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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17)조선의 일본어 譯官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7) 조선의 일본어 역관 조선시대의 외교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으니, 큰 나라 중국은 섬기고, 동등한 나라 일본과는 이웃으로 지낸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정기적으로 외교 사신을 보냈으며, 사신을 보낼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그 나라 사람들과 말이 통..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16)역관 명문 인동 장씨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6) 역관 명문 인동 장씨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시대 잡과(雜科) 합격자는 모두 6122명이다. 이 가운데 역과가 2976명, 의과가 1548명, 음양과가 865명, 율과가 733명 순이었다. 산학(算學)은 정조 즉위년(1756)부터 주학(籌學)이라고 했는데, 잡과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취..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14)서예가 마성린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4) 서예가 마성린의 일생 임준원과 홍세태, 유찬홍 등의 낙사(洛社) 동인들 이후에도 인왕산과 필운대는 여전히 중인문화의 중심지였다. 위항시인들이 대개 한양성의 서쪽 인왕산에 많이 모여 서사(西社)라는 이름을 썼지만,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막연한 지칭이다...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13)홍세태의 활약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3)홍세태의 활약상 북악산 아래 장동 김씨들이 모여 살았다.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아들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1682년에 낙송루(洛誦樓)라는 만남의 공간을 꾸리자 노론 계열의 시인들이 자주 모여 시를 지었다. 한 동네에 살았던 홍세태도 이곳에 드나들며 동..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12)역관시인 홍세태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2)日·淸도 인정한 역관시인 홍세태 인왕산 호걸 임준원의 집에 가장 오래 얹혀 살았던 위항시인은 홍세태(洪世泰·1653∼1725)이다. 중인들은 대대로 같은 직업을 물려받았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우들까지 무인으로 활동하던 집안에 태어나 역관이 되었다...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10)호걸 임준원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0) 빈자 도와준 호걸 임준원 중인들은 서울의 북쪽 인왕산 일대와 남쪽 청계천 일대에 주로 모여 살았다. 지역에 따라 직업과 재산, 관심사가 달랐다. 서당 훈장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위항시인 정내교(鄭來僑·1681∼1757)는 스승 홍세태의 친구 임준원(林俊元)의 ..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009)필운대 풍월과 꽃구경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9) 필운대 풍월과 꽃구경 ●‘장안의 명승´에 사람들 모이다 조선시대의 체제와 제도를 명문화한 ‘경국대전(經國大典)’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에 의하면 “문무관 2품 이상인 관원의 양첩 자손은 정3품까지의 관직에 허용한다.”고 하였으며 “7품 이하의 관..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08)중인들 필운대·육각현서 노닐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8) 중인들 필운대·육각현서 노닐다 인왕산의 네 구역 가운데 지난주에 소개한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인왕산의 왼쪽 기슭이라면, 필운대와 육각현은 오른쪽 기슭이다.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다. 필운대 정자에서는 대원군 당시 핵심측근이었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