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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두류실/두류실 일기

이름 없는 들풀로 살아가기①/김진웅

아래 글은 2008년 10월 15일 도농엑스포에서 김진웅 생산자님이 귀촌을 꿈구는 후배들에게 들려준 내용입니다.

귀촌의 과정과 귀촌의 의미(귀촌을 택한 삶의 목적), 농경의 어려움 등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현실감 있는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계십니다. 

지난 시월 15일, 도농엑스포에서 귀촌한 선배로서 귀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얘기한 내용입니다.

내용이 좀 깁니다. 행여 귀촌에 관심이 계신 분을 위해 글을 옮겨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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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없는 들풀로 살아가기

                                                

                                                           경남 함안 길벗농원 김진웅

시골 찬가

봄이면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을 깨고 일어나 밭을 갈고,

부드러운 흙 헤집어 씨앗뿌려 놓으면

봄비에 땅을 이고 돋아 나오는 생명의 신비를 직접 볼 수 있고,

여름이면 성성하게 자란 곡식들 쳐다보며 가을 기다리는 재미,
가을이면 영근 알곡들 하나 둘씩 거둬들이는 재미,

겨울이면 따뜻한 온돌방에 등 지져대며 군밤 먹는 재미.

 

수염이 길어도 그만,

머리를 감지 않아도 그만,

이빨에 상추 잎이 끼어있어도 그만,

월요일 업무회의도 사장 잔소리도 없는 곳,

걸어서 가는 직장이라 막히는 출퇴근 길 걱정도 전혀 없는 곳,


높고 푸른 하늘엔 흘러가는 뭉게구름 두어 점.

언덕엔 분홍, 빨강, 흰색의 코스모스가 가는 허리를 흔들어대고,

길게 쳐놓은 빨래 줄엔 고추잠자리가 오수에 졸고,

주홍빛으로 영글어가는 감나무 과수원 아래 풀밭엔 오리, 닭이 한가롭고,

가끔 들리는 개 짖는 소리, 닭 울음소리 외엔 들리는 게 없어

자동차 소음도 반가웁게 느껴지는 한적한 곳.

지금 이 가을엔

하늘이 태풍없는 여름을 주셔,

들판엔 알곡들이 누른빛으로  물들어가고,

진홍빛 색색으로 단장한 고추는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꼬투리가 토실토실 알이 박힌 콩은 따가운 가을 햇살에 영글어가고,

고구마 줄기는 제 이랑도 부족하여 다른 이랑까지 다리를 뻗고,

비닐하우스 안에 참깨는 제 몸 말려 씨앗을 토닥토닥 뱉어내고,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치며 허리를 펴는데,

때 맞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입 벌리고도 한껏 들이킬 수 있는 곳.

이런 곳이 시골.

다만, 아쉬운 것은 시골의 삶을 절반 정도밖에 얘기하지 못한 것.

 

 시골에서 산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야말로 누가 불러주지도, 쳐다봐 주지도 않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남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고, 칭찬받고 이름 날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시골에 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부추기는 억대의 부농을 꿈꾸는 분들이나, 은퇴 후 연금이나 현금자산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서 그저 2, 3백 평 텃밭 가꾸며 유유자적한 전원생활을 즐길 사람이라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할 얘기는 그저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처럼 제자리 지키며 농사로서 먹고 살려는 분들을 위한 얘기입니다. 그리고 시골에서 7년간 살면서 느끼고 경험한 지극히 제 개인의 생각과 생활에 대한 얘기이기에, 지금 이 나라 농사꾼들의 보편적인 얘기는 아니라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나의 귀촌 동기

