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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두류실/두류실 일기

이름 없는 들풀로 살아가기②김진웅

아래 글은 2008년 10월 15일 도농엑스포에서 김진웅 생산자님이 귀촌을 꿈구는 후배들에게 들려준 내용입니다.

귀촌의 과정과 귀촌의 의미(귀촌을 택한 삶의 목적), 농경의 어려움 등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현실감 있는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계십니다. 

지난 시월 15일, 도농엑스포에서 귀촌한 선배로서 귀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얘기한 내용입니다.

내용이 좀 깁니다. 행여 귀촌에 관심이 계신 분을 위해 글을 옮겨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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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편에 이어 계속]②


4. 친환경 무농약 단감, 고추농사의 어려움


 저는 형님과 아내 셋이서 농사를 하고 있으나 대체로 형님과 둘이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과수농사는 밤과 단감을 생산하고 있으며, 밭곡식은 고추, 마늘, 콩 따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돈을 만드는 과일과 곡식은 밤, 감, 고추가 전부입니다. 이 모든 곡식을 가꾸는데 농약은 일체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웃음거리입니다. 그러나 오래 가려면 힘이 들고 수확은 적어도 이 길을 가야할 것 같아서 무농약농사를 짓고 사는데, 참 힘이 듭니다.


 첫 해에는 과수농사는 아무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관행농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감나무에 농약을 뿌리는데 도시에서 농사라고 생각하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약대를 잡고 약을 뿌리는데 완전히 약을 뒤집어쓰고 4-5시간여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 짓을 가을 수확 철까지 8번에서 9번을 해야 하니 아무리 마스크를 했다하더라도 내 몸속에 들어가는 농약을 막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첫 해 농사를 해 보고는 형님과 상의하여 다음해부터는 무농약 과수농사를 하자고 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때 맞춰 ‘부산울산 한살림’과도 연결이 되어 직거래를 할 수 있는 길이 터였습니다. 우선 감식초와 목초액이 과수농사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이를 농사에 활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집에 불을 때어 난방을 하니 목초액은 자급자족이 되고 감식초는 상품으로 나갈 수 없는 감을 식초로 담궈 쓰면 되니까 이도 자급자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첫해 무농약으로 감 농사를 지어보니 감식초와 목초액, 석회유황만으로는 감을 제대로 키워낼 수 없었습니다. 감이 빨리 익어 물러지기 쉽고 떨어지는 감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관행농으로 하면 10t은 나올 양인데도 첫 해는 6t 정도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 물러진 감이 아마 1t은 넘었을 겁니다.


 다음 해에는 더욱 처참하였습니다. 겨우 2.5t 정도가 나왔으니까요. 온 과수원이 낙엽병과 홍시로 9월 말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하여, 시월 중순에 거의 모든 감을 처리하였습니다. 보통 감나무는 11월 중순까지도 수확을 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는 11월 초순 무농약 단감재배 농가에 가서 4일간 합숙을 하며 일손을 돕고 어떻게 농사를 해야 하는 지를 배워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별 신통한 방법이 없어 보여 무농약을 포기하고 저농약으로 농사를 지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형님의 격려로 다시 한 번 무농약 과수농사에 도전을 하여 금년 2006년 가을은 그래도 관행농의 절반 수준인 5t 정도를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2007년 다시 2t 정도의 감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어깨에 힘이 빠지는 일입니다. 2008년 올해도 감꼭지 나방이 감을 떨어뜨리고 있는데, 고개를 들고 감나무를 보지 못할 지경입니다. 왜냐면 또 감이 홍시가 되어 있지나 않는지, 아니면 감이 한 개도 달려있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서입니다.


