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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가는 길/느낌이 있는 풍경

미륵사지에서-하늘재 편지③

 

[미륵사지 미륵석불입상]

 

하늘재 편지미륵사지 절터에서

 

00,

이제 드디어 미륵사지 절터의 유물들을 둘러볼 시간이 되었군요. 저와 함께 저 안쪽, 낮은 산자락에 등을 대고 있는 미륵석불입상 쪽으로 가보시겠습니까?

 

미륵대원사지에 대한 몇 차례에 발굴결과(1977~ 청주대, 이화여대), 이 절은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가람 배치 형식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즉 금당(큰법당), 석등, 석탑이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금당터는 남쪽 산자락과 닿아있는 3면의 석축(石築)을 한 자리를 말하는데, 그 중앙에 북쪽을 바라보며 미륵석불입상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앞 북쪽을 향하는 일직선상에 석등, 그리고 오층석탑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미륵사지의 금당은 당초 석축 위에 목재로 된 지붕을 얹어 석굴의 형태를 띠었으며, 석불입상 앞으로 전실이 있었다고 하는군요. 언젠가 화재로 지붕이 소실되어 현재는 노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것인데, 당초 이루었을 이 석굴 형태는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계보를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또 이 금당터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특히 미륵당초라고 새긴 명문와(銘文瓦)의 발견은 이곳을 미륵사지로 추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륵사지 금당터 전경]

 

 

금당은 불상이 있는 주실(主室)과 주실 앞에 있는 전실(前室)로 구분되는데, 주실은 평면이 사각형으로 되어있으며, 북쪽 방향을 제외한 3면이 돌로 높게 쌓아 올려져 있습니다. 그 벽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돌기둥과 돌기둥 사이에는 벽장과 같은 시설이 3개씩 있으며, 그 안에다가 앉아있는 나한상 등이 조각된 돌판 3매씩을 안치하고 있습니다. 또 이 벽장 시설 위에 다시 돌을 쌓고, 동벽과 서벽에 6개씩의 벽장 시설을 하여 앉아있는 보살상을 1구씩 안치했다고 하는군요. 벽장 시설이 없는 남쪽 벽면에는 앉아있는 부처와 보살상이 있는데, 벽체의 윗면 안쪽에는 주춧돌로 보이는 큰 돌이 같은 규격으로 놓여있어, 지붕시설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주실에는 주춧돌이 사방에 놓여 있고, 그 중앙의 넙적한 판석을 깐 바닥 대좌 위에 미륵석불입상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00,

저가 그 주실 3면의 석축을 둘러보기는 하였으나, 솔직히 말해 그 안의 유물들에 대하여는 위의 설명처럼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럴 줄 아셨다고요? , 사실 이 미륵사지의 주인공 격인 미륵석불입상을 바라보면 다른 것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을뿐더러, 저 같은 얼치기 나그네로서 절터 벽면의 표정까지도 한눈에 다 읽기란 정말 버거운 일이기도 하니까요. 위의 설명은충북학연구소」의 보고서 충북의 사찰을 찾아서(2001)’를 참고 하였으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미륵사의 주존불인 이 미륵석불입상은 보물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높이가 무려 10.6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며,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고 합니다. 절터 맨 안쪽에서 북쪽 송계계곡을 향하며 노천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이 불상은 앞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본래는 석굴법당 안에 있는 형태였으나 법당이 소실된 후 노천에 드러나게 된 것이랍니다.  불상의 양식을 보면 보관(寶冠: 여기서는 갓)까지 합하여 6개의 돌로 조각하여 세웠는데, 얼굴부분이 유난히 희게 보이는 것이 좀 특이합니다. 물론 다른 고려시대 미륵석불입상처럼 겨우 형체만 살린 팔 부분도 그렇지만요. 전문학자들의 의견은 석굴의 석재가 튈 정도로 큰 화재가 났었다면 불상도 분명 훼손되었을 것이고, 당초 석굴을 이루던 건축물들이 소실되자 그을린 얼굴부분을 교체하며 갓을 씌우지 않았을까 추정한다고 합니다. 즉 얼굴부분과 나머지 부분의 조성연대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마음 착한 이가 이 석굴입상을 보면 자비롭고 화사하게 웃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사악하다는 증거입니다

