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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탐방]

엄천사(嚴川寺)

嚴川寺

한중기 기자 hana@gnnews.co.kr
2001-10-24 13:28:54

찬란했던 佛敎 . 茶문화 산실
수려한 山勢 품은 큰 明堂

지리산 북쪽 함양 땅에 엄천사(嚴川寺)란 큰 사찰이 있었다. 그리고 엄천사 북쪽의 대나무 밭 주변에 대규모 차밭인 함양다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엄천사 옛 터엔 부도만 남아있고 점필재 김종직이 백성들의 다공(茶供-차의 공납)민폐를 없애기 위해 조성했다는 함양다원은 흔적조차 없이 자취를 감췄다.
천왕봉과 반야봉 등 지리 주릉 북쪽의 칠선골과 한신골, 뱀사골의 계류를 한데 모아 흐르는 물줄기가 용류담을 거쳐 엄천을 이루는 휴천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함양군 휴천면에 절골이란 마을이 있다. 큰절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마을이름이다. 행정구역으로는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에 해당한다. 남호리는 동호, 원기, 한남마을로 나뉘는데 원기마을이 여기서 말하는 절이다. 엄천사가 있었던 절골엔 그러나 이 일대에 대규모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할 몇 가지의 자취만 남아있다.
엄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는 가락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릉이 있는 산천군 금서면의 왕산(932m)이 버티고 있으며 북으로는 절골마을을 얼싸 안은 듯 두 팔을 벌린 형상을 하고 있는 활인산다.
서쪽으로는 유명한 법화사지가 있는 법화산과 삼봉산 등 수려한 산세를 하고 있어 누구라도 큰절이 하나쯤 있을 법한 자리라고 할만한 명당임에 틀림없다. 수려한 산세사이로 엄천의 물줄기가 가로질러 흐르니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엄천사가 있던 절골마을에 들어서면 단지 절만 사라졌다 뿐이지 이내 절의 풍경을 느낄 수 있을 정도 지세를 자랑한다. 엄천사는 지리산자락의 수많은 사라진 대찰 가운데 단속사 등 몇 안 되는 거대 사찰로 전해진다.
이 절은 점필재가 조성했다하는 함양다원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당나라로부터 차가 들어와 지리산에 심겨진 59년 후인 883년 신라 헌강왕 9년에 화엄사에 있던 결언선사가 창건했다.
창건 당시 엄천사에는 왕비가 초하루와 보름이면 꼭 찾아와 기도를 올린 절로 유명하다고 전해진다. 엄천사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번창했으나 조선 중엽 임진란으로 소실했다가 복구된 뒤 다시없어 지기까지 650여 년 동안 지리산의 불교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다.
이 절은 500년 전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 지리산 등산에 나설 당시까지도 고색창연 한 사찰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손의 "속두류록"에는 엄천사에 대해 기록한 부분이 남아있다.

"앞으로 5, 6리를 더 나아갔다. 왕대 숲 속에 고색창연 한 절이 있었다. 엄천사라는 절이었다. 땅이 평평하고 넓어 가히 집 짓고 살만한 곳으로 생각되었다."

