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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두류실/두류실 일기

지리산 두류실 일기 - 눈 내리는 날

 

[지리산 두류실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두류실 앞 마을 길]

 

 

 

[두류실 작업장과 마당]

 

 

[두류실 입구]

 

 

[눈 내리는 마을, 그리고 해]

 

 

ㅇㅇ님, 


지리산의 고장 남원에는 어제 밤부터 내리던 눈이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이곳으로 들어온 후 모처럼 아침에 마당과 두류실 작업장 앞의 길을

쓸었습니다.


현재 남원의 적설량은 약 9cm 정도에 머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굵은 눈발이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으니 얼마나 쌓일지는

아직 모를 일입니다.


마당과 길을 쓸고 있는데, 문득 빛을 잃고 따스함마저 스러져가는 듯한

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하염없이 내리는 눈의 흩날림을 마치 '네 멋대로 해봐라'라며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무슨 일이지요?


뉴스에서 접하던 고립이라는 말을 떠올려야 할 지 모르는 이 순간에

저는 문득 은퇴하신 고교 은사님이 몇 해 전 저게 들려주시던 이야기를

뜬금없이 떠올립니다.

 

'나의 보물이 다른 이에게는 쓰레기도 될 수 있다'라는 다소 충격적인

말씀이었지요. 어느 나라의 속담을 들려주신 건데, 당시 이런저런 활동을

왕성하게 하며 자신감에 충만해 있던 40대 중후반의 애제자인 제게 그런

말을 하신 겁니다.


그 후로 선생님의 말씀을 잊지는 않고 있었습니다만,

늘 그렇듯 저는 자만에 젖어있기도, 근거 없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기도, 

또 세상이 스스로를 기다려주는 듯한 착각에 빠져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50대의 중반, 약 30년간의 조직생활을 청산하고, 모든 것을 홀로 이루어

나가야하는 이즈음, 저는 선생님이 들려주신 그 말씀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아들을 수 있을 듯합니다. 또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몸과 마음이 점점

조급해져 옴도 부인할 수 없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가 참 다행으로 생각하는 일은 '나의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보물들'이 다른 이들의 보물을 캘 수 있는 큰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몸과 마음이 조급해진다는 말은 그 보물들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캘 시간과 능력이 부족함을 절감하게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오래 전부터 마음에는 두고 있었지만, 몸을 부려 시작하기는 처음이라

어렵고 두렵기까지 한 소중한 지금의 나의 일들,

지리산의 역사와 문화라는 명제에 뜻을 품고 호기롭게 발을 디딘 史學에의

入門이 뜻밖에 ‘조선시대 士林과 山林’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일들,

그리고 '외로움과 쓸쓸함'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는 모든 일들이 그

새로운 보물을 캐는 작업이 되겠지요.


빛을 잃고 세상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던 해가 이제 희미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제게 다가옵니다.

그렇군요...


세상이 어떻다 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은 '해는 해'라는 사실이겠지요.

언젠가 저 내리는 눈도 곧 잦아들고, 그리고는 녹아내리겠지요.        


관청 일을 포함, 진행하여야 할 일이 여전히 태산같이 앞에 버티고 있건만

오늘은 괜스레 눈 쌓인 도로사정을 핑계로 컴퓨터 앞에서 이렇게 미적거리고

있는 중입니다. 옆집의 아저씨는 용감하게 차를 끌고 나가시던데...


2010/01/05 두류/조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