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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보옥대와 칠불암-地名에 나타난 불교③

[다음 글은 부산 미륵사 주지스님이시던 백운(白雲)스님이 1988년 11월1일 불교관련 잡지 불일회보(佛日會報)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정설(定說)로 받아들여지거나 혹은 전해 내려오던 지리산의 역사.이야기와는 다소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만, 나름대로 논리와 의미를 지닌 글이라 여겨지며, 특히 수많은 사암(寺庵)이 존재하며 불국토(佛國土)를 이루었을 지리산에 대하여 불교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관련하여 내린 여러 곳의 지명 해석은 무척 독특하고 흥미롭기까지 합니다. 재작년, 약 20년 전 지면(紙面)을 통해 나왔던 이 기록을 뒤늦게 발견하고 흥분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뒷날의 공부를 위한 자료로 삼고자 기고문을 편집하여 이곳에 옮겨놓습니다.]/[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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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과 불교-3

 

♧글/白雲/스님. 부산 미륵사

 

[전 편에 이어서 계속]

 

보옥대(寶玉臺)와 칠불암(七佛庵)

 

우리나라의 불교역사를 흔히 1600년이라고 한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에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승(僧)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불경을 전한 것을 시초로 삼는다. 이는 삼국사기를 취신(取信)한 기록인데, 기실 삼국사기는 신라를 높이고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발해 등을 깎아 내린 아주 편파적인 사기(史記)이므로 공신력이 없다. 그래서 보각국존 일연(一然)선사는 삼국유사를 써서 삼국사기에 누락된 많은 실사(實事)들을 후대까지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고구려보다도 약 3세기나 먼저인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 대에 남해바다를 통하여 가락국에 들어왔다.

 

인도의 아유타국 왕자인 보옥조사(寶玉祖師)는 출가한 사문인데, 누이 황옥공주(黃玉公主)와 함께 가락국에 와서 조사(祖師)는 동방에 불법을 전하고 공주는 수로왕과 혼인하여 열 왕자를 낳았으며, 이 중에 일곱 왕자가 외숙인 보옥조사를 따라 출가하였다.

 

일곱 왕자는 스승을 모시고 불모산(佛母山)에서 수도하다가 장소가 비좁아 더 좋은 곳을 찾아 가락국을 떠나게 되었다. 처음 정착한 곳은 가야산으로서 여기에서 몇 해를 지내다가 다시 행각(行脚)에 나서서 지리산 화개동천(花開洞天)으로 접어들어 자리를 잡으니 이 곳이 현재의 칠불암이다. 보옥조사와 일곱 왕자가 처음 좌정한 곳은 현재의 칠불암 터 바로 위쪽에 있는 운상원(雲上院)이니 암자의 동편 넓다란 잔디밭이 보옥대로서 스승과 제자가 주로 좌선하던 곳이다.

 

보옥조사는 인도 스님이니 고국의 수도자들이 주로 임간(林間)에서 공부하는 것을 본떠서 장소가 평평한 곳을 골라 수도장을 만든 곳이 곧 조사의 이름을 붙여 보옥대라 부르게 되었다. 이 보옥대야말로 인도식 수도장으로 조사는 청명한 날이면 제자들을 데리고 주로 이 대에서 좌선 또는 행선(行禪)을 했으며 제자들이 혹 권태가 나거나 졸음이 올 양이면 거문고를 타서 그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곤 했다. 이 보옥대가 뒷날 옥보대(玉寶臺),로 혹은 옥부대(玉浮臺)로 잘못 전해지기도 했는데, 이 절 창건주이신 보옥조사께서 처음 개기(開基)하시고 인도식으로 수도장을 삼으신 고사(故事)를 기념하여 보옥대로 부른 것이 올바른 이름이다.

 

또 신라 유리왕 22년(서기 45년)에 옥보고 선인(玉寶高仙人)이 창건했다는 [耘虛스님 저 불교사전]설은 보옥조사를 잘못 표기한 것이고, 다른 기록에는 1500 여 년 전에 옥보고 선인이 지리산에 들어가 거문고 배우기를 50년을 했다고 했는데 이 역시 보옥조사가 거문고를 즐겨 탄 데에서 생겨난 설화이다.

 

칠불암은 일골 제자가 3년을 수도하여 8월 15일 자야반(子夜半)에 성도한 뒤에 부왕인 수로왕이 국력을 들여 크게 가람(伽藍)을 짓고 사명(寺名)을 일곱 왕자의 성도를 기념 삼아 칠불암이라 명명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아직 불교가 보급되지 않았으므로 불제자를 스님, 또는 사문이라 부를 줄도 몰라서 성도한 일곱 왕자를 칠불이라 부르고 절 이름도 그렇게 붙인 것이다.

 

일설에는 보옥조사를 문수대성(文殊大聖)의 화현(化現)을 간주한다. 문수대성은 오봉성주 칠불조사(五峰星主 七佛祖師)이니, 칠불의 스승인 문수가 곧 일곱 왕자가 성불하여 칠불이라 칭한 것과 연관 지어 관찰하면 보옥조사가 곧 문수대성이 아닌가!

 

또 가락국의 주산인 불모산의 불모란 명칭도 문수가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성모(聖母)란 의미와 똑 같다. 물론 불모산의 불모란 칠불(칠왕자)의 스승인 보옥조사가 상주하신 도량이란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여기서 보옥조사를 불모라 일컬은 것은 문수와 祖師를 동일인으로 간주한 것이 분명한 것이다. 현금에 이르러 칠불암이나 불모산 장유암(佛母山 長遊庵)을 문수도량으로 여기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보아도 文殊와 寶玉을 따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겠다.

 

또 칠불암에는 보옥대 다음으로 아자방(亞字房)을 자랑한다. 이 선실(禪室)은 한문의 亞자형으로 지어진 방인데 높은 데서 좌선하게 되어 있다. 이 방은 서기 780년 경 담공선사(曇空禪師)가 축조했는데, 담공선사는 가지산 보림사(迦智山 寶林寺)의 보조(普照) 체증선사의 도반으로서 일찍이 입당(入唐)하여 서촉(西蜀)지방의 한 선원에서 아자방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스님은 귀국하여 영암 땅 바닷가에 축성암(祝聖庵)이라는 조그만 정사(精舍)를 짓고 보림하였는데, 바다의 낙지를 잡아 식사를 해결했다고 전해 온다.

 

뒤에 도반 보조 체증이 가지산을 중창할 적에 전체의 토목공사를 도맡았으며, 여기 방사(房舍)에 처음으로 온돌을 놓았으므로 온돌조사란 애칭(愛稱)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그 뒤 칠불암으로 이석(移錫)하여 비로소 亞자방 축조에 착수하여 성공을 거두어 천 여년이 넘게 내려온 오늘날까지 아무 탈없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이 보옥대의 칠불암은 우리나라 불교의 첫 발상지인데다 아자방이 축조되어 선중(禪衆)이 모이기 시작한 이래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란 편액에 걸맞게 운수납자(雲水衲子)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보옥대의 품격을 아무리 높여도 뉘 탓할 사람이 없을 것이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