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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제국 伽倻/가야사 자료

무너진 돌탑이 왕릉을 지나 사적이 되고

<"무너진 돌탑이 왕릉을 지나 사적이 되고">

 

산청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 왕산 기슭에 자리잡은 '전(傳) 구형왕릉'(仇衡王陵). 방단(方壇) 석축인 이 구조물은 불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조선후기에 신라왕릉이라는 전설이 등장하고 급기야는 금관가야 마지막왕인 구형왕이 묻힌 곳이라는 전설이 보태져 1971년 2월9일에는 사적 214호가 됐다.

  <<문화부 기사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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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영 교수 "구형왕릉 조작화" 과정 구명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 왕산 기슭에는 지금은 '전(傳) 구형왕릉(仇衡王陵)'이라 일컫는 방단(方壇) 석축 구조물이 있다. 이것이 무덤이 아닌 것만은 명백하며, 현존 구조로 보아 불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비탈면에 쌓은 이 석축물은 특별히 가공하지 않은 잡석을 이용해 방형 기단을 쌓고 전면 기준으로 7층에 이르는 단을 만들었다. 한데 제4층 전면 중앙에는 감실(龕室)이 있다. 그 주변에 마침 왕산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사실로 볼 때 석탑일 가능성을 한층 높여 준다.

   그럼에도 이곳이 가문 중시조인 김유신의 증조부이자 금관가야 마지막왕인 김구형(金仇衡)이 묻힌 왕릉이라 해서 조선 정조 22년(1798) 이래 이곳에 대한 성역화를 추진한 김해김씨 종중은 마침내 1971년 2월9일 이곳을 대한민국 국가사적 214호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가문은 여전히 불만이다. 이곳이 구형왕이 묻힌 곳이 명백한데 왜 전설 혹은 속설을 의미하는 '전'(傳) 자를 굳이 붙여야 하냐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종중은 1987년에는 문화공보부장관에게 국가사적명 '전 구형왕릉'에서 '전' 자를 떼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한국고대사 전공인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가 최근 발간된 역사잡지 '대구사학' 86집에 투고한 논문 '금관가야 '구형왕릉' 전승과 역사화 과정'은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아니라 과거에 대한 현재의 일방적인 독백"임을 구형왕릉이 "조작"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구명했다.

   권 교수에 의하면 '구형왕릉'은 "만들어진 역사"의 전형이다. 권 교수는 불탑임이 명백한 이 석축구조물이 처음으로 문자화해서 나타난 것은 조선초기에 편찬된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이다. 여기서는 이 지역 전승임을 전제로 "왕릉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 증보문헌비고에 와서 민간전승을 인용하면서 "신라왕릉"이라고 하더니, 급기야 1864년 무렵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에 와서는 "구형왕릉"으로 둔갑한다.

   이런 국가편찬 지리지 흐름과는 별도로 산청 현지에서는 1798년에 갑자기 지금의 '전 구형왕릉'이 금관가야 마지막왕인 김구형을 묻은 무덤이라는 사중기(寺中記. 절에 내려오는 기록)가 등장하고, 구형왕 부부가 입었다는 옷과 그들의 영정까지 출현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김해김씨 종중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대대적인 '구형왕릉' 일대 성역화에 돌입해 사당을 건립하고 묘역을 정비하기에 이르렀다.

   권 교수는 불탑에서 왕릉으로, 왕릉에서 신라왕릉으로, 신라왕릉에서 다시 구형왕릉으로 변해간 궤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금관가야 전체를 들어 신라에 비친 구형왕의 이미지 또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모했다는 사실도 아울러 밝혀냈다.

   이에 의하면, 구형왕은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산청에 들어온 인물이거나, 혹은 백성의 안위를 걱정해 자발적으로 신라에 나라를 바친 성군(聖君)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무렵 김구형에게는 '양왕'(讓王. 나라를 양보한 왕)이라는 시호까지 추존된다.

   권 교수는 "사람들은 종종 역사는 '발견된'(discovered) 것이 아니라 '발명된'(invented) 것이라 말한다. 금관가야 구형왕릉의 전승과 역사화 과정에서 이 말을 징험(徵驗)할 수 있다"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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