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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탐방]

육조의 정상을 모셔오다/쌍계사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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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석문]

 

-지극하면 이루리라. 삼법, 육조의 정상(頂相)을 모셔오다.

 

지리산 자락 쌍계사(雙磎寺.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의 창건설화를 들여다보면 긴박감 넘치는 한 장면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것은 신라 스님 삼법(三法)화상이 당나라로 가서(신라 성덕왕 21년, 722년), 조계(曹溪)의 선풍(禪風)을 드날리며 뭇 중생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다 입적한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의 정상을 취하여 오는 기이한 광경이라 할 것이다. 육조를 너무도 흠모한 삼법스님은 육조를 뵙고 가르침을 받는 게 평생의 꿈이었다고 하는데, 힘들게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을 때에는 이미 육조께서 입적한 후였다고 한다. 그때 삼법스님은 지극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육조의 정상 취하는 일을 기획하였고, 자금을 마련해서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육조 혜능대사가 누구인가? 이른바 달마조사가 동쪽으로 와서 세운 선불교의 씨앗을 보림(寶林)의 큰 숲으로 이루신 분이 아닌가. 그렇게 추앙 받던 육조의 정상을 해동의 조그만 나라에서 온 스님이 어떻게 취하여 가져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일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육조 입적 당시, 해동의 한 스님이 내 머리를 취하러 올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하니 무언가 얽히고 설킨 인연의 끈이 있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화개, 雪裏葛花處(설리갈화처)를 찾아

 

삼법화상은 대비(大悲)스님과 함께 육조의 정상을 우리나라로 모시고 와, 꿈에서의 계시대로 智異山 雪裏葛花處(설리갈화처.눈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있는 곳)를 호랑이의 도움으로 찾아 정상을 모셨다고 한다. 지금의 화개(花開. 꽃이 피는 곳)라는 이름은 그 때 얻어진 것이라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쌍계사가 큰 절로서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약 12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중국(당나라)에서 선종의 법백을 잇고 귀국한 혜소(慧昭) 진감(眞鑑)선사께서 폐허에 이른 절터, 육조 정상 모시던 곳에 전각을 짓고 금당이라 하고,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지역에 같은 이름을 가진 큰 절이 두개(경남 고성 옥천사) 있음은 사람들에게 혼동을 줄 수 있다하여 이 곳 옥천사는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쌍계(雙溪)라는 이름은 화개동천과 불일폭포에서 내려오는 물길, 이 두개의  큰 계곡이 절 앞을 흐르므로 그리 이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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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일주문(一柱門)]

 

쌍계사가 범상치 않은 내력을 지닌 절집으로 우뚝 서게 된 데는 지리산이라고 하는 공간적인 이유도 크다 하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드높은 이름을 유지하게 된 데에는 삶의 오롯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체취가 녹록치 않게 많이 서려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하대(下代)의 고운 최치원 선생과 쌍계사와의 관계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으며, 고려 때의 보조 불일스님, 조선 조의 서산대사, 벽암,백암선사 등과 같은 고승대덕의 수행과 불사 기록, 그리고 조선시대 남명 조식,우담 정시한 선생과 같은 유학자들의 기행문에 빠지지않고 등장하는 곳이 쌍계사이다.  특히 당대의 유학자로 잘 알려진 남명 선생과 우담 선생이 선승들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면 눈밝은 이들 서로간의 소통의 길이 느껴지니, 이를 바라보는 後人들의 마음인들 어찌 맑아지지 아니하겠는가

 

[내가 최근 쌍계사를 다녀온 때는 지난 2월 마지막 주, 지리산 자락으로 가족나들이를 하였을 때인데, 작년(2006년) 여름, 절집에서 발간한 책자(쌍계사지 2004년刊)를 선뜻 보내주신 수안스님에게 고마움의 인사도 드릴 겸해서 나선 길이었다. 다음 글에는 쌍계사지(雙溪寺誌)를 기초로 하여 가람의 전각에 대한 설명과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남겼던 시문(詩文)을 차례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2007년 3월 19일/쌍계사 ①

 

두류/조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