 

위의 말은 오래 전 언젠가 이곳에 계신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저는 정말 낭패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저의 눈에 보이는 미륵부처님의 모습은 흔들림 없는 無心의 표정이지, 스님의 말씀처럼 화사하게 웃는 모습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00,

그래도 그렇지, 사악하다니요...

이왕 내친김에 저는 감히 당돌하게 마의태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런 생각을 꾸며봅니다.

 

마의태자의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이런 말을 던졌다. 一切는 空하며, 나라를 잃은 일 조차도 연기(緣起)에 의한 것이니, 부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욕망과 원망 등 마음의 끈을 놓아라. 왕자의 몸을 이렇게 도망치는 삶으로 굴곡 지움은 현세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 가를 너에게 알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부디 비우고 비워 미망(迷妄)에서 벗어나 더 높고 깊은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라

 

저는 언젠가부터,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이곳을 지나 금강산으로 간 게 아니라, 오히려 이 곳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허망한 삶에서 구원받아, 진정한 삶을 찾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미륵사지 팔각석등]

 

금당 바로 정면에는 지방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된 미륵리 석등이 있는데,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으며 대석하대석이 하나의 돌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석등은 모습은 이곳의 다른 유물들에 비해 제법 근사한 몸매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대석(밑돌)에 여덟 잎의 복련이 새겨져 있고, 상대석(윗돌)을 잇는 간주석(중간기둥) 8면 기둥형태로 조화로운 크기와 맵시로 서있으며, 상대석에는 역시 여덟 잎의 앙련이 새겨져 있습니다. 역시 팔각을 이룬 화사석(불 켜지는 공간을 두르는 돌) 4면에는 화창이 있고, 그 위로 옥개석(지붕돌)과 보주(寶珠:꼭대기 장식)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미륵사지 오층석탑]

 

그리고 석불입상과 석등과 함께 일직선 상을 이루는 절터의 중앙쯤 되는 곳, 즉 금당 터의

정면 중앙에는 투박하지만 정감이 넘치는 모습을 한, 보물 제 95호로 지정된 미륵리 오층석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높이가 6m에 이르는데, 자연석을 다듬어 지대석과 기단부를 조성했으며, 기단부의 내부를 파내어 4면의 벽석을 만든 형태라고 하는군요. 별다른 특징이 없는 모습이지만, 기교를 부리지 않은 모습은 보면 볼수록 편안하고 정겨운 느낌을 줍니다. 이 탑의 꼭대기에 마치 피뢰침처럼 휘어져 있는 철제 찰주(擦柱:탑 꼭대기 중심 기둥)의 모습도 슬그머니 웃음짓게 만듭니다. 이 석탑 상층부에는 의상대사가 죽장을 꽂아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는데, 이 탑의 조성연대를 고려시대로 본다니 아무래도 그 이야기를 잇기는 힘들겠지요.

 

 [미륵사지 사각석등]

 

이것으로 미륵사지 중앙 일직선 상으로 서있는 주요 유물의 소개는 끝났습니다. 이제 바깥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오른쪽, 즉 동쪽에 있는 사각모양 석등을 소개해볼까요. 이 석등도 참 단순해 보이면서도 친밀감이 있어 보입니다.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운 석등에다가, 석등을 받치는 기둥도 사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주(네모진 기둥)에는 연꽃모양이 시원스럽게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가보지 못했습니다만, 논산의 관촉사에도 이런 모습의 석등이 있다고 하는군요. 아무튼 중심라인의 팔각석등 보다는 훨씬 수더분한 모습인데, 그러기에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석등입니다.

