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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연곡동천과 화개동천-地名에 나타난 불교⑦

▣地名에 나타난 한국불교/불일회보1988/12/1

 

♧지리산과 불교-7

 

♧연곡동천(鳶谷洞天)과 화개동천(花開洞天)

 

♣글/白雲/스님/부산 미륵사

 

-[전편에서 계속]

다음 연곡동천(鳶谷洞天)에는 연기조사의 어머니가 주석하신 연곡사(鳶谷寺) 있어서 동천의 이름도 연곡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연곡사는 이웃 화엄사나 쌍계사와 비견할 만큼 대찰(大刹)이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승군본부(僧軍本部)여서 왜군이 모두 불태웠다.

 

여기서 배출된 고승으로는 서산대사의 제자인 청매조사(靑梅祖師) 있고 주석하신 스님으로는 숭인장로(崇仁長老). 서산대사(西山大師). 소요선사(逍遙禪師) 등이 돋보이며 임란 소요선사가 중창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현각(玄覺)선사가 오래 주석하였는데 경내에 현각선사의 비부와 부도가 남아 있다.

 

연곡사에서 깊숙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을 피아골(彼我谷)이라 이름하며, 반야봉과 노고단 거봉에서 흐르는 물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 계곡의 경관이 뛰어나다.

 

그리고 피아골에는 무착대(無着臺) 있는데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고운(孤雲) 선생이 여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피아골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반야봉과 노고봉 거봉(巨峰) 산신이 서로가 계곡을 계곡이다 계곡이다하고 다투었다 하여 피아곡(彼我谷)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그만큼 피아골의 계곡은 경관이 천하 제일이라서 반야봉과 노고봉의 산신들마저 서로가 자기네 계곡이라고 우겼다는 것이다. 임란 때에는 원근 백성 만명이 피아골로 피난해 왔는데 진주성 싸움에 승군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왜군이 습격하여 만명의 부녀자며 노약자들을 학살하여 피가 계곡을 붉게 물들게 했다 하여 피아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아무튼 왜놈들의 잔혹함은 예나 지금이나 근성을 버리지 못한 우리 배달민족을 괴롭히는 족속들이 아닌가 한다.

 

다음으로 오대동천의 오른쪽에 자리한 화개동천(花開洞天) 오대동천 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갖고 있고 이야기거리도 가장 많은 곳이다.

 

의상대사의 제자 삼법화상(三法和尙) 당나라에 가서 육조혜능조사(六祖慧能祖師) 두상(頭相) 모시고 귀국하여 어디에 모실까 하고 망설이던 , 꿈에 이인(異人) 강주(康州) 지리산으로 가서 한겨울에 칡꽃이 곳을 만나거든 거기에 모셔라하고 계시해 주매 화개동천으로 찾아오니 과연 눈이 산야를 뒤덮었는데 곳에 칡꽃이 피어나 있는 지라, 자리에 모신 것이 바로 현재의 육조영당(六祖影堂)이다. 이처럼 한겨울에 칡꽃이 피었다 해서 골자기를 화개동천이라 부르게 것이었다.

 

삼법화상이 가신 백오십년 년에 진감국사(眞鑑國師) 크게 중창하고 쌍계사(雙溪寺) 이름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화개동천에도 임란 전에는 수백개의 대소사암이 골짜기마다 들어차서 가위 불국세계를 이루었으나 지리산 주위 백리 가운데 가장 복된 길상(吉祥) 자리가 바로 화개동천이다.

 

쌍계사에서 여리 올라가면 왼쪽으로는 칠불암(七佛庵)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곧장 올라가면 광활한 별천지가 나오는데 곳을 의신동천(義神洞天)이라 일컫는다. 곳에는 동천의 중앙에 의신사(義神寺) 있고, 십여 개의 암자가 부채처럼 곳곳에 퍼져 있다.

 

예로부터 의신동천에는 신선이 살고있다고 믿고있는 터인데 서산대사도 과거에 낙방하고 신선을 찾기 위해 동료 서넛과 이곳에 내려왔다가 당대의 선지식인 숭인장로를 만나 중이 되었던 것이다.

 

의신동천의 원통암(圓通庵) 일찌기 서산대사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아담한 암자로서 임란 직후 부휴(浮休)대사 많은 선지식들이 모여 사교(四敎) 여러 조사어록을 판각(板刻)하여 절인 쌍계사로 옮겨 보관하도록 유서 깊은 가람이다. 지금은 모두 빈터에 잡초가 우거져서 절터를 찾기에도 힘들게 되었으니 여기서도 무상(無常) 실감하게 된다.

 

화개동천은 신라의 화랑들이 수련하던 곳이다, 신흥동에 있는 신흥사(新興寺) 화랑의 총수(總帥) 원효(元曉)대사가 계시면서 수천명의 화랑을 훈련시켜서 고구려와의 전쟁에 보냈던 것이다. 화개동천에서 무술 훈련을 마친 화랑은 화엄사로 가서 31칸이나 되는 해회당(海會堂)에서 불교 수련을 쌓고, 수련을 마친 화랑은 노고단(老姑壇) 정상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신명(身命) 바칠 것을 하느님과 단군성조(檀君聖祖) 맹서하고 가호(加護) 기원(祈願)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화랑만이 최일선에 나가서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루는데 신명을 초개같이 바쳤던 것이다. 이렇듯 화랑의 훈련과 수련은 모두 원효대사의 주도하에 실시된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주

[위의 글은 부산 미륵사 주지스님이신 백운(白雲)스님이 1988년 12월1일 불교관련 잡지 불일회보(佛日會報)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정설(定說)로 받아들여지거나 혹은 전해 내려오던 지리산의 역사.이야기와는 다소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만, 나름대로 논리와 의미를 지닌 글이라 여겨지며, 특히 수많은 사암(寺庵)이 존재하며 불국토(佛國土)를 이루었을 지리산에 대하여 불교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관련하여 내린 여러 곳의 지명 해석은 무척 독특하고 흥미롭기까지 합니다. 재작년, 약 20년 전 지면(紙面)을 통해 나왔던 이 기록을 뒤늦게 발견하고 흥분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뒷날의 공부를 위한 자료로 삼고자 기고문을 편집하여 이곳에 옮겨놓습니다.]/[두류]

 

■백운스님 약력
·1934년 전남 生
·53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비구계 수지
·60~82년 영동 중화사, 포항 오어사, 경기 영월암, 김해 장유암 주지 역임·범어사 지리산 토굴 등지에서 정진
·71~87년 화엄사, 범어사, 송광사 강사
·현재 부산 미륵사에 주석
·<양치는 성자> <진묵대사> <부설거사> 등 소설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