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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탐방]

明月雙溪水요, 淸風八詠樓라-쌍계사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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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구층석탑과 팔영루]

 

▣明月雙溪水(명월쌍계수), 淸風八詠樓(청풍팔영루)-쌍계사③

 

-쌍계사의 가람배치- 金堂영역과 大雄殿영역

 

피안(彼岸.불국토) 이르는 경계의 마지막 , 천왕문에서의 통과의례는 그런대로 잘 치러진 듯하다.  멀뚱히 쳐다보며 지나치던 금강문에서와 달리 어느새 합장을 , 부라린 神將(신장) 향해 꾸벅거리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니 말이다.

모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맥이 풀리는 느낌이다. 좁은 길과 門을 잇는 짧은 순례길 , 사방으로 트이는 공간에 쏟아지며 기다리고 있던 밝고 여린 봄빛때문인 듯하다.

 

쌍계사 전체의 가람 구조는 금당영역과 대웅전영역의 영역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대략 공간을 구분할 있는데 들어오는 방향 왼쪽의 비교적 경사가 급한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 금당영역이고, 일주문에서부터 정면 팔영루와 대웅전을 잇는 곳이 대웅전영역이다.

 

다음은 쌍계사지(雙磎寺誌) 나오는 가람배치 설명이다.

 

『쌍계사는 구위(舊位) 금당(金堂)영역과 신위(新位)대웅전(大雄殿)영역으로 구분되는데, 숭정 연간(1628~1644) 중창 이후 진감국사에 의해 이루어진 금당영역, 벽암각성스님에 의해 중창된 대웅전영역 공간으로 분할되는 독특한 가람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청학루,팔상전,금당으로 이어지는 금당영역과 일주문,금강문,천왕문,팔영루,대웅전으로 이어지는 대웅전영역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금당영역은 남북의 축선(軸線) 대웅전은 동서의 축선을 갖게 되어 영역이 서로 직교(直交)하는 가람배치가 형성되었다. 또한 금당영역의 정면에 있던 진감선사대공탑비는 그대로 남향을 하고 있는데 대웅전은 서향을 취하는 파격적인 구도를 나타나게 것이다. 이처럼 영역으로 나누어 배치하게 것은 구위가 터가 좁다는 입지적 조건에 의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금당영역은 국사암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경사가 급하여 가람조성을 하단.중단.상단으로 구성하고 있다. 배경이 되는 산봉우리는 지리산의 주봉인 토끼봉.형제봉으로 이루어지며, 금당영역은 특별히 주산(主山) 의미보다는 남북의 방위개념이 두드러진다.

 

지금의 대웅전영역은 삼신봉을 주산으로 하여 쌍계를 끼고 있는 동시에 서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산지가람을 향성하기에 알맞다고 한다. (雙磎寺誌)

팔영루를 돌아서 오르면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47 이하 탑비) 있는 좁은 마당이 나오고, 정면 계단을 통해 대웅전으로 오르게 된다. 탑비를 중심으로 좁은 공간에는 전각들이 마치 탑비를 수호하듯 둘러싸고 있는데, 팔영루(八詠樓)에서 탑비를 중앙에 두고(대웅전을 바라보고), 왼쪽에 적묵당(寂默堂), 오른쪽에 설선당(說禪堂) 있다. 또한 이곳에서 바라보는 팔영루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적묵당은 참선하는 스님 , 초심자가 수행하는 곳이라 하며, 설선당은 스님들에게 불경을 강의하는 중요한 교육장이라고 한다. 모두 신라시대 진감국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중창과 중수가 차례 이루어졌음은 여느 전각들과 같다.

 

계단 옆의 동백나무, 대웅전 , 산자락의 봄기운과 대나무, 스님과의 만남 , 여러 상념과 기다림으로 나는 한참동안 탑비와 대웅전 사이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일인지 오랜 동안의 머뭄은 정작 산사를 내려온 후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시간이다. 짐작하건 나의 마음이 그리로 날아가지 않았던 날이 하루도 없었던 듯하다.

