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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기록]

황홀한 선인들의 숨결-쌍계사④

 

 

[쌍계사 진감선사대공령탑비를 중심으로 공간 풍경]

 

 

 

 

[진감선사대공령탑비 2007/4.1]

 

 

▣선인들의 숨결을 느끼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령탑비(眞監禪師大空靈塔碑)

 

쌍계사 팔영루를 우회하여 대웅전 아래의 공간으로 들어서면, 마당 중앙에 힘겹게 서있는 오래된 탑비(塔碑)를 만나게 된다. 비신(碑身)의 한면을 가득 메우며 해서체로 또박또박 새겨져 있는 글은 어렵기도하지만 파손과 마모가 심해 이제 알아보기도 쉽지않다. 다만 비신을 업고있는 귀부(龜趺) 거북의 표정에서 천년세월의 연륜을 느끼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국보 47호인 이 탑비의 정식명칭은 ‘진감선사대공령탑비(眞監禪師大空靈塔碑)’이며, 고운 선생이 글을 지었다는 이른 바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이다. 이 탑비는 지금으로부터 1120여년 전(885~886년 신라 헌강왕 ~정강왕)에 쌍계사(당시의 이름은 玉泉寺) 창건주 진감선사 혜소스님의 탑비를 조성하라는 임금의 지시에 의해 고운 선생이 글을 짓고 썼으며 환영(奐榮)스님이 새겨, 진성여왕 1년(887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진감선사 혜소스님은 31세 때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禪宗(선종)을 접하였고, 약 26년 간의 오랜 수행생활 끝에 귀국하게 된다. 경북 상주 북장사(지금의 남장사)에서 약 6년 동안 주석하시던 스님은 삼법화상이 중국에서 육조 혜능대사의 頂相(정상)을 모셔와 세운 경남 하동 화개골 난야터를 찾아 玉泉寺(옥천사.쌍계사의 옛이름)를 창건하니, 삼법화상이 터를 잡은 후 100년 만의 일로, 실질적인 쌍계사 산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혜소스님은 선종불교와 범패음악 보급에 힘쓰시다가 신라 문성왕 12년(850년), 세수 77세를 일기로 입적하게 된다. 세상의 명리에 초연하며 왕의 부름도 마다하던 스님은 당신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일절 남기지마라는 유언을 남기지만, 후일 선사를 사모하는 후학들의 뜻을 받아들인 임금은 당나라에서 막 귀국한 서른 살 즈음의  문호(文豪) 고운에게 탑비 조성을 지시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드러내지 마라 하던 진감선사의 행적은 쌍계사의 역사와 함께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 천년세월동안 지리산 자락의 찬란한 문화의 숨결로 서리게 된 것이다. 탑비가 세워진 것은 스님 입적 후 36년, 고운 귀국 1년 후의 일이다.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말라고 한 스님의 유언을 어기고 글을 남기게 된 것에 대해 고운선생은 ‘수행의 남은 보답이니 당연하다’는 뜻으로 할 일을 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다음은 탑비에 나오는 그 내용을 옮긴 것이다.

 

『아름답구나, 해가 동쪽에서 나오니 어두운 곳을 비추지 않음이 없고, 바닷가에 향나무를 심으니 오래도록 더욱 꽃답도다. 어떤 사람이 “선사께서 명도 하지 말고 탑도 하지 말라는 훈계를 내렸는데, 후대에 내려와 우리 제자들에 이르러서는 확실히 선사의 뜻을 받들지 못하였다. 이는 그대들이 구하고자 한 것인가, 아니면 왕이 하라고 명한 것인가? 실로 백옥의 티로구나” 하였다. 아! 그르다고 하는 사람은 또한 그르도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남은 수행의 남은 보답이니, 재처럼 없어지고 번개처럼 끊어지는 것보다는 할 때에 할 만한 일을 하여 명성을 대천세계(大千世界)에 떨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신라 경문왕 8년(868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던 고운선생은 그곳에서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당나라에서 내란(황소의 난)이 일어나던 25세 때에는 토벌군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반란군의 두목 황소에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보내 혼비백산을 하게함으로써 문명을 크게 떨치게 되었음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헌강왕 11년(885년) 귀국하여 '시독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지감'이란 직책을 맡았던 고운선생의 벼슬생활은 그 후 정강왕의 뒤를 이은 진성여왕이 왕에 오르고 난 후부터는 그리 평탄하지 않았던 듯하다. 태산(정읍),천령(함양),부성(서산) 등지의 외직을 전전하던 선생은 기득권 세력에 의해 외면당하고 중용되지 못하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방랑의 길에 올라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효공왕 3년(899년), 방랑에서 돌아온 선생은 가족을 데리고 세속의 명리와 완전히 결별하며 가야산으로 들어가고, 신라는 그로부터 36년 후 멸망하게 된다.(935년)