  저는 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생활만 20여년 넘게 도회지에서 하였습니다. 그러던 제게도 1999년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제가 몸을 담고 있던 조직은 항상 같은 일에, 같은 상사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작은 조직이었습니다. 소위 직무전환배치나 이동이 없는 그런 조직이었습니다. 어쩌면 안정된 조직이니 그야말로 공무원처럼 철밥통 조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게 그저 안정되고 편한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취업을 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볼 때는 배부른 소리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다만 먹고 살기 위해 개미 쳇바퀴 돌듯 직장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나 자신을 참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시골에 가겠다며 뿌려놓았던 씨앗이 서서히 내 가슴속에서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실상사의 도법 스님이 주관하시는 인드레망에도 기웃거리며 실상사 귀농학교에도 가보고, 성천문화재단에서 박영호 선생님의 ‘다석 류영모’ 강의에도 참석하고, 법정 스님이 회주로 계시는 길상사 4박5일 수련회, 통도사 3박4일 수련회 따위에 다니면서 내 삶의 정체성을 찾아보려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석가, 노자, 장자, 톨스토이를 만나고 간디, 비노바 바베, 오쇼 라즈니쉬, 까비르, 소로우, 스코트니어링부부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먼 학창시절 보았던 갈매기 조나단을 다시 만나면서, 그 동안 내가 살아온 몸짓이 결국은 어부의 뱃전에 서성이면서 어부가 던져주는 고기를 받아먹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천규석 선생이 말한  ‘배부른 머슴으로 살 것인가, 배고픈 주인으로 살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린 배를 안고서 더 높게 더 빠르게 나는 방법을 연마하던 조나단과 같은 삶을 살고자 귀농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시골에 가야겠다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러자 아내도 50살까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시골로 가지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나이가 되면 용기가 없어져 그냥 어부가 던져주는 고기에 생명을 맡긴 갈매기처럼 나 역시 정년까지 그냥 지내게 될 것 같아 올해 내로(2001년) 시골로 가야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말이 없었고 안방엔 싸늘한 공기만 여러 날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여 아내와 다시 마주앉았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나 요즘 매일 기도하는 심정으로 회사에 다니고 있어!’라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말없이 건너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고 밤늦게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걱정이 되어 가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내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두말 않고 ‘그러세요.’라 했습니다. 거기서 아내는 혼자서 그간 내 심정을 헤아리고 울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많이 힘들 때 내 심정을 헤아려준 아내가 무척 고마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저도 아내에게 참 몹쓸 짓을 했다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귀농을 하겠다고 말을 꺼낸 지 3년 만에야 겨우 내키지 않는 아내의 동의를 받은 것입니다.


 귀농하려는 많은 분들 대부분이 가족 간 갈등을 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골의 삶이란 것이 꼭 힘든 일을 해서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시골에 산다는 그 자체가 불편하고 힘이 들기에 여자들은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부부 한쪽이 양보를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 따로 사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결혼한 이상, 부부가 함께하는 행복이 더 중요하지 나 혼자만의 행복이 더 중요한 것 아닐테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2001년 10월 31일자로 퇴직 사유에 ‘귀농’ 딱 두 글자만 써 퇴직원을 제출하고  그해에 시골로 내려왔습니다.

2. 왜 귀촌이어야 하는가?


   가. 씨알로 살아가기

함석헌 선생의 스승으로 더 잘 알려진 다석 류영모는,  사람답게 살려면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이마에 땀 흘리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나라 조선이 망한 것도 따지고 보면 불한당(不汗黨), 그러니까 이마에 땀 흘리기 싫어하는 양반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관존민비(官尊民卑) 생각이 나라를 망하게 하였는데도 그 생각을 깨끗이 버리지 못하는 것을 통탄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석 선생님은 출세하여 높은 자리에 오를 생각으로는 대학에 가지마라 하였습니다. 대학에 가서 출세를 하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힘들고 귀찮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자신은 호의호식하겠다는 말이니 이 또한 조선시대 양반과 다름없는 행태로 본 것입니다.

남의 불행을 딛고 쟁취한 행복(유포리아)으로는 살아가지 않겠다는 정신이 있어야 진정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 자본주의(資本主義)와 자본주의(自本主義)

 씨알로 산다는 것은,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에서 배부른 머슴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自本主義)의 신념을 가지고 배고픈 주인으로서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도회지는 자본주의(資本主義)의 꽃이 피는 곳이라 죽임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행복을 위해선 그 누군가가 낙오되거나 불행해져야 내 행복과 연결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自本主義)의 삶을 살 수 있는 시골은 살림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는 곳입니다. 굳이 경쟁해서 남을 이길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농산물을 많이 생산한다고 해서 내가 죽거나 불행해지지는 않습니다. 값이야 덜 받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풍년 농사로 인해 내가 불행해지거나 죽지는 않는다는 얘깁니다. 풍년이 되면 될수록 다른 사람의 삶 또한 더 윤택해 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시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회지는 그렇지 않잖아요? 다른 이가 더 잘된다는 것은 경쟁에서 내가 밀린다는 의미로 내가 도태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되지 않습니까? 