 

-팔영루, 불교음악, 지리산 문화의 정수가 흐르는 .

 

쌍계사는 예사롭지않은 창건설화, 유구한 역사, 고운 최치원, 남명 선생을 비롯한 先人들의 흔적, 수많은 고승 대덕들의 수행 가람으로 여년동안 명성을 떨쳐왔지만,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의 피해 등으로 절이 겪은 어려움 또한 적지않았다. 폐사에 이를 정도의 폐허더미 속에서도 힘든 중창과 중수의 불사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오늘날과 같은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그윽한 가람으로 모습을 지켜왔다. 엄청난 원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전승되는 기록을 들추어 보면 가람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었다는 것을 있으며, 또한 이를 지키고 보존하려는 사명감 또한 치열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역사와 문화의 깃발을 꽂고 드높인 분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유적.유물의 보존과 문화의 단절을 막으려고 온몸을 던진 선인들의 행적 또한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일이리라. 佛事의 () 세우고 추진한 모든 과정을 전각들의 창건,중창,중수記에서 찾아볼 있음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쌍계사의 수많은 문화유산 가장 으뜸되는 것을 꼽으라면, 마땅히 마당 중앙에 만신창이의 몸으로 힘겹게 서있는 나라의 보물, 진감선사대공탑비라고 것이고 이의를 사람은 없다. 하지만 마당 서쪽, 마치 탑비를 떠받치듯 들어서있는 팔영루가 가지는 문화적 의미와 가치도 결코 적지않다.

 

梵唄(범패)라는 불교음악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보급된 진원지가 바로 쌍계사 팔영루인데, 전각과 관련된 기록 편을 간추려 보았다.

 

『팔영루는 우리나라 불교 음악의 창시자인 진감선사(774-850) 중국에서 불교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민족에 맞는 불교음악(梵唄) 만든 불교 음악의 발상지이며 훌륭한 범패 명인들을 배출한 교육장으로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써 어산(魚山)범패를 작곡했다고 해서 팔영루라고 한다. 신라 문성왕 2(840) 진감선사가 창건하였고 조선 인조19(1641) 벽암 스님이 중수한 1978 고산스님이 완전히 중수하였다.(쌍계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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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불교의 융성에 따라 지리산의 문화는 황금기를 맞았다. 곳곳에 절이 세워지고 차나무를 심고 불교양식에 필요한 음곡과 歌唱(가창) 범패가 뿌리를 내려 꽃피웠다. 이로부터 많은 신라의 인재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바다를 건너 당으로 들어갔다. ()

 

진감선사 혜소는 애장왕 5 당에 들어가 그곳의 神鑑(신감)에게 배웠으며 다시 숭산의 소림사에서 범패의 음곡과 창법을 익혀 당나라에서 유학한 26 만인 흥덕왕 5(830) 귀국하여 상주 장백사(지금의 북장사) 머무르다가 6 만에 그곳을 떠나 지리산 화개골로 들어와 삼법의 옥천사를 수리하여 도량을 크게 넓혔다. ()

 

선사는 평소부터 범패를 불렀다. 옥을 굴리는 듯한 음조와 상쾌하고 哀婉(애완) 깃든 목소리는 능히 하늘을 환희.감동케 하고 인간의 감정을 오랫동안 부드럽게 하여 天人一體(천인일체) 이루게 하면서 은은히 울렸다. 마침내 이를 배우려는 자가 언제나 ()안을  메웠다. 선사는 문성왕 12(850) 19 새벽 그가 77세로 시적하기까지 12 동안 옥천사를 지키며 범패를 가르치기에 잠깐의 틈도 없었다.(: 옥천사는 진감선사 입적 36(정강왕 1) 쌍계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범패 음곡은 ()나라 사람, 曺植(조식) 泉石(천석) 깊고 아름다운 魚山(어산) 수도장에서 頌經(송경) 열중하다가 홀연 공중에서 하늘의 소리가 맑고 哀婉(애완)함을 듣고 곡조를 따서 만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산의 (魚山之妙)라고 불렀다. 이렇게 하여 혜소가 배워와 가르친 범패음곡은 옥천사에서 원류를 낳고 나아가 옥천사는 신라에 범패음곡을 널리 보급시킨 중심지가 되었다(다큐멘타리 르포 지리산 김경렬著)

