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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0)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김범우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0)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김범우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된 시기를 윤지충의 진산사건이 일어난 1791년 이전과 신유교난이 일어난 1801년 이전, 그리고 그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면 지도층의 신분이 확연히 달라진다. 조광 교수는 ‘조선후기 천주교 지도층의 특성’..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29)최초 주간지 기자 오세창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9)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 기자 오세창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는 1883년 10월부터 글자 그대로 열흘에 한번씩 나왔는데, 갑신정변 때에 건물과 기계들이 파괴되어 한때 폐지되었다가 주간지로 복간하였다.16세 나이로 1879년 역과에 합격했던 오세창(18..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28)역관 오세창, 우리나라 서화 집대성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8) 우리나라 서화를 집대성한 역관 오세창 중국에서 한자가 전래된 이래, 우리나라의 서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우리 것을 만들어냈다. 한자라는 글자 자체가 중국의 것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중국의 금석문과 명필들의 서첩을 구입해 본받았지만, 추사 김정희..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27)譯官 오경석의 외교활동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7) 역관 오경석의 외교활동 조선시대 외교의 강령은 사대교린(事大交隣), 즉 ‘큰 나라 중국은 섬기고 이웃 나라 일본과는 사귄다.’는 것이다. 외교는 예조(禮曹)에서 관장했지만, 실제적인 사무는 사역원과 승문원(承文院)에서 맡았다. 중국이나 일본에 가서 통..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73)최후의 주화-척화 논쟁 [병자호란 다시 읽기](73)최후의 주화-척화 논쟁 최명길의 주장은, 척화(斥和)하여 청과 싸우겠다는 결심을 굳혔으면 ‘공세적’으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말로만 ‘척화’를 외치며 미적거릴 경우, 청군의 철기(鐵騎)를 조선 영토 깊숙이 불러들이게 되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것을 우려한 계책이었..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260개화파의 鼻祖(비조) 오경석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6) 개화파의 비조(鼻祖) 오경석 우리나라 개화파의 비조(鼻祖)로 흔히 오경석·유대치·박규수 세 사람을 꼽는다. 역관 오경석(吳慶錫·1831∼1879)은 북경을 열세 차례나 드나들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시달리는 청나라의 모습을 보고 자주적으로 개화해야 한다..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24)서울에 中人은 얼마나 살았을까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4) 서울에 중인은 얼마나 살았을까 조선후기 전문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인들은 대부분 서울에 살았다. 지방에는 중인이 맡을 관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신분은 호적에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하버드대학의 와그너 교수가 1663년에 작성된 서울 ..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23)동래부순절도 그린 장교 변박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3) ‘동래부순절도’ 그린 장교 변박 부산(동래)은 일본(쓰시마)과 맞닿아 있어, 국방상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외교와 무역이 이뤄지던 왜관(倭館)이 부산에 있었고,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동래읍성과 부산진성도 역시 부산에 있었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