③ [병자호란 다시 읽기]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1626년(인조4, 천계6) 1월23일 누르하치는 영원성으로 들이닥쳤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20만이라는 설도 있고,13만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누르하치의 대병력이 나타나자 영원성의 전면에 머물던 명의 관민(官民)들은 경악했다. 대릉하(大凌河), 소릉하(小..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34)명과 후금의 정세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34) 명과 후금의 정세 Ⅱ 천계 연간 격렬한 당쟁이 빚어지고 결국 위충현을 비롯한 엄당이 국정을 장악하게 되자 그 불똥은 곧바로 산해관 바깥으로 튀었다. 요동, 요서(遼西)의 방어를 책임진 최고위 지휘관들 또한 당쟁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느 당파에 속하느냐가 .. 더보기
병자호란 이야기(31)모문룡의 작폐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31) 모문룡의 작폐Ⅰ 인조반정 성공 이후 조선이 표방했던 대외정책의 성격은 ‘친명배금(親明排金)’이었다. 그런데 ‘친명’은 분명 실천했지만 ‘배금’은 쉽사리 실천할 수 없었다.‘배금’을 실천하려 할 경우 필연적으로 후금과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고, 조선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