 

수많은 지리산 기행문에 등장하는 범패의 흔적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 올리거나 공양을 드리는 불사에서는 물론 무용이나 육체적 수련에서도 음곡이 쓰여졌음을 있있는데, 성종 16일간 지리산를 탐방한 濯纓(탁영) 김일손 선생의 續頭流錄(속두류록) 나오는 기록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금대암(金臺庵 함양 마천) 이르렀다.승려 20여명이 가사를 걸치고 범패를 부르며 매우 빠른 걸음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까닭을 물으니 정진도량이라고 한다

 

-묵계사(하동 청암면) 왔다. 20여명의 승려들이 정진하기를 금대암과 같이 하고 있었다.

-산정으로부터 급히 내려와 정오에 의신사(하동 화개) 들렀다. 절은 평지에 있었고 30여명의 승려들이 역시 정진하고 있었다.

 

범패음악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있어온 속악, 고구려 왕산악의 거문고, 대가야 우륵의 가얏고, 지리산 삼신동 옥보대의 피리 등과 아울러 우리민족의 음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특히 세종대왕 때의 영산회상곡, 월인천강지곡과 같은 아악장의 거곡이 나오게 것은 불교음악인 범패의 영향이 매우 컸었다고 한다.

 

팔영루는 위와 같이 우리나라의 범패음악의 발상지로서 문화적인 가치가 크기도 하거니와 청풍팔영루라는 글에서도 느낄 있는 바와 같이 많은 시인 묵객들이 글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어득강 선생은 팔영루 창건 서문을 남겼다.

 

쌍계사지의 번역문을 소개한다.

 

『쌍계사 팔영과 아울러 서문을 짓다(원제 : 雙磎八詠 幷書)-

 

나에 대한 서첩이 多沙(다사. :지금의 河東) 이르러 드디어 쌍계사를 구경하게 되었다. 그때가 연산군 폐조 때라 나라에 일이 많았고, 폐해가 산사에까지 미쳐 절이 비었으니 여러 고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름 높은 절인 쌍계사는 최고운이 일찍이 노닐던 곳으로, 세상에서는 신선의 구역으로 일컬어져 왔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빛을 일어 다만 전각(殿閣) 높이 보일 뿐이요, 石門의 글자와 거북 위의 비문도 사람이 없어 지키지 않고 있었으니 마멸이 두렵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산으로 왕래하는 스님을 만나면 절의 흥폐를 물어보곤 하였다.

 

금년 봄에 내가 병으로 인해 鐵城(철성.:현재의 경남 고성) 마을에 머물러 있을 , 이전부터 안면이 있는 호남의 仲暹(중섬)스님이 찾아와서 말하였다. 쌍계사는 1509(중종4) 기사년부터 승려들이 복구하기 시작하였고, 이번에 새롭게 수축하였는데, 貧道(빈도) 이를 관장하였습니다. 또한 남은 재산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나에게 팔영루를 지을 것권하면서, 明月雙溪水(명월쌍계수), 淸風八詠樓(청풍팔영루)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비록 중국의 일이지만, 우연히 이름까지 절과 같으니 () 세워 본받음이 좋지않겠는가하였습니다. 이에 빈도는 다시 힘을 쏟아 비석 앞에 누를 일으켰고, 작은 () 뒤에 세워 명의 승려들에게 비석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제 진주의 貳車(이차) 金侯(김후) 뜻을 따라 樓記(루기) 지어줄 것을 청하는 바입니다,

 

나는 기쁨을 참지 못하면서 대답하였다. 중국의 쌍계사에는 이미 8경이 있도다. 어찌 우리나라의 쌍계사에만 없겠는가? 동안의 절은 湖海(호해) 부딪힘으로 작자가 없었던 것이 두려웠을 경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니, 지금 지은 것을 팔영이라고 이름하면 되지않겠는가? 스님은 이미 부지런히 일을 하였고, 김후 역시 牧伯(목백.:牧使) 韓公(한공) 더불어 비용을 도와 이루게 함으로써 崔仙(최선 :최치원) 유적을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참으로 것을 좋아하는 군자가 아니겠는가?