 

유불선에 도통하였으며 특히 불교와도 가깝게 지낸 선생은 후일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에 아첨하였다’라는 이유와, ‘나라를 구할 생각을 않고 산으로 들어갔다’는 명분론에 의해 혹독한 비판도 받게 되지만, 그 비판 역시 오늘날의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탐탁치 않은 일이다. 오로지 떠오르는 나의 생각 하나는 ‘선생이 버림으로써 얻었을 그 무엇’’ 궁금할 따름이다. ‘신선이 되어 지리산과 가야산을 오고 갔다’는 이야기, 지리산 자락에서 시나브로 마주치는 선생의 체취는 결코 예사롭지가 않기 때문이다.

 

고운선생인 글을 지었다는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만수산의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초월산의 대숭복사비, 희양산의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를 일컬음인데, 특히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선생이 직접 쓴 유려한 해서체의 필치로 유명하다.

 

다음은 雙磎寺誌(쌍계사지)의 탑비 설명을 발췌한 내용이다.

 

『탑비의 비문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단은 서론으로 당나라 유학에 대한 자부심을 피력하여 불교와 유교가 추구하는 도에 차등이 있을 수 없고 신라인과 중국인이 인성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자존의식의 표출하며, 진감스님이 당나라로부터 선도(禪道)를 전하여 나라를 빛낸 인물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제2단은 진삼선사의 출생 및 출가를 비롯하여 쌍계사 창건과정 등 그의 생애를 서술하고 있다. 제3단은 비문을 찬술하게 된 경위를 서술하고 있으며 제4단은 4언절구로 이루어진 게송으로 명사(銘詞)에 해당한다.

 

이 탑비는 귀부와 이수 및 탑신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으며 이수 정면 용트림 조각이 전액 판 좌우에서 서로 머리를 들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중앙에 피어난 연꽃받침 위의 동그란 보주를 서로 차지하고자 대결하는 듯 힘차 보인다. 현재 비신(碑身)의 우측 상부는 크게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고 균열이 심하여 비신사면에 보조철골을 세워놓은 상태이다. 이처럼 비면에 손상이 많으나 다행히도 1725년(영조1) 목판에 모각9모각0한 비문이 있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비문의 글씨는 자경(字徑) 2.3cm, 자수(字數)2423개이다.』
[쌍계사지, 탑비 설명에서]

 

당초 마음 먹은 것과는 달리 탑비의 기록을 모두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이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음도 다행이다. 다시 한번 ‘쌍계사지(雙溪寺誌)’의 보배로움을 느끼며, 수안스님과의 인연을 마음에 새긴다. 쌍계사지에 수록된 비문(碑文)의 번역내용을 발췌하여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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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감선사대공령탑비

 

『무릇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며, 사람에게 있어서도 나라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자제들이 승려도 되고 유학자도 되어 서쪽으로 큰 바다를 건너갔도다. 이중의 통역을 거치면서도 학문을 좇아 목숨을 배에 맡긴 채 중국으로 향하였다. 빈 채로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고 앞은 힘들어도 뒤에는 얻었으니, 마치 옥을 캐는 사람이 곤륜산의 높음을 꺼리지 않고, 구슬을 찾는 자가 驪龍(여룡:검은 용)이 있는 바다의 깊음을 마다하지 않는 것과 같도다.(중략)

 

