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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종주]

[스크랩] 태극능선, 발길 닿는대로 걷다 - 제 3일차

지리산 태극종주 제 3일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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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자 : 두류/조용섭, 만강/김정구
♧답사코스 : 조개골 3거리-쑥밭재-하봉-중봉-천왕봉-장터목-세석대피소
♧운행시간
*8.16일
08:00 기상
10:10 산행시작
10:50 갈림길(전날 내려선 곳)
11:05 갈림길(큰바위 있는 곳)
11:49 쑥밭재/능선3거리 되돌아 갔다 옴/휴식
12:25 출발
13:23 국골 4거리/휴식
14:45 하봉/휴식
15:13 헬기장/중식/휴식
17:00 출발
17:45 중봉/휴식
18:35 천왕봉
19:50 장터목/휴식
20:20 출발
22:30 세석대피소/석식

*8월17일
00:40 취침

♧답사후기


간밤, 아니 새벽녘이라는 표현이 옳겠다. 이 깊은 계곡의 잠자리까지도 비는 어김없이 찾아
와 한바탕 퍼부으며 또 우리를 깨우고 갔다. 잠을 자며 플라이에서 벗어났던지 침낭 한쪽이
비에 젖어버렸다.

기상시간은 오전 8시, 4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했지만 몸도 개운하고 머리도 맑은 편이다. 다
만 걱정되는 것은 안개비가 스멀스멀 내리는 날씨였다. 원하는 대로 몸을 씻고 아침식사를
하고 배낭을 정리하니 거의 10시가 다 되어간다.

산길을 이틀동안 걷는 사이, 나머지 이틀동안의 걸음으로는 태극능선종주의 종점인 덕두산
까지의 진행은 어렵겠다는 것을 느꼈다. 이번 종주산행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3일차는 최
소한 세석, 4일차는 성삼재까지'라는 운행 목표를 세웠다. 다만 그러기위해서는 체력도 체
력이지만 기상상태가 얼마나 받쳐줄 지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이른바 조개골 3거리 입구에서 3일차 산행을 시작한다. 이 길은 매년 초여름이면 산행목적
지를 치밭목으로하여 쑥밭재에 오른 뒤, 쑥밭재-국골4거리-하봉에 이르는 숲에서의 '황홀
한 풀꽃들의 향연'을 보기위하여 자주 오르던 바로 그 길이다. 늦여름 숲의 모습은 어떠할
까?

산죽밭 사이 산길로 들어서니 어제 밤 더듬거리며 내려 온 길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매우 익
숙한 길이다. 계절을 달리하거나 혹은 낮과 밤을 달리하면서 만나는 산길의 느낌이 그렇게
다를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자주 다녔다는 것'과 '잘 안다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하겠다.

개스가 자욱한 숲의 모습은 신선하고도 정겹다.


출발한지 얼마되지않아 우리가 어젯밤 내려 온, 즉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을 만나고,
우리는 계곡과 나란히 나있는 길로 곧장 진행한다. 출발지로부터 약 60분을 진행하면 산죽
밭 오름길 중턱에 그 산자락의 지형과는 잘 어울리지않는 거대한 검은 바위가 나온다. 여기
서 왼쪽으로 거의 90도 정도로 방향을 틀어 진행하는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이 조개골 지류
의 상단부로 이어지는 길이고, 바위에서 우측(정면) 오르막으로 진행하면 쑥밭재와 능선3거
리 사이의 능선으로 올라서게된다. 바로 이 길이 어제 밤, 내가 내려 오게 되는 길로 착각한
길인다.

