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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40)피재길, 고약장수에서 종6품으로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0)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 홍천 피씨(皮氏)는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다. 대부분의 중인은 문과를 하던 사대부 집안에서 분파되었는데, 피씨는 문과 급제자가 없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1차 시험이었던 생원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 ‘사마방목’에도 피씨는 ..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7)조희룡의 '호산외기'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7) 조희룡이 지은 전기집 ‘호산외기’ 사마천은 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으로 본기(本紀)·표(表)·서(書)·세가(世家)·열전(列傳)의 다섯 가지 체제를 채택했다. 본기는 제왕들의 이야기이고, 표는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이며, 서는 제도를 서..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6)中人文學②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6) 후세에 전해진 중인들의 문학 서당 훈장인 최경흠을 중심으로 모였던 직하시사(稷下詩社)는 자신들의 창작활동보다도 중인 선배들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한 공로로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 개인의 시집을 출판하려면 적어도 몇백 편 정도의 작품 분량이 있어..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2)조선의 운명을 바꾼 역관 홍순언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2) 조선의 운명을 바꾼 역관 홍순언 문관인 정사(正使)는 공식적인 국서를 전달하고 답서를 받으면 그만이지만, 역관은 배후에서 절충하는 일을 맡았다. 절충하는 과정에는 유창한 외국어가 기본이었지만, 때로는 금품도 오가고, 여러 해 동안 오가며 맺어둔 인맥..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1)민중종교로 번진 천주교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1) 양반의 신문화운동에서 민중종교로 번진 천주교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모친상을 당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사르자, 천주교 신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가 불거졌다. 양반층의 천주교 신자가 대부분 남인이었으므로, 탕평..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27)譯官 오경석의 외교활동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7) 역관 오경석의 외교활동 조선시대 외교의 강령은 사대교린(事大交隣), 즉 ‘큰 나라 중국은 섬기고 이웃 나라 일본과는 사귄다.’는 것이다. 외교는 예조(禮曹)에서 관장했지만, 실제적인 사무는 사역원과 승문원(承文院)에서 맡았다. 중국이나 일본에 가서 통..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25)중국통 역관 이상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5) 열두차례나 중국 오간 역관 이상적 양반 관료들은 고유 업무가 있었으므로 일생에 한번 사신으로 가기 어려웠다. 두 차례 이상 나갔던 문인은 별로 없다. 그러나 역관들은 외국에 나가 통역하는 게 업무였으므로, 능력만 인정되면 몇 번이라도 나갔다. 외국에 .. 더보기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24)서울에 中人은 얼마나 살았을까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4) 서울에 중인은 얼마나 살았을까 조선후기 전문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인들은 대부분 서울에 살았다. 지방에는 중인이 맡을 관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신분은 호적에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하버드대학의 와그너 교수가 1663년에 작성된 서울 .. 더보기