아름답구나, 해가 동쪽에서 나오니 어두운 곳을 비추지 않음이 없고, 바닷가에 향나무를 심으니 오래도록 더욱 꽃답도다. 어떤 사람이 “선사께서 명도 하지 말고 탑도 하지 말라는 훈계를 내렸는데, 후대에 내려와 우리 제자들에 이르러서는 확실히 선사의 뜻을 받들지 못하였다. 이는 그대들이 구하고자 한 것인가, 아니면 왕이 하라고 명한 것인가? 실로 백옥의 티로구나” 하였다. 아! 그르다고 하는 사람은 또한 그르도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남은 수행의 남은 보답이니, 재처럼 없어지고 번개처럼 끊어지는 것보다는 할 때에 할 만한 일을 하여 명성을 대천세계(대천세계)에 떨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龜趺(귀부)가 碑身(비신)을 짊어지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새 임금(정강왕)이 이어 즉위하였으나, 질나발과 저가 서로 응하듯이 의리로 부촉한 것에 화합하여 좋은 것을 좇아 하시었다. 다만 이웃 산의 절도 玉泉(옥천)이라 일컬었으므로, 이름이 겹쳐져 백성들의 귀를 미혹하게 할까 염려하였다.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달리하려고 할 때는 마땅히 옛 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라야 하는데, 이 절이 자리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洞口(동구)에 두 시냇물이 마주 대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쌍계사라는 題額(제액)을 하사하였다.

 

또 臣에게 명을 내려 “선사는 수행으로써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비명을 지으라”고 하셨다. 臣이 절을 하며 “예예” 하고 물러나와 생각하니, 얼마 전에 중국에서 이름을 얻었고 책 속에서 기름지고 살찐 것을 맛보았다고는 하나, 아직 성인의 경전에가지 흠뻑 취하지 못하였고 오직 깊이 우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하물며 불법은 문자를 떠났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 않은가. 굳이 말하게 되면 수레가 북으로 향하는데 남방인 郢(영)나라로 가려는 것과 같도다. 다만 임금의 보살핌과 門人들의 큰 바람으로 문자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의 문에 밝게 보여줄 수가 없겠기에, 감히 몸으로 유교와 불교를 겸하고 힘으로 五能(오능:글을 짓기는 하지만 깊은 뜻은 다 표현하지 못한다는 의미)을 본받아 비록 돌에 의탁한다 할지라도 부끄럽고 두렵도다. 그러나 道는 억지로 붙인 이름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겠는가? 석각으로 새길 만한 글을 臣이 어찌 감당하리오마는, 거듭 명령하신 임금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아래와 같이 명을 짓노라.

 

입을 다물고 선정을 닦았으며
마음으로 불타에 귀의했도다
근기에 무르익은 보살이라
넓혀도 다른 것이 아니로다
용맹스레 호랑이 굴을 찾아
멀리 바다를 건너셨으니
가서는 秘印(비인)을 전해받았고
와서는 고국 신라를 교화했도다
그윽하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바위등에 터를 잡아 절을 지으니
물에 비친 달이 마음을 맑게하고
구름과 도랑물은 흥을 붙었도다
산은 성품과 더불어 고요하였고
골은 범패와 더불어 응하였도다
(중략)

 

바다는 스스로 움직이지만
산이야 어찌 움직이겠는가
생각도 없고 분별도 없으며
깎을 것도 새길 것도 없었도다

(중략)

 

지혜의 가지가 두루 빼어날 즈음
법의 기둥이 문득 무너졌으니
깊은 골짜기가 처량해졌고
연기와 칡넝쿨도 초췌해짐이로다
사람은 가고 도는 남아 있건만
끝내 잊을 수가 없었기에
뛰어난 선비가 소망을 펴자
임금이 은혜를 내리셨도다
法燈(법등)은 신라에 전해지고
탑은 산 속에 우뚝 섰으니
天衣(천의)에 의해 반석이 다 닳도록
영원토록 佛門(불문)에 빛나기 바라보라

 

 

887년(진성여왕10 7월 일에 세우고
奐榮(환영)스님이 글자를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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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쌍계사지
2. 다큐멘타리 지리산(김경렬 저)

 

 

                                                                                                     07년 4월 2일
                                                                                                      두류/조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