먼저 가던 만강이가 땡삐집을 건드렸나보다. 좁은 길위에 땡삐네 식구들이 모두 나와 낮게
날며 떼를 지어 경계 겸 시위를 하는데, 그 숫자가 장난이 아니다. 예전, 샌들을 신고있다가
땡삐에게 발등을 쏘여 처참하게 당하고 하루 일정을 모두 취소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는
거의 공포에 떨며 그네들의 화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약 5분정도를 기다렸나보다. 하나둘
씩 그 공포의 시위를 접고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네들이 거의 다 사라질 무렵 폴짝 그 곳을
뛰어넘어 산길을 달려 멀찌감치 도망을 쳤다. 그리고 만약 땡삐에 쏘였다면 암모니아를 발
라주어야하는데, 그 임시처방은 모두들 다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믿고 더 이상 언급을 하지않
겠다.

계곡의 물소리가 시원하더니 이내 큰 암반위로 흐르는 계곡 상단부를 만난다. 이 아침 이렇
게 덤(보태기)산행을 하게되었지만 나름대로 갈림길 개념을 정확하게 하게된 점에 우리는
만족해했다. 세상 모든 일이란 손바닥과 손등처럼 양면성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고로 '절대
적으로 옳고 그름은 없다'라는 생각으로 비약을 하게되는 것은 내가 너무 자의적으로 생각
하는 것일까?

계곡을 버리고 우측으로 올라서면 이내 쑥밭재가 나온다. 예전보다 공간이 훨씬 넓어졌고
어제 밤 즈음 야영한 듯한 흔적도 보인다. 시그널도 많이 붙어있는데 누군가는 페트병을 매
달아 놓았다.

[쑥밭재에서]



여기서 그대로 마루금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어제 내려섰던 능선3거리부터 여기까지의 산
길이 건너뛰게 되는 경우라 어제 밤 하산 지점으로 내려가보았다. 다시 올라오면서 재어보
니 약 12분 거리, 오름턱을 두번 정도 올라야하는데, 만강이는 두번째 오르는 길을 보고서
계속 오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되돌아 온 듯하다.

이제 오름길은 길게 이어지며 주능선쪽으로 다가서게된다. 역시 이 숲길은 나의 기대를 저
버리지않았다. 개스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정갈한 숲은 내가 산에 들어와 있음
을 행복하게했고, 숲의 바닥에는 은밀하게 가을을 준비하는 풀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있다.

[흰진범]


뭔가 있어야 될 것이 없었다. 매미소리가 전혀 들리지않았다.

국골 4거리에 도착하자 몇년 전 겨울 이 곳으로의 오름이 생각났다. 진행방향 오른쪽의 전
망대에 올라 반야봉쪽으로 펼쳐진 노을을 보고 황홀감에 전율하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나는 그랬다. 반야봉에서 낙조를 맞이하기보다는 멀리 동부자락에서 반야봉을 바라보며
낙조를 바라봄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여전히 하봉까지는 이따금씩 평탄한 길도 나오지만 오름길로 이어진다. 주위는 온통 개스
에 꽉 막혀 극히 제한된 주변의 시계(視界)말고는 전혀 조망을 할 수가 없다. 갑자기 비가 내
리는데 오늘따라 하봉이 왠지 쓸쓸해보인다.

바위봉우리 정상 한쪽에서 산오이풀만이 비바람에 몸을 맡긴 채 봉우리를 찾는 우리를 무심
히 맞이하고 있었다.

[하봉의 산오이풀]


바위길이 다소 나타나긴해도 다음부터의 길은 하봉헬기장이나 중봉이 가가워졌다는 생각
에 힘들다는 생각을 잠깐 잊어버릴 수 있다. 모처럼 태극능선을 덕두산에서 이어가는 포항
의 산꾼들을 만났는데, 배낭이나 산행복장, 그리고 산행예절등을 보았을 때 제대로 된 산꾼
들임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봉헬기장에서 치밭목쪽으로 난 길을 조금만 내려가면 샘이 있다. 여기서 식수를 구하고
점심을 먹기로 한다. 헬기장 주변의 풀밭에도 풀꽃들이 지천인데, 꽃잎들의 색깔이 그리 깨
끗하지가 못해 다소 아쉽다. 계속 찌푸리고 있으면서 자주 빗방울을 뿌리는 날씨에 점점 신
경이 쓰인다.