 [미륵사지 돌거북]

 

 

사원 경내 입구의 약수터 있는 곳 바로 앞에는 거대한 돌거북이 있습니다. 이 돌거북은 1977년도 발굴 당시에 반만 드러났던 것을 출토한 것인데, 등에는 비신(碑身)을 세울 수 있게 홈이 파져 있으나, 비신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길이가 6.05m, 높이 1.8m, 너비가 4m에 이르는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에서도 가장 큰 거북이라고 하는군요. 이 비석이 발견되면 미륵사지의 많은 일들이 역사 속으로 드러나겠지만, 미완의 비석인 지, 아니면 비석이 사라져 버린 것인지는 몇 차례의 발굴과정을 거치면서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 거북의 왼쪽 어깨 부근에는 기어 올라가는 앙증맞은 새끼 거북 2마리가 조각되어 있어 보는 사람들의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데, 거북을 조성한 석공의 부드러운 숨결과 해학에 참으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습니다.

 

 [미륵사지 돌거북 등의 새끼거북]

 

그리고 절터를 바라보며 오른쪽 개울가에는 온달장군이 힘 자랑을 했다는 공깃돌 바위가 큰

암괴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고구려의 장수로서 죽령과 계립령 이북의 고토(故土)를 회복하지 않으면 되돌아 오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신라와 싸우기 위해 출전한 것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온달장군은 신라가 개척한 계립령(하늘재) 아래에서 군사를 주둔하며 성을 쌓고 군사를 교련했는데, 그는 미륵당 내의 물을 마시고 힘이 세어져 바로 이곳에 있는 공깃돌을 갖고 힘자랑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공깃돌을 온달장군 공깃돌이라고 부르는데, 이 돌을 들어내면 하늘이 노하여 청천벽력이 일어난다고 전설은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 바윗돌 앞에는 뜻밖에 수령이 꽤 오래된 후박나무가 마치 바위를 수호하듯 서있습니다. 지난 여름 지리산 대성마을에서 비를 맞으며 만났던 그 나무의 붉은 열매를 이곳에서도 보게 되니 얼마나 반갑던지요.

 

 

[온달장군 공깃돌 바위]

 

 

 [공깃돌 바위 앞 후박나무]

 

그밖에 미륵사지의 유물로는 절터 입구 오른쪽 개울가에 2개의 연화문을 조각한 당간지주가 쓰러진 상태로 누워있으며, 불상 대좌로 보이는 연화문 받침돌도 있습니다. 전부 1977년도 발굴 시에 출토된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늘재로 가는 길가에도 지방문화재 제 33호로 지정된 미륵리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이상으로 대략적인 미륵사지의 유적유물에 대한 안내는 끝내도록 해야겠습니다.

 

00,

신라시대부터 우리나라 국도로서, 의 역사를 연 하늘재나말여초 그 격동의 시절을 즈음하여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미륵사지, 그리고 우리나라 고대사의 각축의 장이 되었던 중원의 땅들, 이곳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의 숨결은 의외로 깊고 넓어 예사로 지나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저를 이렇게 걸음하게 하였고, 모자라나마 이제 이 긴 글로 저의 마음을 내려놓으며 마무리짓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느낌을 제대로 정리하는 일은 언제나 마음만 앞서고, 그 결과물은 늦어지며 내용도 마땅치 않아, 예상치 않았던 마음의 부담을 늘 지게 됩니다. 스스로의 욕심이 부른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미숙하나마 그것을 벗어나는 기쁨 또한 적지 않으니, 말 그대로 행복한 괴로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초가을에 시작한 이야기를 겨울이 오고 나서야 이제 겨우 마칩니다만, 미륵사지에 생각을 가두어 놓고 한동안 하늘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으리라 믿습니다.

 

00,

이제 그만 편지를 마치려 합니다. 그 동안 이 긴 글 읽고, 또 관심 가져 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차가워지는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내내 건강하시길 빕니다.()

 

두류/조용섭

 

[답사일자 :07/09/09. 기록정리일자 07/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