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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1)민중종교로 번진 천주교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1) 양반의 신문화운동에서 민중종교로 번진 천주교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모친상을 당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사르자, 천주교 신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가 불거졌다. 양반층의 천주교 신자가 대부분 남인이었으므로, 탕평..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0)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김범우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0)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김범우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된 시기를 윤지충의 진산사건이 일어난 1791년 이전과 신유교난이 일어난 1801년 이전, 그리고 그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면 지도층의 신분이 확연히 달라진다. 조광 교수는 ‘조선후기 천주교 지도층의 특성’..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75)병자호란 일어나다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75)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Ⅱ 1636년 12월10일 압록강을 건넜다. 이렇다 할 저항이 없었다. 그들은 곽산(郭山)과 정주(定州)에 사실상 무혈 입성했다. 홍타이지는 투항해 온 곽산과 정주의 군민들을 해치지 말라고 유시하는 한편, 그들의 머리를 깎아 치발(髮)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29)최초 주간지 기자 오세창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9)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 기자 오세창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는 1883년 10월부터 글자 그대로 열흘에 한번씩 나왔는데, 갑신정변 때에 건물과 기계들이 파괴되어 한때 폐지되었다가 주간지로 복간하였다.16세 나이로 1879년 역과에 합격했던 오세창(18..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74)병자호란이 일어나다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74) 병자호란이 시작되다(Ⅰ)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까지 조정에서는 청과의 관계를 복원할지, 그것과 관련하여 사신을 보낼지를 놓고 격심한 논란이 빚어졌다. 척화파는 명분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절교가 불가피하다고 했고, 주화파는 이렇다 할 준비 없이 전쟁을 벌이는 ..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28)역관 오세창, 우리나라 서화 집대성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8) 우리나라 서화를 집대성한 역관 오세창 중국에서 한자가 전래된 이래, 우리나라의 서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우리 것을 만들어냈다. 한자라는 글자 자체가 중국의 것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중국의 금석문과 명필들의 서첩을 구입해 본받았지만, 추사 김정희..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27)譯官 오경석의 외교활동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7) 역관 오경석의 외교활동 조선시대 외교의 강령은 사대교린(事大交隣), 즉 ‘큰 나라 중국은 섬기고 이웃 나라 일본과는 사귄다.’는 것이다. 외교는 예조(禮曹)에서 관장했지만, 실제적인 사무는 사역원과 승문원(承文院)에서 맡았다. 중국이나 일본에 가서 통..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73)최후의 주화-척화 논쟁 [병자호란 다시 읽기](73)최후의 주화-척화 논쟁 최명길의 주장은, 척화(斥和)하여 청과 싸우겠다는 결심을 굳혔으면 ‘공세적’으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말로만 ‘척화’를 외치며 미적거릴 경우, 청군의 철기(鐵騎)를 조선 영토 깊숙이 불러들이게 되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것을 우려한 계책이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