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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탐방]

지리산 실상사

◑지리산 실상사 

 

강·논·숲이 어우러진 친환경 절터

 

지리산은 지리적으로 큰 산이다. 자연지리로나 인문지리로나 이만한 산은 남한 땅에 없다. 생태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지닌 무게가 다른 산들과는 다르다. 그래서 지리산 가는 길은 늘 조심스럽다. 버스에 오르기 전부터 마음의 옷매무새를 고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상사가 이 산의 북쪽 자락에 앉은 것은 신라 말 흥덕왕 3년(828년), 지리산 출신인 증각대사 홍척(洪陟)에 의해서이다.

 

인월 방면의 남천은 뱀사골에서 내려온 물줄기와 합수되어 만수천(萬壽川)이라는 새 이름표를 단다. 근래 들어 수량이 줄어들면서 개체수가 좀 줄긴 했으나, 갈겨니와 돌고기를 비롯해 16종의 다양한 2급수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다.

 

만수천을 따라 내려오면 멀리 천왕봉이 보인다. 무거우면서 부드러운 봉우리와 느리면서도 힘찬 능선은 지리산의 육성(肉性)을 여실하게 드러내 준다. 후덕하고 속 깊은 지리산의 모성(母性)도 거기서 비롯되고, 백두산, 묘향산, 오대산, 덕유산과 더불어 5대 덕산으로 불리게 된 것도 그 모성 때문일 것이다.

 

만수천에 걸린 해탈교를 건너 절까지는 500여m 논 뜰 가운데로 길이 나 있다. 큰 산에 기대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무 그늘 한 자리 없는 뙤약볕 시멘트 길은 모든 이들에게 유감이다.

산에 기댄 절치고 실상사만큼 너른 논 뜰을 거느린 곳도 별로 없다. 이 전답들은 실상사 사중에서 오리농법과 자운영 농법으로 유기농을 하는 현장이다. 얼마 전에 정부로부터 <친환경농산물재배농장> 인증을 얻었다.

 

실상사의 조경은 칠성각과 돌장승과 함께 매우 민중적인 점이 있다. 다른 절에 비해 경내에 유실수가 유난히 많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된다. 감나무, 호두나무, 밤나무, 산수유, 모과나무, 앵두,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그리고 몇 그루 반송까지……. 언뜻 무질서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가운데 보광전 뒤의 개서어나무와 소나무, 칠성각 옆 말채나무, 매점 앞 풍게나무 등이 노거수 몫을 하고 있다. 사중에서 정성들여 그들 나무에 이름표를 달아놓았다.

종무소 앞에 서 있는 풍게나무는 명패만 없다면 팽나무나 느티나무로 보아 넘길 정도로 그들 나무와 비슷하게 생겼다. 팽나무와 다른 점은 팽나무는 잎의 톱니가 상반부에만 있는 반면 풍게나무는 잎 가장자리 아랫부분까지 톱니가 나 있는 점이다.

 

극락전 공간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생태뒷간이 자리하고 있다. 폐자재로 만들어 마치 공사장의 가건물을 연상케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조계산 송광사나 선암사에서 볼 수 있는, 왕겨나 톱밥 같은 매질을 이용한 발효시스템 뒷간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깔대기가 달린 관을 통해 오줌을 따로 받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것은 용변 칸 앞에 창을 뚫어 바깥의 경관을 즐기도록 한 것이다. 겨우 손바닥만한 구멍일 뿐인데, 쭈그리고 앉으면 창 밖으로 실상사 논 뜰과 삼봉산-백운산-금대산을 잇는 산줄기와 푸른 논 뜰이 한 눈에 보인다. 이 창을 전통한옥에서는 눈꼽재기창이라고 부른다.

 

극락전 가는 길목의 연못엔 수련이 너무 무성하다. 수련의 잎들이 우굴쭈굴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절반 넘게는 솎아내야 할 터이다. 게다가 연못의 황소개구리 울음소리는 귀에 걸리고, 연못 속에 풀어놓은 비단잉어는 눈에 걸린다. 둘 다 격에 맞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화엄학림 뒤로 논과 미나리깡이 있는데, 여름이면 논과 논도랑에 보풀과 물매화가 꽃을 피운다. 올해는 때가 일러 아직 관찰되지 않았다. 그러나 생육환경이 좋지 않아서 언제 사라져버릴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잡풀이라 하여 무심코 뽑아 없애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따로 습지공간을 마련해 옮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법 그윽한 솔밭 안에는 실상사 식구들이 재배하는 표고버섯 재배장이 있고, 솔붓꽃을 비롯한 몇 종의 야생화들이 피어있다.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 병약한 나무들은 숲 관리 차원에서 적당히 솎아줘야 한다. 지금도 간벌 시기가 늦다.

 

낯선 침입자들이 나타나자 물떼까치들이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실상사 주변에는 강과 농경지와 숲이 두루 어울려 있기 때문에 서식하고 있는 조류들이 많은 편이다. 소쩍새와 붉은배새매는 천연기념물이며, 청호반새와 검은댕기해오라기 등은 환경부에서 지정한 보호종이다.

 

약수암(藥水庵) 가는 길은, 경사가 좀 있긴 하지만, 1km 남짓한 산길은 걸어볼 만한 숲길이다. 특히 30년생 전후의 청솔들이 뿜어내는 솔향기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때죽나무, 쪽동백, 산딸나무 등의 활엽수들도 간간이 섞여 있지만, 소나무 단순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소나무들이 울울창창하다.

 

이 구간의 야생화들은 울창한 숲 때문에 다양성이나 개체수가 좀 떨어지지만, 그를 대신해 때죽나무와 여름싸리, 산딸나무 등이 때맞춰 꽃을 피워내고 있다. 꿀을 따기 위해 멧노랑나비와 왕자팔랑나비 등 몇 종의 나비들이 객을 따라 산길을 오르고 있다.

 

약수암의 본전은 실상사와 같은 보광전이다. 보광전에 모셔진 보물 목각탱화는 나무속에 깃든 불보살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낸 솜씨는 천의무봉이다.

 

암자 주변도 소나무들이 우점하고 있다. 소나무나 잣나무 같은 침엽수 단순림은 산불에 취약하다. 그래서 보광전 뒷길은 숲을 베어내 내화수림대를 만들었다.

 

해우소는 가운데 창고를 둔 3칸짜리 아담사이즈이다. 해우소에서 나온 거름으로 스님들이 손수 채전을 가꾸고 있다. 그 채전의 고수도 해우소 거름을 먹고 자란 것이다. 때마침 하얀 꽃을 피웠다.

 

고수는 지중해 원산으로, 독특한 빈대 냄새가 음욕을 다스린다고 하여 사찰에서 전통적으로 심어왔으나, 근래 들어 거의 씨가 말라버렸다. 떼 묻지 않은 지리산 비구니 토굴에 와서야 겨우 만난 고수. 그러나 반가움보다는 아쉬운 감정이 더 먼저 달려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글·사진=김재일(사찰생태연구소장)

[현대불교 부다피아.com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