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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숲속의 글마당

[칼럼]밤꽃피는 유월의 불륜/이원규 시인


 

 

밤꽃 피는 유월의 지리산은 현기증이 난다. 피아골과 문수골 등 지리산의 아랫도리는 온통 밤꽃

향기가 점령을 하여 온 산이 환하다 못해 머리가 아플 정도다.

 

비릿한 밤꽃 향기는 예로부터 남자의 정액 냄새로 비유되어 왔다. 사실 또한 그러하다보니 매화

향처럼 향기로 불리기보다는 왠지 조금 더 비하된 듯한 '냄새'로 더 잘 통한다. 매화 향기를 매화

냄새라고는 잘 쓰지 않지만,밤꽃 향기보다는 밤꽃 냄새라는 말을 더 잘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향기라는 말이 단순히 사대주의적인 한자여서 더 품격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더 포

괄적이며 모호한 우리 말 '냄새'로 격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지극히 꺼리던 유교문화의 영향일지 모른다. 어쨌든,과부들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엄동설

한을 견딜 수는 있어도,밤마다 봉창문 으로 밤꽃 냄새가 스며드는 오뉴월에는 수절하기가 힘들다

고 했다.

 

말하자면 밤꽃 피는 유월은 불륜(不倫)의 달인 것이다. 불륜이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넘어

대개 '윤리에서 벗어난 남녀관계'를 뜻한다. 날마다 뉴스의 사회면은 불륜 사건으로 채워지는데

 거의가 살인과 협박 등의 범죄 혹은 가정파괴로 이어진다. 과연 시작 또한 그러하고 마무리 또한

불륜다운 것이다. 그런데 밤꽃 피는 유월에 문득 생각해보건대,불륜도 참으로 여러 가지가 아닌가.

 

인간의 도리를 넘어선 광의의 불륜과 잘못된 남녀관계를 얘기하는 협의의 불륜,그리고 변명삼아

흔하게 회자되는 '아름다운 불륜' 등이다. 그렇게 본다면 6·25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 쟁이야

말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극한적으로 넘어선 불륜 중의 불륜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리산뿐

만이 아니라 온 산천을 뒤덮는 이 비릿한 밤꽃 냄새는 남자의 정액 냄 새가 아니라 처절한 형제

부모의 피 냄새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지독한 불륜의 냄새는 반 세기가 지나도록 이렇게 징한

것이다.

 

또한 남녀관계의 불륜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대개 여성 비하적이거나 성의 불평등 으로 점

철돼 있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밤꽃 냄새를 두고도 시도 때도 없이 성 충동이 강한

 남성을 숨기고,불행한 약자인 과부를 등장시켜 내내 뒤집어씌우니 말이다. 어제 나는 이 지독한

밤꽃 냄새로부터 두 통의 우편물을 받았다. 하나는 마산 교도소의 죽마고우에게서 온 눈물겨운

편지였으며,또 하나는 부산의 강영환 시인이 보내온 시집 '불무장등'이었다. 요약하자면 친구의

편지는 아내의 '불륜'으로 비롯된 기구한 사연이었으며,강 시인의 시집은 지리산을 향한 지극하

고도 지극한 '아름다운 불륜'을 담고 있었다.

 

나의 친우는 고향이 가까운 죽마고우였지만,무심한 세월 동안 서로 소식 한번 전하지 못하 다가

근 20년이 지나서야 편지 한 통으로 근황을 알게 된 것이다. 대구에선가 잘 살고 있다 던 나의 친

우는 그 사이 12년형을 선고 받은 살인자가 되어 16척 담장 안에서 6년째 참회의 복역생활을 하

고 있었다.

 

나는 그의 편지글 중 '나름대로 열심히 살던 중 마누라의 바람으로 인하여 한 사람의 목숨 을

염(殮)하고 이곳에 왔다네' 라는 구절에서 숨이 탁 막히고 말았다. '목숨을 염하고'의 '염'자가

송곳처럼 나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아내의 바람으로 인해 홧김에 누군가를 죽였다는 것인데,

그 피해자가 아내인지 정부인지는 편지 내용상 알 수가 없다. 지금도 교도소에서 그 죄의 값을 치

르고 있는 그를 생각하면 저 밤꽃 향기도 예사롭지가 않다.

 

 

그도 어쩌면 교도소 담장을 넘어오는 이 밤꽃 냄새를 맡으며 지난날의 죄와 악연을 떠올릴지 모

른다. 하지만 지금은 불법에 귀의하여 '교도소를 절이라 생각하고,동료 죄수들을 도반이라 생각

하며 수행 중'이라니 이 얼마나 고맙고도 다행스러운 일인가. 밤꽃 피는 유월에 생각한다. 한국

전쟁과 같은 '민족적인 불륜'과 가정은 파괴되고 당사자들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남녀의

불륜',그리고 세상살이가 힘겹고 외로울 때면 집을 뛰쳐나와 지리산을 향한 그리움을 25년간이

나 불태운 강영환 시인의 '아름다운 불륜'을 생 각한다.

 

우리는 지금 당장 어디에 무엇으로 설 것인가. 지리산의 밤꽃 향기가 던져주는 이 '불륜'이 라는

 화두가 만만치 않다. 하여 인생의 끝없는 '불무장등'은 계속된다.

 

[부산일보 문화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