 한 사회가 공존할 수 있는 살림의 한 축으로써 시골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지금처럼 시골이 죽어가도록 방치 또는 가속을 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면 시골이 무너지면 도회지의 삶 또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효용가치로만 시골이 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 톨스토이와 같은 삶

  

톨스토이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중에서,

  ‘ 일을 싫어하지 않고 즐거워하는 이에겐 자기 몸 밖의 사유권, 즉 다른 사람의 수고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는 무익할 뿐 아니라 오히려 속박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내 먹을 것을 짓기를 좋아하거나 그 일에 익숙해져 있다면 다른 이가 내 대신 그 일을 해 준다면 나는 내 일을 빼앗기는 것으로 내 스스로 한 것보다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가공적인 사유권을 가진다는 것은 이러한 사람에게는 쓸데가 없다.


    노동을 자기 생활로 알고 있는 사람은 노동의 즐거움으로 삶을 채우고 있다. 만일 사람의 삶이 일로 채워지고 그 사람이 일하고 쉬는 데서 유쾌함을 안다면 화려한 가구나 장신구가 필요 없어진다. 일을 삶의 보람과 기쁨으로 아는 이는 남의 수고에 의해 자신의 일을 줄이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삶을 일로 보는 이는 기능과 근면과 인내를 얻음에 따라 차차 더 큰 일을 자기의 목적으로 하고 그것으로 인해 더욱 더 삶을 알차게 할 것이다.


  많은 노동자가 쓰레기를 나르거나 뒷간 청소를 하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요, 동포에게 그것을 나르게 뒷간통, 쓰레기통을 채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 허름한 신발을 신고 손님으로 가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고 신발 없는 이들의 옆을 고급 구두를 신고 지나가는 것이 부끄럼이라 생각하게 된다. 외국어나 최근의 일을 모르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라 빵을 먹으면서 빵을 만둘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럼이라 생각하게 된다. 더럽혀진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라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라 했습니다.

 

어떤 이는 종교적인 이유로 톨스토이를 싫어하지만, 농사꾼 처지에서 보면 귀족의 신분을 마다하고 스스로 농사꾼이 된 톨스토이는 힘들고 비천한 생활로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긍심과 희망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는 ‘항상 이기기만 하면 바보가 된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스스로 가난해 보지 않고, 고통을 받아보지 않고, 패배해 보지 않는 사람은 결국 반쪽의 삶만을 볼 수 있기에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시골의 삶은 우리를 먼저 경제적인 면에서 약자로 만듭니다. 그리고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힘든 일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결국 시골의 삶은 어쩌면 이 사회에서는 이긴 자가 아니라 진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통받는 자, 패배한 자, 진자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야 하기에 바보로만 살아갈 뻔 했던 내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3. 귀촌을 위한 조건


 저는 귀농에 앞서 귀농의 목표를 ‘자급자족,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성공’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무늬만 농사꾼이 아니라 정말로 농사로 끼니를 이어가는 농사꾼’로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성장개발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업자본주의는, 목표를 높고 크게 잡으라고 하지만 자본(自本)으로 살려면 목표가 낮을수록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資本을 좇아가면 결국 自本을 잃어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낮은 논두렁에서는 쉽게 내려설 수 있지만, 언덕 높은 구릉에서는 잘못 떨어지면 치명상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지어 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농협 빚은 가능한 내지 않는다.’ ‘소득 범위 내에서 지출 한다.’‘가능하면 현금 지출이 되지 않는 생활을 한다.’ 라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정착을 하면서도 집을 꾸미기 위해 큰 지출은 하지 않았습니다.  집수리 비용도 형님과 2개월여 수리하여 재료비 5백 여 만원만 들어 최소한의 경비를 지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에 여유가 있다면 집은 새로 아담하게 지어 여름 더위와 겨울 추위는 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았겠다 싶습니다.