 

악양현의 鈒岩(삽암) 내가 노년을 보내고자 하는 곳으로, 스님과 더불어 수일 동안 왕래하면서 서문과 함께 여덟 수의 絶句(절구) 지었다. 스님의 글에는 좌우수가 모두 능하여 판자에 쓰는데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목백의 이름은 士价(사개)이고, 통판은 良範(양범)이다.

 

[출전 咸從世稿. 어득강(魚得江):;1470~1550. 본관 함종 자는 자순. 자유, 호는 권포당. 1492(성종23) 진사를 거쳐, 1495(연산군1) 문과에 급제. 여러 외직을 거쳐 1529 대사간을 지냄. 1549(명종4)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후로는 일체 출사하지 않았다]

 

또한 청허당 휴정스님의 지리산 쌍계사 중창기 역시 마음을 흔드는 없지 않으니,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 이에 중수할 일을 조정에 올렸더니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옳다 하였다. 예조에서 금표를 세워 5 이내에서 불을 놓거나 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였는데, 3년이 지나지 않아 거주민들이 저절로 교화되고 새들이 나쁜 울음소리를 바꾸었으며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이 완연히 옛날과 같았다. 이에 팔영루 5칸의 지붕을 다시 잇고, 비석의 앞뒤에 돌을 쌓아 臺를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드니, 달밤과 서늘한 아침에 연꽃을 감상하고 대나무를 보며 홀로 소요하게 되었다.()

 

, 우뚝한 전각이 마치 天宮(천궁)과도 같았다. 이에 팔영루의 맑은 바람은 고운의 仙骨(선골) 다시 깨우쳤으며 쌍계수의 밝은 달은 진감의 禪燈(선등) 다시 밝혔으니, 마음을 편안하게 쉬고자 하는 사람들은 만리 밖에서도 바람처럼 달려왔고, 기운을 기르고자 하하는 선비들은 천지사방에서 구름처럼 몰려왔도다. 아득한 멀리에 저녁노을 지고, 호수 위로 외로운 봉우리가 반쯤 비치며, 구름과 붉은 나무 가로 쌍의 푸른 학이 한가로이 가고 오니 또한 쌍계사의 뛰어난 경치로다.()

 

불교를 배우는 사람은 진감선사와 같이 후라야 儒가 儒로 이유를 알고, 유교를 배우는 자는 고운과 같이 후라야 佛이 佛로 이유를 알리라. 그러므로 진감을 아는 자로서 고운 만한 이가 없고, 고운을 아는 자로서 진감 만한 이가 없다 하는 것이다.

() 그러나 名이라는 것은 實相의 손님인지라(:莊子 逍遙遊: 名者 實之賓:) 고운과 진감이 취한 바는 아니니 유교를 말하는 사람도 그릇되고, 불교를 말하는 사람도 그릇되며 유교와 불교를 함께 말하는 사람도 그릇되도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實相만을 구하기 때문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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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의 , 봄꽃 향기 그윽하고 맑은 바람소리가 대나무를 스치는 팔영루를 떠올린다. 僧俗과 儒佛을 막론하고 완성인으로의 삶을 갈구하며 바람처럼 살다간 선인들의 체취를 더듬으며, 나의 가슴 찌르르 울릴 소식 하나 기다려 본다.

 

다시 돋아난 도마뱀 꼬리처럼, 제자리에 있는 숙제아닌 숙제가 참 부담스럽다.

 

-계속-

 

두류/조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