오랜 세월을 지내온 엄천사는 왕대나무 숲 속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점필재 김종직이 엄천사 주변에 함양다원을 일궜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 왕대나무숲이 함양다원 터로 보인다.
임진란으로 소실되면서 엄천사는 숱한 불교 유적들만 남기고 자취를 감추고 말아 지금도 절골에는 땅을 조금만 깊게 파면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부도와 석등조각, 주춧돌 등이 그대로 남아 있을 정도이다.
이 마을에는 탐허, 송화라고 각각 새긴 명문이 2기의 부도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원래 3기의 부도가 남아있었는데 10여 년 전 1기는 없어지고 지금은 2기만 남아있다. 특이한 것은 이 부도를 가져가거나 땅속에 묻는 등 손을 대기만 하면 탈이 나 아무도 함부로 처리하지 못하고 남아 방치돼 있는 대로 그대로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는 것이다.
마을주민들이 작은 부도의 받침대에 쓰려고 주춧돌 하나를 운반해 그 위에 부도를 올려놓았는데 돌에 이끼 하나 돋아나지 않고 화강암 본래의 빛을 아직도 깨끗이 간직하고 있다. 집집마다 돌절구며 비석의 받침대, 주춧돌 등 옛 유물이 없는 곳이 없다. 하물며 마을주민들은 이 곳의 모든 돌이 엄천사에서 쓰던 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엄천사 터에는 일제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불상이나 가치 있는 석물들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일제가 절의 입구 주춧돌이 있던 자리에 주재소를 설치하고 금동불상과 절의 수많은 유물들을 마구 옮겨갔다고 마을주민들은 증언하고 있다. 다행하게도 엄천사에 있던 탑인과 엄천사기 등 일부 유물은 인근의 법화사 등지에 보관돼 있다 한다.
엄천사 옛 터에는 그나마 부도와 석물 등 다소의 유물이 남아있어 절의 체취를 아직도 느낄 수 있지만 함양다원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어 안타깝다. 엄천사 숲 속에 조성됐었다는 함양다원은 점필재 김종직의 남다른 애민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1471년 조선 성종2년 함양군수로 부임한 점필재는 차 한 톨 나지 않는 이곳에 조정이 차 세를 부과해 주민들이 크게 고통을 받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종직이 쓴 점필재집 다원이수병서에는 당시의 차 세로 인한 군민들의 고통을 이렇게 묘사해놓고 있다.
"상공하는 차가 본군에서는 나지 않는데 해마다 백성들에게 부과해 백성들은 전라도에 가서 쌀 1말에 차 1홉의 비유로 값을 쳐주고 사온다. 내가 처음 이 고을에 부임해와 그 폐단을 알고는 백성들을 몰아 치치 않고 관에서 구해 상납했다. 일찍이 신라 때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얻어다가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을 보았는데 이 고을이 그 아래 있으니 어찌 신라 때의 그것이 남아있지 않으랴 생각하고 나이 많은 이를 만날 때마다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과연 엄천사 북쪽 대나무 숲 속에서 차나무 몇 그루를 얻었다. 나는 몹시 기뻐 곧 그곳에다 다원을 설치하고 근방 백성들의 발을 사서 관전으로 보상해주었다. 몇 해가 안가 차나무가 잘 번식해서 다원 안에 가득 찼다. 4-5년만 있으면 넉넉히 상공 할 수량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점필재는 그리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게 된 기쁨에 백성들이 기를 펴고 살아갈 수 있게 돼 기쁘다며 시를 짓기도 했다. 점필재는 애민정신과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조선조는 집권층인 훈구파로 사림파로 대칭 돼 있었는데 사림파를 주로 영남사람이 주축이 돼와 주로 벼슬등 정계진출을 않고 향촌사회서 은거, 성리학 연구 등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점필재 김종직이 애민사상을 바탕으로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을 시도, 그 계기를 마련한다.
함양다원의 조성은 "차에 대한 관인의 착취"를 점필재가 지적하고 백성을 구하겠다는 선비정신에서 출발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 만큼 점필재 김종직의 향후 중앙정계 진출은 이미 예견된 사실이다. 그러나 사림파의 급격한 부상은 훈구파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엄청난 피의 제전인 두 차례의 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백성들의 고통을 구하기 위한 점필재 등 사람파의 선비정신은 무참히 쓰러지고 그후 영남사림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 산수자연을 즐기며 심성수양에 정진하는데 영남사림들에게 있어 선망의 유람장소는 두류산, 즉 지리산이었다. 유독 14-15세기에 지리산을 유람한 선비들의 두류산기행기록이 많이 전해져 오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신라시대의 불교문화 전래와 차 문화유입의 현장이었던 엄천사 옛 터. 650여 년 동안 융성했던 사찰과 사찰이 쇠퇴하기 바로 앞서 대규모 다원으로 조성됐던 엄천사 대나무 숲 속의 함양다원. 엄천사와 함양다원이 지금은 모두 자취를 감췄으나 이들이 후대에 전하고 있는 의미는 매우 깊다 아니할 수 없다. 이 땅 민중의 삶과 애환이 그대로 묻어 전해져오는 지리산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경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