 고추도 무농약으로 재배하다보니 대체로 관행농의 절반 이하이거나 4분의 1 수준으로 수확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고추값을 두배, 세배로 받을 수도 없으니 실제로 돈을 위해서는 관행농으로 농사를 지어야 몸도 편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농약, 유기농 농사를 하려는 분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 혹시 무농약 농사라고 하면 씨를 뿌려놓고 가만히 있다가, 가을에 수확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계신다면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무농약 농사를 짓기 위해서 일반 농약을 사용하는 농사보다 최소한 2배 이상은 힘이 듭니다. 그래서 나이 드신 노인들은 무농약, 유기농 농사를 짓? 싶어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땅에 풀이 나지 않게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으니 일일이 풀을 뽑든 베든 해야지요, 친환경방제약이라는 것은 효과가 크지 않기 때문에 더욱 자주 농작물에 뿌려주어야지요, 유황이나 석회보르도액, 그리고 작물 성장에 도움이 되는 효소 따위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농사짓는데도 시간이 빠듯한데, 이런 부수적인 일들이 줄지어 있기 때문에 힘이 두 세배로 드는 것입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게 농사입니다. 야마기시즘이라는 공동체 삶을 시작한 야마기시 미오죠는 ‘보지 않고 행하지 말고, 행하지 않고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특히 유기농, 무농약 농사에는 여러 전문가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100인 100색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몇몇 책을 보거나 얘기를 들어보면 참 유려한 문체와 아름다운 사상들로 자연농법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새나 거미가 벌레를 잡아먹기 때문에 무농약으로 과일나무를 키울 수 있다든가, 짚불을 피워주면 병충해를 예방할 수 있다든가, 땅을 살려놓으면 스스로 작물들이 자생력이 강해져 무농약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따위입니다. 만약 그런 정도로 무농약, 유기농 농사로서 살아갈 수 있다면 누가 그렇게 농사를 짓지 않겠습니까?


또한 아무리 좋은 이론도 내가 할 수 있어야 유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처한 환경이나 능력 따위로 언제든지 할 수 있는 농법이라야 친환경농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친환경농사를 짓는데 자연자재 값이 엄청나게 비싸거나, 친환경 자재를 만드는데 재료를 구하는데 너무 힘이 들 경우 그 자재가 아무리 좋아도 농사짓는데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같은 경우는 감식초, 목초액은 농사에 사용할 만큼 충분히 확보가 가능하여 사용을 해 보았는데 그 동안 별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감의 경우는 과실이 익기도 전에 잎사귀에 병이 드는 것을 막지 못했고, 고추의 탄저병에는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목초액이 고추탄저에는 특효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다만, 유황과 목초액을 섞어 농도가 진하게 토양에 뿌렸을 경우 토양살충효과는 있는 것 같습니다. 무, 배추를 심을 때 활용을 하는데 분명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가능하면 현금지출이 되지 않는 농사를 지어야 오래 농촌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무농약 농사를 시도 하고 있지만 너무 힘이 들어, 오히려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콩농사는 아직 7년째 제대로 수확을 해 본 적이 없고, 고추는 관행농의 절반은 커녕 어떤 경우는 반의 반 정도 수확을 할 수 있었고, 과일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서 돈을 벌기 위해 과다한 비료나 농약을 사용해서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면 적정한 농약, 비료를 사용하여 농사를 짓게 되면 어느 정도 수확을 할 수 있어서 시골 사는 재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가을이 되었는데도 수확할 게 없다면 돈을 떠나서 참 재미가 없거든요. 친환경농사는 초보 농사꾼이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시골의 삶에서 어느 정도 뿌리박고 주변을 둘러 볼 정도의 여유가 생긴 다음에, 무농약, 유기농 농사에 서서히 도전을 해 보는 것도 또 다른 성취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시골에서 오래 사신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농사란 속고 속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작년에 풍작을 이룬 농법으로 올해 그대로 한다고 해서 똑 같이 풍작을 이룰 수 없다는 얘깁니다. 농사가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정형화를 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얘깁니다. 어떤 해에는 과일 크고 맛있다가도 또 어떤 해에는 잘고 맛이 없기도 합니다. 올해 과일농사가 그렇습니다. 남부의 경우 가뭄이 심해 과일이 크지를 않아 당도는 좋아도 시장에 내 놓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정착 초기에는 수확의 기쁨이 귀촌 정착에 도움이 되느니 만큼 저농약으로 농사를 짓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잡초 없는 운동장에서 온종일 호미질을 하기 어려운 것처럼, 수확할 게 없는 과수원, 논, 밭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시골생활의 즐거움을 앗아가기 때문에 지속적인 생활을 어렵게 할지도 모릅니다.