하봉헬기장에서 중봉으로 오르는 길에서 엽기적인 차림의 남자를 만났다. 탄띠처럼 두른 수
통3개, 장보러 가는 사람처럼 꾸린 배낭에, 또 들고 다니는 쇼핑백에 가득 한 짐. 그리고는
아예 산길에 퍼지르고 앉아있다. 가늘기는하나 비가 점점 내리는게 걱정이 되어 치밭목이
가까우니 빨리 내려가서 쉬라고하니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한다. 주저없이 비스킷 작은 포장
3개, 쵸코렛과자 2어개 등 우리의 비상식을 챙겨주니 이 양반 한 술 더 뜬다. 배낭의 옆주머
니에 꽂아 둔 손바닥만한 소주병에 든 게 물인 줄 모르고 막무가내로 술 좀 달란다. 물이라
고 몇 번 이야기를 해도 믿지를 못했는지, 이 양반 나중에는 물 좀 달라며 그 병을 나꿔 채
가버린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연유로 산에 올랐는 지 알고싶지도 또 상관하고 싶지도 않
다. 오늘 하산하는 사람도 아닌 우리에게서 조그마한 음식을 얻었으면 예의라도 표시할 수
있어야지 막무가내로 떼쓰듯 술을 달라는 그 모습에서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폭우정도만
아니라면 잠을 잘 수 있는 도구는 다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마음쓰지않고 다시 산길을 나섰
다.

중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안부로 내려서는데, 안부 옆에 컨테이너박스가 들어서있다.
중봉골 사태지역을 보수하기 위하여 인부들이 묵을 숙소인 것 같다고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
이 있다. 박스옆에는 집수정이 있고, 중봉샘쪽으로 노란 도수관이 이어져있는 듯하다.

[중봉에서 만강]

[중봉 안부]


이제 비도 제법 뿌리고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이파리가 머금은 물들이 비처럼 흩날린다. 배
낭커버를 했지만 배낭도 다 젖었고 옷도 다 젖었다. 다행히 아직 신발안은 젖지않아 걸을만
하다.


천왕봉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사위는 어두워졌고, 바람이 몹씨도 세차게 불어제낀다. 잠시
정상석에 손을 대고 인사올리고 기념 촬영을 한 뒤 바로 내려선다. 비는 더욱 많이 뿌리기
시작한다. 더 지체할 수가 없다. 정말 오랜만에 들런 천왕봉을 그렇게 정신없이 내려오게
될 줄은 생각치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어 쫓겨 내려왔다는 표현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천왕봉에서]


장터목으로 향하는 도중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하지만 랜턴을 켜지않고그대로
진행한다. 바위길이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걷는다. 제석봉 옆을 지나가면서 맞이하는 바람
도 엄청 세차다. 서서히 추위가 몸을 에워싸는 것을 느낀다.


장터목은 그야말로 돗때기 시장이다. 일기가 좋지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휴가를 산에서
보내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서인지 산장은 이미 꽉찼고, 앉아서라도 잘 사람은 신고하라는
방송이 계속 나온다. 취사장은 그야말로 북새통으로 발 디딜 틈도 없다.

아, 주능선 앵벌이....
너무 정신없이 분주한 그 곳에서 우리는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만다. 그리고 말없이 랜턴을
켜고 세석으로 향할 준비를 한다. 장터목을 벗어나려는 순간 일단의 젊은 남녀들, 아니 그
들 중 여자들이었다. 어둔 밤, 비오고 짙은개스가 차있는 산길을 걸으려는 우리를 보고 격려
의 구호를 외쳐준다.

"화이팅!!"