  만약 귀농하여 새로 집을 짓는다면, 최소한 방 한 칸 정도는 구들을 놓아 불을 땔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난방비가 오를 것에도 대비하고 목초액을 받아 농사에도 이용을 할 수 있거든요. 지금 저희 집은 방 세 개를 모두 나무로 불을 땔 수 있는 온돌방으로 되어있습니다. 나무보일러는 나무가 엄청나게 들어가므로 아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 농촌에서 대농을 한다는 사람치고 몇 천만원 빚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큰농사를 지으려니 기계가 필요하고 기계 살 돈이 없으니 농협에서 빌리고, 그 빚에 원리금 갚느라 한 해 농사지은 수입 다 들어가고, 그 빚 다 갚을 즈음엔 다시 새 기계를 사야하니 결국 농사지은 돈은 내 수중에서 놀지 않고 농협이나 농기계장사에게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더구나 올해는 비료값이 거의 배로 올랐기에 상대적으로 오르지 않는 농산물 가격과 비교해볼 때 돈을 벌 수 없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빚을 갚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정말 시골이 좋으신 분은 시골에 오시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시골에 오기 전에는 수없이 자신에게 되물어봐야 합니다. 지금의 삶을 결코 돌아보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앞서 말했지만 저 역시 3년간을 고민하면서 자신에게 수없이 되물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다시 여의도 고층빌딩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니 다시 옛 사무실에 앉아 있을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니 제게는 시골의 삶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저와 같은 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골 삶은 TV ‘6시 내고향’이 말하는 그런 낭만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오셔야 됩니다. 온 종일 움직인 대가로 겨우 밥이나 먹을 수 있을 정도이니 일하는 재미, 곡식이 자라고 열매 맺는 것 보는 재미 외는 여행이나 소위 문화라고 하는 영화, 연극, 음악 감상, 외식 따위 즐거움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될 겁니다. 여유가 있으면 굳이 그런 즐거움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만, 그런 여유가 사실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농사꾼에게는 요일이 크게 두 세 개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요일, 눈요일, 일요일 그렇습니다. 그런데 농사꾼의 일요일은 일반 사람들이 쓰는 일요일과 글자가 다릅니다. 비나 눈이 오지 않으면 일을 해야 한다는 일하는 요일이라는 뜻으로 순 한글입니다.


그래서 귀촌을 위한 조건들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첫째, 귀촌하는 이유에 따라 다르겠지만, 처음부터 너무 큰 경제적인 목표를 잡지 않았으면 합니다. 

둘째는 빚을 내어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셌재는 농촌에서 죽더라도 도회지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넷째는 가능한 몸 움직임을 좋아하는 사람, 즉 부지런한 사람이라야 시골 생활에 즐거움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바이오리듬이 새벽형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시골의 삶은 전등을 켜 놓고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여명에 일터로 나갔다가 해거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쉬어야 합니다. 일하는 시기는 봄에서 가을인데 봄부터 여름까지 아침 5시 반경이면 여명이 밝아오기에 그 때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더구나 한 여름에는 낮에 일을 할 수 없으니 새벽부터 일하고 낮에는 쉬어야 하니까요.


다섯째는 힘든 것을 잘 견디는 몸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네 삶은 힘이 들든, 심(心)이 들든 둘 중 하나는 듭니다. 남의 밥에 든 콩이 크게 보인다고 현재 도회지의 삶이 고달프니 시골의 삶을 동경하지만, 실제로 시골의 삶 또한 녹녹치는 않습니다. 저 같이 허리와 목이 긴 사람은 시골에 와서 살려면 정말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심(心)든 것을 참? 어려워 시골에서 살아야겠다는 사람이면 소규모 농사를 권하고 싶습니다. 제가 시골에 오기 전에는 71키로였지만, 최저 56키로까지 내려갔다가 이젠 아마 60키로 정도가 돼 있을 겁니다. 그만큼 몸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일을 지시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하니 살이 빠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농사에 맞는 몸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립니다. 체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 경우 근 5년간 허리가 아팠어요. 그리고 귀농 후 1년간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자고 나면 아팠어요. 귀농 전에 여러 가지 운동으로 몸을 다졌지만 농사 근육하고는 질이 달랐던 것 같아요.


여섯째는 귀촌에 아내를 동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만의 삶을 즐기겠다는 사람이 아니면 서로 합의해서 함께 귀촌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다만,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다면 떨어져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같습니다. 저 역시 1년 정도를 떨어져 살아 보았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 먼저 시골에 살면서 서서히 다른 쪽이 시골에 적응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쪽의 강요에 의해 시골에 정착하면 결국 불화로 인해, 행복하게 살자고 온 시골이 불행의 시작이 되는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