5. 지속적인 귀촌 정착을 위한 조언

 우선 귀농 후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시골에서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면 제 말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제 먹을거리를 제 손으로 짓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면, 논 500여평, 밭 2,500여평은 있어야 자급자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각자 가지고 있는 재산에 따라 다르긴 할 겁니다. 그러나 보통 무농약, 유기농으로 농사지으며 두 식구가 먹고살 수 있는 농토를 3천 여 평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밭농사 2,500평을 농사짓는다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곡물의 종류, 농사 방법에 따라 ? 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초제나 농약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려면 무쇠팔 무쇠다리가 아니면 견디기 매우 힘이 듭니다. 자녀 교육비까지 충당해야 할 경우라면 농촌에 오시라고 감히 말씀을 드리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물론 시설 재배를 통해 자녀들을 대학까지 보내는 경우가 시골에서도 종종 있는데 그 분야에는 경험이 없어서 무어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유기농이나 무농약 농사를 지으려는 분이면 농가나 농지가 가능한 일반 관행농 전답과는 떨어진 곳이 좋을 것입니다. 사실 시골에서는 새로 온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고 조언해 주기를 원하는데 거의 관행농이다보니 별 들어볼게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렇다보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혼자서 여러 정보를 알아보면서 농사를 지어야 하니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외진 곳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정착지를 구하면서 아주 기본적으로 생각해야할 조건은 주택의 경우는 햇볕이 오래 잘 들어 겨울에 덜 추운 곳으로 남향이며, 식수 확보에 문제가 없는 곳, 그리고 농지는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 조달에 문제가 없으며 여름 태풍 장마에 대체로 안전한 곳 따위입니다. 시골 삶에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자연재해에 대한 피해입니다. 다만 과수농사를 지을 분은 농지가 북향이어야 좋다고 합니다. 왜냐면 북향은 춥기 때문에 벌레들이 월동하기 어렵고 여름에는 태풍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착지는 가능하면 면소재지에서 차로 20분 이내에 위치하고, 집까지는 차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면 좋을 것입니다. 인터넷 연결이 용이한 지역이면 더욱 좋겠고요. 보통의 경우 도시의 삶에 너무 염증을 느낀 나머지 아주 심심산골로 정착지를 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얼마가지 않아 후회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풍광이 곧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건 아니거든요. 시골은 아무리 편리하게 집을 짓고 환경을 꾸며 놓더라도 시골 생활 자체에서 여러 가지 불편함을 줍니다. 그런데 읍내와 거리마저 떨어져 산다면 그 불편함은 배가되고 결국 지속적인 시골 삶을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두 해 살아보고 다시 도회지로 가려면 모르되 지속적으로 살려면 우선 생활하는데 편리하고 덜 외로운 게 시골에서 오래 살 수 있는데 도움이 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지금 시골은 ‘6시 내고향’에서 말하는 그런 낭만적인 곳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골생활에 너무 큰 기대나 환상은 갖지 말기 바랍니다. 그저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살겠다라는 마음이어야 후회를 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옮겨 심은 들깨도 새뿌리 내려서 제 몸으로 살려면 4-5일은 걸립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4-5년은 되어야 어느 정도 시골에 적응이 됩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4-5년 사이에 다시 도회지로 돌아가든지 이혼, 자살 따위로 가정이 파탄을 맞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홍천에서 7년째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데, 7년 전에 6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귀농을 해서 살았는데 한 가정은 이혼으로 파탄이 나고, 다른 가정은 모두 다시 도회지로 돌아가 버리고 지금은 혼자 남은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골에 정착을 하면서 의욕이 앞서 초기에 너무 큰 투자를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시골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 데는 사실 2-3년이면 충분하거든요. 그 이후부터가 문제입니다. 행여 이게 아니다 싶으면 몸이 다시 빠져나가야 하는데 시설투자 따위를 너무 크게 해 놓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치명적인 손해를 볼 수 있거든요. 제가 귀농하기 전, 우리동네에도 2억여원을 들여 산 계곡 주변 땅을 구입해서 과수농사를 준비하던 사람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2년만에 결국 자살을 하고 만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시설 재배, 특수작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따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시설재배는 가능한 집단으로 하는 곳에서 함께 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래야 생산과 판매에 어려움이 덜합니다.