장터목에서 세석... 언제나 1시간 30여분 정도면 쉽게 다닐 수 있는 구간이다. 짙은 개스는
만강이의 Led랜턴 불빛이 뻗어나가는 것을 허락치않았고, 내 랜턴은 비교적 빛이 잘 뻗어나
가긴했지만 시계(視界)를 허락하는 공간이 너무나 좁다. 특히 바위구간을 내려서거나 올라
설때는 미끄러워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잘 나있는 능선길도 더듬거리며 걷기는 마찬가지이
고. 진행하는 속도는 생각치않고 평소에 걸리던 시간만으로 도착 예상을 하다보니(심리적
인 요인) 가도가도 촛대봉이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바람이 몰아치
는 촛대봉 허리 이정표 있는 곳으로 올랐다.

그래 이제 다 왔다하는 안도의 숨을 쉬고 내려서는 돌길...
그런데, 그 목가적인 모습의 세석대피소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않았다. 짙은 안개때문
에 불빛조차도 전혀 보이지않는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불을 다 끄고 취침에 들어간 것 같
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대피소의 기능이란게 여관의 역할만을 하는 게 아닐진
데, 오늘같이 기상상태가 좋지않은 날은 오히려 불을 더 밝혀놓아야하지 않겠는가!하며..

괜한 짜증을 내며 걸어내려가는데, 참말로 그 짧은 길이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도 멀게 느껴졌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대피소를 10여미터 앞 둔 곳에 이르러서야 세석대피소의 불빛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피소 앞 가로등들을 모두 소등한 것이 아니라 짙은 개스에 아예 불빛이 뻗어나
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3명 정도가 비닐을 덮어쓴 채 자고있는 대피소 아래층 공
간을 가로질러 취사장으로 들어갔다. 이미 대피소의 건물안은 불이 다 꺼져있다.

이제 나로서는 오늘밤이 산중에서의 마지막 밤이 된다. 그리고 만강이는 모레 5일 째를 더
걸어 능선종주를 마감하기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취사장에는 단 한명도 보이지않고 우리처럼 조금 전에 도착했다며 왔다갔다하는
샌님(?)처럼 생긴 남자밖에는 없다. 허.. 이렇게되면 '소주앵벌이작전'은 어떻게 되는 것인
가...

무슨 시장이 형성되어야 품을 팔던 지, 비벼보던 지, 읍소를 하던 지를 시도해 볼 것이 아닌
가? 솔직히 고백하건데, 명색이 지'산의 교감이라는 사람은 그 날 취사장 받침대 위에 놓여
있는 짐들을 다 뒤져보았다. 정말.. 그날, 세상의 범생이는 모두 세석으로 모아버린 것 같았
다. 그 것은 분명 운명의 장난이나 농간이 있었던 것임이 분명하다고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
다.

더 이상 미련 갖지말자며, 자책하는 만강이를 위로하며, 그 너른 취사장 테이블을 하나씩 차
지하고 우리는 깊어가는 세석대피소의 여름밤을 안타깝게도 그리 속절없이 보내고 만다.
그 날 그 안타까운 심정이 새어나가게하지않으려고(만강이가 미안해 할까봐) 이빨로 쥐어
뜯던 멋진 반다지(스카프)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누군가가 가져가버렸다.

아... 세석에서의 그날 밤...정말 '전국의 범생이 세석으로 모이다'라는 전설이 태어나는 역
사적인 밤이었다. 우리도 그 날, 산에 들어서 단 한방울의 알콜도 섭취하지않은 대기록을 수
립하는 정말 역사를 만드는 밤이 되었고 자동적으로 전설적인 범생이 집단에 속하게 되었
다.

그리고 내일 걸어야 할 구간... 당일 구간으로 자주 걷던 거리이긴하지만 배낭무게와 기상상
태를 감안하면 내일 걸어야 할 걸음도 만만치가 않을 것이다. 곧장 잠에 빠져든 듯하다.

두류


[4일차로 계속]

출처 : 지리산 산길따라
글쓴이 : 두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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