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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13)홍세태의 활약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3)홍세태의 활약상 북악산 아래 장동 김씨들이 모여 살았다.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아들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1682년에 낙송루(洛誦樓)라는 만남의 공간을 꾸리자 노론 계열의 시인들이 자주 모여 시를 지었다. 한 동네에 살았던 홍세태도 이곳에 드나들며 동..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12)역관시인 홍세태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2)日·淸도 인정한 역관시인 홍세태 인왕산 호걸 임준원의 집에 가장 오래 얹혀 살았던 위항시인은 홍세태(洪世泰·1653∼1725)이다. 중인들은 대대로 같은 직업을 물려받았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우들까지 무인으로 활동하던 집안에 태어나 역관이 되었다...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10)호걸 임준원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0) 빈자 도와준 호걸 임준원 중인들은 서울의 북쪽 인왕산 일대와 남쪽 청계천 일대에 주로 모여 살았다. 지역에 따라 직업과 재산, 관심사가 달랐다. 서당 훈장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위항시인 정내교(鄭來僑·1681∼1757)는 스승 홍세태의 친구 임준원(林俊元)의 ..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009)필운대 풍월과 꽃구경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9) 필운대 풍월과 꽃구경 ●‘장안의 명승´에 사람들 모이다 조선시대의 체제와 제도를 명문화한 ‘경국대전(經國大典)’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에 의하면 “문무관 2품 이상인 관원의 양첩 자손은 정3품까지의 관직에 허용한다.”고 하였으며 “7품 이하의 관..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08)중인들 필운대·육각현서 노닐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8) 중인들 필운대·육각현서 노닐다 인왕산의 네 구역 가운데 지난주에 소개한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인왕산의 왼쪽 기슭이라면, 필운대와 육각현은 오른쪽 기슭이다.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다. 필운대 정자에서는 대원군 당시 핵심측근이었던..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06)인왕산이 중인의 터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6) 인왕산이 중인 터전 위항(委巷)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므로, 좁은 골목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인 이하였다. 한양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면 그 중간지대인 청계천 일대가 위항이었..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05)직업과 그 한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 직업과 그 한계 그동안 한양 인왕산 일대에서 활동했던 중인들의 이야기를 몇차례 소개했다. 그 가운데는 관청의 아전들이 많았지만, 역관이나 의원들도 있었고, 서당 훈장도 있었으며,인쇄전문가도 있었다. 조선시대 신지식인 이라고 평가되는 중인은 과연 어..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03)송석원시사의 인재 장혼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송석원시사의 인재 장혼 위항시인들이 주관하는 백일장인 백전(白戰)에 수백명이나 참석할 수 있었던 까닭은 송석원시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천수경이나 장혼이 한양 인왕산에서 커다란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항시인 이경민이 편찬한 위항인들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