 돈을 크게 벌어야 하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시골에 정착하면서 처음에는 가능한 벼농사, 밭농사를 하여 먹을거리만큼은 자급자족을 한 후,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농사를 찾아서 하기를 권합니다. 나무를 옮겨 심을 때도 뿌리에 비해 가지가 너무 많으면 말라죽기 때문에 가지를 쳐서 심듯이, 시골에서 오래 살려면 우선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뿌리를 내리고 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가지를 뻗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귀농하려는 분들이 동경하는 소로우의 삶이나 스코트니어링 부부의 삶은 우리 현실과 많이 다릅니다. 소로우는 겨우 2-3년간 월든 호숫가의 삶만으로 자연의 삶을 찬미했지만 농사꾼들은 평생을 힘들고 고달픈 생활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리고 스코니어링 부부는 지식인이었고 그 당시에 아주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어서 하루 두 세 시간 노동과 6개월만 일하고도 먹고 살 수 있었겠지만, 우리나라 시골의 현실은 그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 선상에서 내 삶을 영위하려 했다가는 많은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 두 세 시간 일로 농촌의 삶을 즐길 수 있다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을 겁니다.


6. 귀촌 후 잃은 것과 얻은 것

저가 귀농을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다른 것을 쥐기 위해서는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고요. 저 역시 도회지의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놓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시골의 삶을 손에 쥐면서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도회지에 평생을 살았더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가. 귀촌 후 잃은 것들

 우선 제가 시골에 오면서 잃은 것들을 보면, 첫째는 편리하고 안온한 삶이었습니다. 이 시골은 여자들을 참 힘들게 합니다. 문 밖에 나서면 돈으로 구하지 못할 게 없는 곳이 도회지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시골은 현금지출을 되도록 아껴야 하기 때문에 먹을거리를 텃밭에서 구하든 산천에서 구하든 내가 일일이 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기 그지없는 생활입니다. 백화점에 진열된 잘 다듬어진 채소가 아닌, 벌레먹고 병든 채소를 일일이 흙을 털고 솎아가며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것이 처음에는 낭만으로 여겨지지만 일상생활로 이어지다보면 생각보다 참 불편하고 귀찮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편한 생활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 처지에서 보면 너무나 아쉬운 풍족한 월급봉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좀 우습지만, 사회적인 지위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제일 아쉬워하는 윤기 흐르는 둥근 얼굴도 잃어버렸습니다. 71키로의 몸이 겨우 60키로 정도로 유지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도회지 생활을 하면서 인연 맺었던 수많은 친구, 지인들도 잃어버렸습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인연이란 산길과 같아 자주 왕래하지 않으면 잊어진다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자주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인연을 끊지는 않는 게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 초기에 정착하면서 힘이 들 때 지인,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일손도 도와주었고, 단감을 생산해 어떻게 판매를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들이 구입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 귀촌 후 얻은 것들

 시골에 내려오면서 위에처럼 잃은 것도 많았지만, 얻은 것도 참 많습니다.

