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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두류실/두류실 일기

지리산 시집 '벽소령'/강영환

 

 

『열 다섯번째 시집을 내었다. 그동안 홀로 아니면 여럿이서 함께 다니던 지리산을 형상화 하는데 매달려 왔다. 지리산은 내게 신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가는 지리산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아마도 끝이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지리산 시집은 1권을 더 쓰고는 문을 닫을 것 같다. 불무장등, 벽소령, 그리운 치밭목(가제)의 3권이 될 것같다.』(작가의 말 중에서)

 

1977년 『동아일보』신춘문예와 1979년 『현대문학』지 천료로 등단한 강영환 시인의 열네 번째 시집 『벽소령』이 나왔다. 이 시집은 2005년 발간한 시집 『불무장등』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시인의 지리산 연작시집이다. 모두 세권으로 예상되는 지리산 시편 중 두 번째에 해당하며 8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 『불무장등』에 대한 시세계를 평론가 황선열 씨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서평은 같은 지리산 연작에 해당되는 이번 『벽소령』 시집에도 적용된다.


강영환의 지리산 시집에서 지리산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의 인간 존재를 반성하게 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 지리산은 자아가 부닥치는 역사 인식의 공간이며, 자의식 속에 내재한 현실 인식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시집은 시인의 단순한 산행 체험을 넘어서 역사 인식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시집은 ‘지난 25년간 산행의 경험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냈다’는 점에서 지리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지리산 어느 골짜기, 어느 산봉우리에 애틋한 사연이 없을까마는 거대한 공룡처럼 엎드린 지리산의 형상을 시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산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지리산을 형상함으로써 그것을 파괴하는 인간의 무모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 연작시는 골짜기마다 서려있는 자연의 신비 속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진정성을 모색하고 있다. 자연과 합일하는 경지가 아니라, 자연을 거울삼아 인간의 존재를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별을 삼킨 달이 홀로 만삭이다

어둔 하늘에 멀건 낯바닥 걸어두고

꿈틀대는 능파의 수작을 본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청상의 산녀는

뱁실령 베고 누워 발을 뻗으니

광활한 우주도 몸을 맡겨 수줍고

몸매 드러낸 남부능이 몸을 꼬아

대성골 지친 허공이 침상을 낮춘다


그대 결코 잠들지 못하리라 누운 자리

등뼈 결리는 돌을 뽑아 마음에 쌓으니

칠선봉 일곱 봉우리가 구름 위에 뜨고

지나는 차가운 바람도 기가 세다

시린 이 드러낸 얼굴 푸르러 푸르러

섬진강 모래 벌 가는 달빛은

마음에다 서늘한 발자국을 찍어

못 다한 말씀을 걸어갔다

 <차가운 달 ―벽소령> 전문


시는 벽소령에서 바라본 달밤의 정경이다. 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을 <별을 삼킨 달이 홀로 만삭이다>고 했고 달빛이 비친 능선의 굴곡을 바라본다. 꿈틀거리며 던지는 추파가 외로움을 간직하고 잠든 산녀를 본다. 자연을 객관화하고 그 대상에 자신을 비춤으로써 슬픈 이미지이다. 여기에서 그의 시는 근원적 슬픔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지리산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은 지리산에서 일어난 근대역사의 아픈 부분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고 있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의 서정성에서 역사 인식으로 옮겨 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리산은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가 새겨진 공간이다. 지리산 어느 골짜기마다 빨치산과 토벌군의 치열한 전투 현장이 아니었던 곳이 없으며, 그 흔적의 여정 속에는 우리 역사의 치욕적이고 불행한 과거가 놓여 있다. 그는 지리산을 산의 풍경으로만 보지 않고, 사람살이의 현장으로 묘사하면서 역사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시집의 특징은 지리산에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을 하나하나 답사하듯이 밟아간 것이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경에만 도취되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풍경 뒤에 숨어있는 민족의 한을 끌어안고 있다. 그의 시가 자연에 포섭되어 있으면서도 자연에 동화하지 않고 대타의식을 보이는 까닭은 그 자연 속에서 슬픈 역사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산죽은 자랑처럼 길을 숨기고

안개는 길 없는 산을 혼자 넘었다

불빛 작은 흔들림에도 바람처럼

산죽 비트에 몸 숨겼다가

희미해진 루트를 타는 그림자

인적 없는 대낮에도 몸을 숨겼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산죽은

쫒기는 이에게 얼마나 든든한 기둥이었든가

두 번 다시는 산에 들지 말라

안개가 슬슬 가져가는 두지동

몸 구부러진 늙은 산죽은

지워진 길 끝에 앉아서도

몸 숨기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생명 루트―초암능> 전문


시인은 지리산을 통해서 자연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을 넘어서 비극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리산이 갖고 있는 자연의 비경(秘境)과 역사의 비경(悲境)을 동시에 만난다. 자연은 인간의 행위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 거울의 이미지가 그의 시에 소재가 된 지리산의 상징이다. 지리산은 인간 존재를 성찰하게 하고, 이 성찰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각성을 하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 지리산은 역사를 인식하는 하나의 지평으로 자리하고 있다.


강영환의 시집은 지리산 등정을 위한 하나의 완성된 지리지이면서 등정의 감회를 함께 하는 산행시집이다. 지리산 계곡의 깊은 속내까지 훑어내면서 그 풍경의 아름다움과 한, 역사 인식의 지평까지도 공유하게 된다. 이 시집은 지리산을 시적 소재로 삼으면서 그곳에 얽힌 이야기와 역사의 현장, 그 많은 사연을 완성된 시적 구성과 유장한 가락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지리산을 삶의 공간과 역사의 공간으로 끌어안고 있다 <황선열>


▲ 강 영 환 약력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공중의 꽃」 으로 등단.. 79년 「현대문학」 시 천료(필명/강산청),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남해」 당선. 시집으로 「칼잠」,「눈물」, 「뒷강물」, 바다시집「푸른 짝사랑에 들다」,「집을 버리다」와 지리산 시집 「불무장등」,「벽소령」외 7권. 시조집 「북창을 열고」, 「남해」가 있으며, 월간 「열린시」 주간 역임. 부산경남젊은시인회의 초대 의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디지털 부산시인회의 대표. 부산민예총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제 26회 이주홍문학상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