우선, 행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행복하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안 것입니다. 행복이란 고난과 고통 뒤에 맞이하는 열매이기에 도회지에선 맛보기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한여름에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차가운 샘물에서 씻을 수 있을 때에 그 샘물에 대한 감사함으로 참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고된 하루해를 접으며 식구들끼리 맛난 저녁상을 대할 때, 아! 오늘도 이렇게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골생활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힘들고, 외롭고, 고달픈 것을 얻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직접 알아서 해야 하는 불편함은 몸을 참 고달프게 합니다. 직장에서처럼, ‘어이, 김 대리 개 밥 좀 줘.’라든지, ‘저어기 콩이 익어가네..’라 말만하면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척척 해주던 그 문화와는 너무나 다르니 말입니다. 내 손, 발로 뛰어가며 힘든 일이든 궂은일이든 다 해야 하기 때문에 그 고달픔이란, 도회지에서 운동 삼아 하루 이틀 봉사활동을 해 보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그러다보니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진정으로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골생활에서 가장 크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돈 없이 누릴 수 있는 맑은 공기, 샘물, 별빛, 햇살 따위입니다. 입을 벌리고 한껏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이건 시골에 살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혜택이겠지요. 그리고 자급자족으로 살아가야 하니 도회지에서는 생각도 못하던 된장, 고추장, 청국장 따위를 담그고, 온갖 산야초로 차도 만들고, 나물도 해 먹을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을 잘하는 사람은, 못하는 사람의 하인이 된다.’고 하였지만, 자강불식(自彊不息)의 삶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별 의미 없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려 곡식들이 싹이 나고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끼는 즐거움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참으로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도회지에선 아내가 집안의 가구처럼 당연한 존재로 생각하며 살았지만, 시골에선 꼭 필요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도회지에 살면서는 내 삶에 대해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부족한 게 없는 삶이었기에 기도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골의 삶은 모든 게 아쉽고 부족하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하니 자연히 어머니인 땅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인 하늘을 우러러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도회지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인 삼쾌의 삶(快眠, 快食, 快便)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야 하고, 고기 보다는 채식위주의 먹을거리로 식사를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삼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7. 결론

 예전에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시골에 살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대학을 나오고 무게 40키로의 모래주머니를 나르는 구청 환경미화원 시험에는 응시를 해도 무시험으로 올 수 있는 시골엔 오지 않는 게 현실이니 말입니다. 이는 아마 시골에서 돈을 벌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농사에 대한 무경험이 가장 큰 원인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도 시골에서 살았고, 지금도 시골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누구나 시골에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살아가며 모든 걸 다 거머쥐고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놓아야하는데, 이 놓아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여러 날을 반복해서 지금 가려는 이 길을 가지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누구나 힘이 들든, 심(心)이 들든 둘 중 하나는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행여 퇴직 후 소위 전원생활을 위한 귀촌이라면 가능한 마을과 떨어져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끼리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귀농을 하기 전 7월 초순 어느 여름날에, 친구 집에서 칠순, 팔순이 된 할머니들과 감자를 캐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밭 길 옆에서 조깅을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도회지에 살다가 이사를 와 산 쪽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것이지만, 농사일로 힘든 사람들에게 조깅이나 개 따위를 끌고 다니는 한가로운 모습은 농사꾼들에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웃동네에, 공무원으로 살다가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농사철에도 수시로 들락거리며 농사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 또한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아닙니다. 시골에 온 이상 시골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며 어울려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대체로 전업농으로 지금 한국 농촌에서 살아가는 것은 도회지와 달리 문화적 혜택을 즐길 형편이 못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과 돈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비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저는 농촌에서 살려는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이 나라에서는 이름 없는 들풀로 천대받는 비천(卑賤)한 삶을 살수밖에 없다하더라도, 농사꾼이야말로 땅에서 하늘을 주을 수 있는 비천(飛天)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과, 경제적으로는 비참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자강불식(自彊不息)의 비굴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곳 또한 시골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까뮈 선생의 말로서 마무리를 합니다.

‘노동 없는 삶은 부패하지만, 혼이 없는 노동일 때 사람은 숨 막히고 죽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